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그동안 한국개신교회는 박정희로부터 시작되는 군사독재체제의 반민주적 행태와 그 체제가 몰아붙이던 근대화과정에서 빚어지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침해에 대항해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함으로써 국민들의 높은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신교회의 일련의 사업을 총칭해서 우리는 “사회선교사업”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교회협의회 회원교단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산업 선교운동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헌신함으로써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 선교운동 내지 사회선교 운동이 당시 지향했던 목표는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운동, 즉 인권운동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국개신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권운동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주로 청년들과 대학생들에 의해서 추동되던 민주화 운동에서 경찰들과 군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희생당하던 사람들을 교회가 음양으로 지원함과 동시에 교회 자체가 나서서 직접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교회는 초기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교회 밖에서 전개되는 민주화운동과 연대하여 활동하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일들을 했었다. 특히 독재정권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들 예를 들면 인혁당사건의 희생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희생자들을 위해서 가톨릭교회와 함께 손잡고 투쟁에 나섬으로써 많은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독재에 맛서 인권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늘 직면하게 된 한계는 분단이라는 남북간의 대결상황이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개신교회는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를 중심으로 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분단된 남과 북이 통일 되지 않고는 인권문제, 민주화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에서 평화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때를 맞추어 한국개신교회는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통일운동은커녕 통일이란 말조차 거론할 수 없는 살벌한 상황에서 NCCK를 중심으로 통일논의를 시작하고 세계교회의 협력을 얻어서 이 논의를 해외에까지 확산시키게 되었다. 당시 통일논의나 운동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반공법으로 처형되거나 옥고를 치르고 있었으나 교회는 남북의 분단됨 민족의 화해를 교회의 선교적 사명으로 알고 용기를 갖고 이 일에 선구자가 되었었다. 그 결과 북한과의 대화의 물꼬를 트고 이산가족들의 상봉운동과 북한의 동포들을 돕는 일에도 크게 기여했었다.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개신교회의 이러한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통일과 평화운동은 정부로부터 많은 억압을 당하고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 속에 진행되었고 따라서 국민들의 신뢰를 획득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개신교회의 양적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60년대 이후 약 30여 년간 한국개신교회들이 경이적으로 양적 성장을 달성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에 확고하게 서서 사회적 약자들, 고통당하는 사람들, 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전대미문의 한국개신교회의 부흥을 어떤 부흥운동이나 성령운동에서 찾는 이들이 있지만 필자는 단연 예수의 가르침에 확고하게 서서 전개한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통일과 평화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당시 개신교회들은 이러한 운동들에서 자기의 확고한 정체성을 찾았고 거기에 따라서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었던 것이 개신교에 대한 신뢰성과 그 결과로서 양적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1990년대 초부터 오랜 투쟁 끝에 한국 사회가 민주화됨으로써 이전과 같은 노골적 인권침해는 다소 사라지고 또 통일과 평화를 위한 노력들이 김대중 노무현정부들에 의해서 점차 진행되자 한국개신교회는 이제까지 어려운 독재시기에 가졌던 기독교의 본래의 정체성과 활동방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 하에서 한국 개신교회들은 70년대 중반에 보수적 기독교에 의해서 도입되고 추동되었던 교회성장이론을 붙들고 교회의 지속적 양적성장과 확대를 시도하고 거기에서 어떤 정체성 같은 것을 찾으려고 했다. 미국식 자본주의 성장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성장이론이나 그 쌍둥이 프로그램으로서 자본주의적 다단계판매 전략이론에 근거한 소위 제자훈련프로그램은 다른 하나의 성장이론 즉 박정희의 산업화이론과 경제성장이론과 맞물리면서 그 힘을 더욱 강화한다. 이 때 산업화의 일군들로서 도시로 몰려든 다수의 농촌인구들이 자기동일성을 찾고 안식처를 구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서울과 같은 도시교회들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고 나아가서 새로운 도시로 탄생한 강남에서 다수의 대형교회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성장이론은 그 실천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일탈된 모순들을 야기 시킴으로써 한국 개신교회가 이전까지 확보했던 정체성을 붕괴시키고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교회성장도 더 이상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들을 살펴보자.
첫째 교회성장 이론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인간의 성공에 신뢰를 둔 이론으로서 전도활동에서 사람들 사이에 무한경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을 비판할 때 “공로가 아니라 은총”이라는 명제를 제시했던 것은 교회의 대의는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지,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물신에 기초하고 그것을 목표로 한 교회성장 이론은 매우 물신 숭배적이고 따라서 반신적이어서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상적 원리이다.
둘째 교회성장 이론의 목표는 새로운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로 삼아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미 신자가 된 다른 교회(파)나 다른 종교의 구성원을 자기 교회의 구성원으로 삼으려는 검은 동기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웃 교회(단)들 및 다른 종교들과 갈등을 야기하여 그 운동은 신뢰를 크게 잃게 만들었다. 대개 이 시기에 일정한 교회성장목표를 세우고 부흥사들을 총동원해서 진행되었던 교회성장론이 대개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간 것은 상대방 교회들이나 종교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대항 전략을 수립했거나 보다 더 강력한 방어 수단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성장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르치는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의 복음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다만 샤머니즘적이고 이기적인 축복이론에 근거하고 있어서 교회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으로 위장된 교회성장론의 비복음성의 실체를 발견하고 오히려 교회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교회성장론자들이 설교에서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고 시도 때도 없이 외쳐대는 축복논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샤머니즘으로 위장한 이단이론이다.
