시편 1편
1. 행복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악인들의 꾐을 따라가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에 동행치도 않으며,
비웃는 자들의 모의에는 가담하지 않는 그 사람,
2. 오직! 야훼의 뜻만을 반기며,
다만! 야훼의 뜻만을 주야로 되새기는 그 사람이다.
3. 그 사람은 시냇가에 옮겨심긴 나무 같아서
철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그 잎은 시들지 않아.
그의 모든 일,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못하니,
마치 바람에 흩날려가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석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며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함께 앉지도 못하리라.
6. 아, 악인들의 길은 멸망할 뿐이지만,
의인들의 길은 야훼께서 기필코 알아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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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시(詩)는 구약성서 시대의 가장 후기에 속하는 시(詩)이다. 이 시는 또한 옛 시가(詩歌) 자료들을 집대성하였던 후기 ‘현자’(賢者) 집단의 한 대표적 현자가 ‘히브리 경건의 핵심’을 신학적으로 깊이 반성을 한 후에, 그것을 이스라엘 제의(祭儀)종교의 대헌장(大憲章) 및 시편 전승자료 전체 즉 150개의 시들[히브리어 성서] 또는 151개의 시들[그리스어 역 구약성서]의 전문(前文, preamble)으로 설정한 ‘지혜 시’ 유형의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詩)는 시편 편집물의 단순한 하나의 ‘서론’ 또는 ‘서언’ 이상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시편 1편을, 시 19B편과 119편 등과 함께, 제3편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대한 시 수집물의 그 제의적인(예배 의전적인) 성격과는 매우 구별되는 비(非) 제의적인(非 예배 의전적인) 시(詩)로서 엄격하게 차별화하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오히려, 이 시는 시편 서(the Book of Psalms) 전체의 신학적 개요(precis)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문맥에서 보면, 이 시는 시편 서(詩篇 書) 전체, 즉 3편으로부터 시작하여 시편 끝 부분의 ‘할렐루야 시’ 묶음까지의 시편 시 수집물 전체를 편집해 놓은 후, 시편 역사 전(全) 과정을 신학적으로 반성한 다음, 시 2편과 함께 시편 서(詩篇 書)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는 시로서, 즉 아쉬레(’ašrē, ‘~의 행복이여!’ 라는 어투)로 시작하여(1:1) 또한 역시 아쉬레(’ašrē)로 끝이 나는(2:12d) 시로서 맨 앞에 오게 되었으나, 경전(經典)으로 최종(最終) 결정될 때에는, 본래 하나였었던 그 한 개(1편+2편)의 시가 1편만 따로 분리되어 시편의 대헌장(大憲章) 및 대 전문(preamble; 前文)의 기능을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겠다.(Cf. Brueggemann, The Message of the Psalms, Minneapolis: Augsburg Pub. House, 1984, Pp.38-39) 그 뚜렷한 증거로서는,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 사도행전 13:33이 시2편을 시1편으로 잘 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그 예로서 들 수 있는데, 한국어 번역자들이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 사도행전 13:33의 잘못된 본래 말인 “시편 첫째 편에”라는 말을 “시편 둘째 편에”라는 말로 고쳤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시 1편의 그 중심 사상은, 시편 전체(3편→150편)의 문맥을 통해서 그리고 그 시편 전체의 삶의 환경(Sitz im Leben)에 따라 신학적으로 엄격하게 다시 되돌아보며 반추해 본 결과,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 본래의 본질상(!), 의인 또는 선한 자들만을 기다리고 있는 성격의 것, 즉 악(惡)과 맞서는 자(의인)들만을 위하여서 이미(!) 창세(創世) 때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증언한다. 따라서 이 시(詩)는 <‘행복’이라는 것은, 그 무슨, 인간이 애써 찾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다 마침내는 얻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었었다.>라는 것을 증언한다고 하겠다. 