그 결과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의식을 가진 깨어있는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복음으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한 개신교회들을 떠나서 다수는 가톨릭교회로 가고 일부는 불교 등 다른 종교를 찾아갔다는 것이 종교사회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다.(이원규교수). 여기서부터 한국의 개신교회는 심각한 종교적 사회적 신뢰성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교회와 신자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러한 교회성장이론에 의지하고 있는 성직자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들로 만들었다.”(딤전 3:5). 이런 신자들을 향해서 예수는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1970-80년대부터 한국 개신교회의 리더십을 이러한 교회성장 이론가들이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한국개신교회의 정체성과 세력판도는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개신교회를 대표하던 리더들로 구성되었던 단체인 NCCK에 대항하여 소위 매우 보수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교회연합운동 사이의 분열의 씨앗은 이미 1959년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을 두고 갈라졌던 예수교장로교회 통합파와 합동파 사이의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보다 보수적인 예장 합동파는 세계교회협의회에 당시 소련과 동구라파의 정교회들이 회원으로 참가하는 것을 빌미로 삼아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집단이라고 비판하면서 거기에 동참으로 결정한 예장 통합과 갈라섰던 것이다. 이렇게 갈라선 예장 합동파는 그 후에도 다수의 분파로 갈라져서 대립투쟁하드니 NCCK에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로 뭉쳐 한기총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예장 통합과 합동이 갈라선 것은 기독교 교리적 이유에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예장 합동파와 거기서 다시 갈라선 분파들은 1961년 박정희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내걸었던 “반공국시론”에 편승해서 음으로 양으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또 지원을 받았었다. 따라서 박정희독재정권과 투쟁을 전개했던 한국교회협의회와는 대립하는 입장에서 복음주의 계통의 단체들과 더불어 박정권을 지지하는 선언서들을 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들 보수적 개신교회들은 세계교회협의회와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세계복음주의연맹”과 전선을 같이하고 활동했었다. 이러한 반 한국교회협의회 운동이 마침내 다수의 세력을 규합하여 한국기독교총연맹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개신교회가 진보적인 NCCK와 보수적인 한기총으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투쟁하게 된 데는 한국개신교회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의 문제도 내재한다고 보인다. 앞서도 언급한대로 한국교회협의회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30여 년간 어려운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나름대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국민들의 신뢰를 받으면서 일해 왔다. 이 때 한국교회협의회를 초지일관하게 이끌어온 김관석목사의 리더십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필자는 그의 리더십을 다음과 같은 3가지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3가지 덕목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첫째 그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높은 성서적 신학적 지식을 잘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상당한 수준의 신학적 학문성을 갖추고 세계 (특히 에큐메니칼한)신학적 동향과 제대로 파악하고 세계교회협의회가 지향하는 방향과 프로그램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단체의 리더를 큰 선박의 선장에 비유하자면 그는 자기의 배의 구조와 성능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배가 항해해야 할 목표를 정확히 짚고 있는 뛰어난 교회지도자였다.
둘째 그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높은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따라서 그는 한국에서 흔히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도덕적 흠결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독재정부와 결탁한 부하직원에 의해서 독일에서 지원한 선교기금의 유용혐의로 고발을 당하는 억울한 일이 있었다. 당시 다수의 독일교회에서 파송한 목사들이 그를 위해서 법정에서 증언함으로써 그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요즘도 다수의 교회지도자들이 공금유용이나 여성문제 등으로 세상법정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김관석목사는 도덕적으로 매우 신뢰할만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김관석 총무는 지식과 도덕성은 말할 것도 없고 고결한 지혜와 소통의 민주적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다. 리더들은 다른 리더들과의 소통이나 부하직원들을 통솔하는데 있어서 지식이나 도덕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소통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구약성서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고 나와 있다. 김관석 목사야말로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했고 동시에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친화했던 지도자였다.
김관석 목사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맡아서 이끌어갔던 지도자들을 평가하자면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지식(혜)과 도덕성에서 다소 부족한 점들이 있었던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후의 지도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성서적 신학적 소양들이 부족했으며 따라서 세계적 신학의 동향이나 특히 세계교회협의회의 방향성이나 프로그램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탐구하고 실천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 결과 이번 세계교회협의회의 부산총회를 앞두고 NCCK 김영주 총무가 복음주의 측과 협조한다는 구실 하에 어처구니없는 (쓰레기 같은)성명서에 서명 날인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는 성서와 신학적 소양이 너무나 부족한 인물로서 그가 총무로 선출될 당시부터 그가 뭔가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이 있었다.