이 점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필자는 본문 번역[私譯] 때, 그 첫 절을 ‘그’ 사람이라고 하여 정관사 ‘그’(히브리어 ‘하’[hā])를 특별히 강조하여 번역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파랑새[靑鳥]는 우리네 현실에서는, 항상, ‘저 산 너머’에만! 있었던 것이다. 실로, 악과 항상(!) 맞서 있는 삶, 즉 그 반듯한 삶(의로운 삶) 안에만 진정한 행복이 깃든다(머문다)고 하는 시편 최종 편집자의 신학적 확신, 이른 바, 하나님의 뜻(토라)에 일치하는 삶과 하나님의 뜻(토라)을 무시하는 삶 사이의 타협할 수 없는 도덕적 차이에 대한 확신을 이 제 1편에서 읽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참 행복>(beatitude; 至福)이란, 그러므로, 마태복음 5:3-10에 나타난 예수님의 <팔복(八福)>선언에서도 이미 종말론적 급박성을 가진 말씀으로 나타났듯이, 복음서의 ‘지복’(至福) 선언은 인간의 단순한 ‘순간적 행복감 현상’과는 그 본질 면에서 엄격히 구별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팔복 선포에 나타나는 이러한 성격(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된 성격)의 ‘지복’(至福)은, 놀랍게도 이미 시편 1편에서, 특히 브릭스(Briggs, C.A.)와 다훗(Dahood, M)의 탁월한 예견에서 나타났듯이, <시냇가에 옮겨 심겨진 나무의 시들지 않음>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이미 그 특성이 분명하게 들어났다. 즉 그러한 지복(至福)은 단순히 악을 피해가는 것, 즉 ‘않는다.’(not)에 초점을 맞추는 그런 ‘소극성’ (abdication) 보다는 오히려 <악 또는 불의와는 용감히, 적극적으로, 맞서는 그 긍정적인 삶> 속에만 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다.(pace Craigie, P. C. 그러나 특히 Dahood, M의 시편 주석서[Psalms 1-50, Pp. 1-5]와 Briggs, C.A., ICC, The Book of Psalms, I, Pp. 3-5 참조; 그 외에도 Miller, P. D., Interpreting the Psalm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Pp. 81-86; Brueggemann, W., The Message of the Psalms, Pp. 38-39; Firth, D. G. “The Teaching of the Psalms,” in his Interpreting the Psalms[e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5, P. 171) 그리하여 이 부분을 주석하던 사무엘 테리언 교수는 매우 의미 깊게도 “악의 영향에 저항하고 거기에 맞서는 의인은 야훼의 법 의지로부터 받는 기쁨 안에서 항상 육체적 정신적 활기를 얻는다.”라고 주해(註解)하기도 하였다(Terrien, S., The Psalms, Grand Rapids & Cambridge: W. B. Eerdmans Pub. Co., 2003, P. 72). 그렇다. 그러한 ‘지복’(至福)은, 그러므로, 악 또는 불의를 가슴 저변에 여전히 묻고 있는 채로! 그 복만을 쟁취(爭取)하려는 그런 사람의 그 어떤 인간적 욕망의 성취, 성공 및 번영 속에는 결코(!) 있는 것이 아니! 라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행복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시편 1편 제 1련(聯; 1-2절)의 응답은, 흔히들 잘 못 이해하듯, 이른 바, <‘않으며,’ ‘않으며,’ ‘않는’>이라는 삼중(三重)의 히브리어 ‘로!’(lō’, not)가 가진 그 부정(否定)의 강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소극적/금욕적 삶의 태도>라고 이해하는 것은 이 시의 중심 사상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의 현실은 불의 또는 악의 위협과 유혹에 대하여 <아니오!(no!)>를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계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박근혜 새 정부가 들어서려 하는 출발점에서, <한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알리는 그 뜻 깊은 팡파르(fanfare)를 오히려(!) 우울한 애가(哀歌)로 퇴색시킨, 저, 초대 총리 후보자 청문회 불발과 총리후보 찾기 난망(難望)의 현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떳떳하게 나서서 총리 청문회에 나설 지도자가 그렇게도 없어서 새 정부가 출발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니! 아, “정의를 행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하리라.”(렘 5:1)라고 애절하게 말씀하시며 친히 야훼께서 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거리를 ‘진실’(faithfulness)을 찾아 두루 다니셨다고 예언자 예레미야가 증언하였던 그 멸망직전의 예루살렘의 상황과 오늘의 우리 상황이 과연 무엇이 다른가?