한기총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그 깊은 내막은 잘 알 수 없지만 창립초기부터 감투싸움에 금전이 오고간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기서 지도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지식(혜)이나 도덕성을 갖춘 인물들이 아니라 이른바 교회 “정치꾼”들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물들이 교회나 교회단체들의 지도자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한기총도 파벌 싸움으로 날을 새운다는 소식이 지금까지도 들여온다. 10년 가까이 계속되는 감리교단의 감투싸움이나 예장 합동파의 리더십 싸움도 한국개신교회들의 신뢰성을 추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정권시절 정치적 리더십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명박은 특히 인사문제에서 자기를 선출한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보다는 인재를 널리 찾아 기용하기보다는 이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특정기업의 CEO처럼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참모진을 만들어서 대다수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추진하는 사업들에서도 국민 전체의 공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취향이나 특정집단(예로서 토목사업자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함으로써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그가 재임하는 지난 5년 동안 그를 지원해야 할 한나라당조차 완전히 소외되고, 야당과 국민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그 결과 그는 국민들 전체가 아니라 대기업들만 지원함으로써 빈익빈 부익부라는 격차사회를 심화시켜놓았다. 그의 재임기간동안 1%의 부자들은 재산이 16배나 늘어났고 나머지 국민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아니면 소득이 줄어들었다. 그는 장애인들의 LPG차량에 주던 혜택도 빼앗고 노인들에게 3개월에 35,000원씩 주던 교통수당도 박탈한 대단히 무자비한 인물이다.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를 내가 결단코 처벌하리라”(암8:4). 그는 기독교의 장로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매몰찬 자본주의적 인물이다.
지금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이다. 그의 리더십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분분하다. 벌써 그의 인사 스타일을 두고도 말들이 많고 국민들은 답답하다. 그를 “수첩공주”라느니 그의 수첩은 일본말로 “엠마죠”(閻羅大王 手帖)라느니 말들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인물들의 면면을 보니 이명박이 한 것처럼 모두 자기를 닮은 인물들이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명작 “존재와 시간”에서 그의 독특한 인식론을 전개한다. 사물이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이나 인물이 점하고 있는 장소와 시간을 탐구해 보라는 것이 그 요지다. 신학에 적용해서 야훼라는 신은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볼 때 그가 나타났던 장소와 시간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야훼는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의 신처럼 왕궁에 거주하며 왕에게나 축복하는 신이 아니었고 광야에 나타나는 신이었다. 그리고 야훼는 홍해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위험에 처했을 때(시간) 나타나 그들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예수가 말구유에 태어날 때 그의 천사들은 광야에 나타나 목동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는 하나님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야훼는 왕이나 귀족의 신이 아니고 백성들의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신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간직한 호화찬란한 바티칸 궁전이나 거대한 교회당에 들어앉아 고위 성직자들의 찬양이나 받고 그들을 축복해 줄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박근혜가 추천한 인물들이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장소가 아디며 시간이 언제인가를 보면 그 인물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그가 추천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공성이 담보되어야 할 권력기관에서 일했으나 그들은 국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기 보다는 사리와 사욕을 채우는 일에 열중했던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공공성을 담보할 인물은 거의 전무하고 모두가 사적인 일에 몰두하여 큰 사익을 챙긴 인물들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염라대왕의 수첩이야기가 나왔으니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유행했던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수첩이야기를 소개해 보자. 사실상 불교의 염라대왕역할은 기독교에서는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담당한다. 저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가 죽어서 천당으로 들어가려고 정문에 도달하니 베드로가 수첩을 들고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베드로 차례가 되어 베드로 앞에 서니 수첩을 들여다본 베드로는 바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소이다. 저 쪽으로 비키시오.”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난 바르트는 베드로에게 항의했다. “나는 기독교 교의학을 연구하여 장장 14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고 또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서 『오늘날 신학의 실존』(Theologische Existenz heute)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공헌했으며 특히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 정권과 맞서 싸워서 잠자는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래도 지금은 안 되니 잠간 저기로 비켜서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바르트가 그 안에서 자기의 동료였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큰 소리로 베드로에게 항의했다. “나 보다 시원치 않은 학자로서 학문적 업적도 별로 신통치 않은 쿨만은 어떻게 저기에 들어갔습니까?”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14권이나 되는 방대한 교회교의학을 썼고 쿨만은 책 몇 권밖에 쓰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학문적 업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매 주일 교도소를 찾아가 죄수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을 돕고 위로해준 까닭입니다. 당신이 히틀러 독재에 항거했다는 문제는 잠시 후에 고려해 보겠소.” 그래서 바르트는 비켜서서 베드로의 재심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고 한다.
지도자란 모름지기 전문적 지식과 소통의 지혜 그리고 도덕성을 갖추는 것은 물론 사리와 사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공공성을 지닌 인물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한국교회나 사회 모두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론에만 의존하려는 신보수적 인물들이 교회와 정치의 지도력을 장악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사회정의에 기초한 복지사회의 요건으로서 경제민주화나 정치민주화의 길은 험하고도 멀어만 보인다. 박근혜 정부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미래가 지극히 염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