돌연, TV 뉴스에서는, <북한의 3차 핵실험 단행!>(2013년 2월 12일)이라는 특보가, 마치 예언자 예레미야가 신흥 바벨론 제국의 유다 침략을 다급하게 예언하였듯, TV 아나운서의 숨찬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대한민국 백성들의 불안한 가슴속을 파고든다. 그리하여 시편 1편 기자는 지식인 사회의 모호한 지적 궤변과 더 이상 흥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1편 시인은 마침내 중도의 변(辨)은 버렸던 것이다!!(No middle way!!) 즉 ‘토라’(=하나님의 법의지[法 意志])에 대한 배타적 복종만이 ‘복’으로 가는 ‘그 길’(the way)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의 파루시아(parousia: 재림[再臨])가,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이라는 대 사면(大 赦免)의 죽음 이후 2000년이 넘도록 까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러므로 너무나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시편 1편 기자는, 아마도, 구약종교의 역사가 시작된 지 처음으로(!), 즉 모세가 이집트 노예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하나님의 산[시내 산]에 도착하여 ‘계명’[토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때부터 거의 천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이른 바, 구약종교의 마지막 시기에 즈음하여 마침내 “시냇가에 옮겨심긴 나무가 철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그 잎은 시들지 않는” ‘지복’(至福)의 그 세계에 대한 신앙을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로 하여금 주목(注目)하게 하였던 것이다. 실로, 놀랍고도 획기적인 새 선포요 새 계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는 분명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지복’(至福)의 세계였다. 그리하여 차안(此岸)으로부터 피안(彼岸)으로의 전이(shift:轉移)를 ‘지복’(至福)으로 선포한 구약의 첫 메시지, 이른 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제의 종교서(祭儀宗敎 書)요 대표적인 예배 의식서(儀式書)인 시편(詩篇)의 전문(前文)에 ‘사후 영생의 지복’을 명시(明示)한 그 첫 예(例)를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확실하게 보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구약의 신앙세계에서는 ‘부활’이나 ‘내세의 영생’에 관한 신앙은 없었다는 것, 이른 바, 후기 묵시문학에 속하는 다니엘서 시대만큼의 매우 후대에나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신앙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약학계를 지배하는 정설이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 전기(前期)의 자료인 호세아 6:2나 에스겔 37장(에스겔 골짜기 환상 기사[記事])에 나타난 사후(死後) 신앙과 부활 신앙은 ‘개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회복’을 말하는 것으로서 개인의 사후(死後) 생(生)에 대한 신앙이란 구약의 신앙세계와는 낯선 것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리하여 호세아 6:2는 부활신앙에 관한 기사로서, 포로 전기(前期)의 이스라엘 자료에도 ‘부활에 관한 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주장, 특히 호세아 6:2는 예수(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제3일 부활에 관한 구약의 한 ‘예시’(豫示)일 수 있다고 오래 전부터 개진된 바 있었으나(Cf. Stamm, J. J., “Eine Erwaegung zu Hosea 6:1-2,” ZAW 16(1929), 266-268), 그러나, 현재의 구약학계는 여전히 성서종교는 이교(異敎)의 부활신앙과는 ‘다른’ 신앙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었다. 즉 <야훼 하나님은 이교의 신(神)들, 즉 이집트-메소포타미아-가나안-그리스 등의 神들처럼, <죽고 다시 살아나고, 죽고 또 다시 살아나고 …하는 순환을 철따라 반복하는 계절의 신들(gods)>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한 분 하나님’(the living God)>이시라는 확신을 성서종교는 계속, 즉 아브라함 때부터 구약의 말기, 즉 에스라-느헤미야 때까지 줄곧 견지(堅持)하고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논리이다.(Wolff, H.W. Hose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Pp. 116-119. Cf. Harper, W.R.; McCarland, S.V.; Baudissin, W.W.; Hempel, J. et al.)
그러나 구약시대 끝 부분, 즉 욥기, 잠언, 전도서, 시편의 지혜시들 등등의 형성시기에 속하는 ‘시편 1편’(cf. 시 1:13)은, 시편 73:26과 욥기 19:26과 동의(同意) 평행을 이루면서, 이스라엘 제의 종교의 산 증언들인 고대 시가 자료들(시 3편-149편)의 최후 편집물을 신학적으로 깊이 반성하였다. 그 다음 이 시편 1편 시인은 그 큰 덩어리 시가집(시 3-149편)의 서론(시1-2편)의 전반 부(前半 部), 즉 현재의 시1편을 시편 전체의 대 전문(大 前文)으로 만들면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지향해야할 최고의 ‘행복’(至福, beatitude)을 정의(定義)하였는데, 이 시1편 시인은 “오직 야훼의 뜻(토라)만” 그리고 “다만 야훼의 뜻(토라)만”을 추구하는 그 사람이 얻을 행복을 가리켜, 또한 감히(!), 구약 역사 약 13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시냇가에 옮겨심긴(샤툴, shātȗl) 나무가 시들지 않는(로-얍볼, lō’-yavbôl) 그 영원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시 1:3)>, 즉 <사후[死後]의 영원한 삶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다.(Cf. Briggs, C.A.,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ICC], Edinburgh: T.&T. Clark, 1906, 1976, vol. I, Pp. 3-5; Dahood, M, Psalms I: 1-50, New York: Double & Co. Inc. 1965, Pp. 3-5) 실로, 놀라운 일이요 신학적인 대 전환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시편 1편 시인은, 그리하여 마침내(!), 이 영원한 세계의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는 그 사람을 가리켜, 감히, “오직! 야훼의 뜻만을 반기며, 다만(!) 야훼의 뜻만을 주야로 되새기는 그 사람”(2절)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즉 이 점은 1절에 나타난 바, ‘않는다.’(not)의 삼중부정(三重否定)어투가 가지는 그 근본 의미를 아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악’과 ‘불의’에 맞서는 자만이 그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이 시의 후반부의 첫 두 절, 즉 시 1편 4절-5절이 더욱 분명하게 반복 평행법적으로 설명해준다. 즉 ①4절은 “악인들은 그렇지 못하니, 마치 바람에 흩날려가는 쭉정이와 같다.”라고 말하고 ②5절은 “그러므로”(‘al-kēn)라는 ’원인 설명의 수사어투‘를 절(節) 서두에 붙여서 <악인들과 죄인들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절(6절)은 본래는 시편 2편과 그 이하의 ‘탄식기도-감사-찬양-지혜’의 시들의 시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즉 “아,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는 선포가 시의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필자가 임의로 상반 절(上半 節)로 옮겨 놓았다. 이른 바, “의인들의 길은 야훼께서 기필코 알아주시리라.”라는 본래의 상반 절(上半 節)을 모든 인간 갈등의 시감(詩感)들을 모두 아우르는 유일한 ‘대 결론적 전문’(大 前文, preamble)이 되도록 강조하기 위하여 전반절과 후반절의 순서를 필자 임의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즉 ‘악인의 멸망’보다는 ‘의인의 필연적 마지막 구원’을 이 시집의 불변의 결론(the irreversible conclusion)으로 고쳐 설정(設定)하였던 것이다. 의인, 즉 악과 맞서는 자의 길만은 야훼께서 기필(期必)코!! 알아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악과 맞서서 끝까지 오직! 야훼의 뜻만을 지켜가는 자는, 즉 의와 악 사이의 ‘도덕적 절대 차이’(a moral distinction between righteous and wicked)를 모호한 타협(ambiguous bargain) 없이 또 그 ‘토라’신앙을 진부하게 만들지(trivialize) 않고 굳게! 견지하는 자는 시냇가에 옮겨심긴 나무(shifted =transplanted tree=the tree of life, 창 2:9; 3:24)와 같아서 죽음의 절대세력도 이겨내어(호 13:14; 고전 15:54 -55) 금지된! 생명나무로 가는 그 길(the way to the tree of life, 창 3:24)이 그에게만은 환히 뚫려 열릴[開通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갈 곳은 시 1:3절에 나타난 바와 같은, 이른 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생명나무가 있는 곳’(창 2:9)일 수밖에 없다. 즉 성서문학의 비신화화 과정을 철저히 거친 후에라도! 의인(義人: 악과 맞서는 사람)이 갈 곳은 단지 그 곳 하나님의 거주지(시 90:1)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 90:1, 아니, 시 90편 전체의 신앙고백은 창 2:9에 대한 반세기 이상의 신학적 반성을 거친 ‘비신화화 작업의 결실’이라고 볼만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추론은 시편 1편이 구약성서 경전 화(經典 化) 역사의 마지막 단계의 결실인 사실과도 맥을 같이 한다. 동시에, 이러한 판단은 시 1:3의 “옮겨심긴”이라는 수동태(受動態) 동사와 “시들지 않아”라는 어구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주석의 판단과도 충돌하지 않고 평행한다.(Cf. Briggs, C. A. & Dahood. M. et al.) 즉 필자는 여기서 <창 2:9(J)→시 90:1→시 1:3(창 1:1)→기독교의 사도신경 결론>이라는 신학적 반추과정(反芻過程)도 또한 상상해본다. 그러므로 시1:6의 결론: “아, 악인(惡人)들의 길은 멸망할 뿐이지만, 의인(義人)들의 길은 야훼께서 [반드시] 알아주시리라!”라는 선언은 구약성서 대헌장의 불가역의 전문(前文, preamble)이 된 것이다. 그렇다. ‘토라’를! 즉 ‘하나님의 법-의지’(法-意志)를, 전혀, 모호한 타협(ambiguous bargain) 없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유일한 길(요 14:6)로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자’의 길이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요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