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근은 23세 이전에 이미 자신의 호를 지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우(晩雨)’
풀이하자면, ‘늦은 비’라고 표기되는 아주 운치 있는 호였다. 그는 1921년 5월에 발표한 자신의생애 첫 논설의 필자명을 ‘송만우(宋晩雨)’라고 표기할 만큼, 그는 자신의 호에 대해서 큰 자긍심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하필 ‘만우’라는 호를 지었을까?
송창근의 일본 청산학원 시절의 친우인 조승제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송창근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가 말하기를 “자기 호의 뜻은 야고보서 5장 7절에 있는 ‘늦은 비’의 뜻으로 ‘만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로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야고보서 5장 7절)
‘만우’라는 아호는 글자에 담긴 뜻이 매우 아름답고 심원하다. 발음하기에 음운적으로도 깊고 부드럽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는 성경 구절 중에서, ‘늦은 비’라는 상념이 그의 마음 속에 뛰어 들어와서 크게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중에서 특히 ‘늦은 비’가 더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에는 그가 지닌 문학적 감각도 작용했으리라.
그의 일생을 보면, ‘만우’라는 그의 호가 어떤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는 농부들이 귀한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길이 참아 기다리는 ‘늦은 비’의 역할을 자신이 전 생애를 바쳐서 이루어 내었던 사람이 아닌가.
송창근은 자신의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지어주기도 잘했다. 조승제 목사는 자신의 호인 ‘춘우(春雨)’는 송창근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김재준의 회고에 의하면, 송창근은 동경에 유학하고 있을 때 김재준에게 ‘장공(長空)’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만우도 동경 유학의 길을 걸었다. 동경서 채필근, 강봉우 등과 함께 고학하면서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 서울에 있었다. 학자금이 없어서 정식 학생으로 등록은 못했어도 도서관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고 꿈도 드높았다. 만우와의 편지 왕래는 잦았다. 나는 내 창작이랄까 수상이랄까 어쨌든 내키는 대로 적은 글들을 소포로 만우에게 보내기도 했었고 만우로부터 장공(長空)이란 호를 그때 받았다.
송창근이 지은 ‘장공’이란 호는 아시시의 걸식승 성 프란시스의 시 ‘태양의 노래’에서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송창근은 1926년 8월 29일에 ‘태양의 노래’를 번역하여 <청년> 잡지 1926년 9월호에 게재했다. 시의 말미에는 “1926년 8월 29일 새벽에 종현 성당의 미사 종소리를 들으면서 ‘태양의 노래’를 초역하여 내 평생 높게 여기는 믿음의 형제에게 보내나이다”라는 말이 참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시 안에 들어 있는,
내 주께 찬송을 드릴지라
우리 형제 바람과
태양과 구름과 만리의 장공(長空)
그리고 사계절을 지으시고
주는 이 모든 것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십니다
라는 구절 가운데서 ‘장공’을 따서 김재준의 호로 선사한 것이다.
가깝게 지내던 선배인 채필근 목사의 호는 ‘편운(片雲)’으로서, ‘열왕기상 18장 44절’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니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 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하는 44절에 이어지는 다음 구절인 45절에는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라는 구절이 따라 나온다. 시작은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인’ 편운으로 작게 일어나서 이내 하늘을 뒤덮어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 과정이 채필근의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만우’라는 아호의 아름다움은 이미 유명한 것이다. 정대위 목사가 기독교계 선배들의 아호를 논한 글 속에 송창근의 아호 ‘만우’와 관련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송창근 박사의 아호 만우(晩雨)는 하나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 동안 나는 왜 이러한 그의 아호를 늦은 단비로 혹은 한밤중에 몰래 오는 가느다란 초가을 비 정도로밖에 상상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애롭고 부드러우며 또한 자상하고 따스하여 거의 여성적이랄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춘 구의 품격을 나는 지금까지도 여실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만우란 아호는 그의 동경 학우들에게 뿐 아니라 1926년 이후 그의 샌프란시스코, 프린스톤, 웨스톤 등의 신학교 동창들에게도 매우 애호를 받았다. 그의 프린스톤 시대의 동창인 최윤관 목사는 송 박사의 아호 만우가 너무도 아름다워 자기는 춘우(春雨)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송창근은 ‘만우’라는 호를 가진 외에 ‘시온성(時蘊城)’이라는 별호도 지어서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시온성’의 용도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문학 작품을 발표할 때만 썼다. ‘시온성’의 함의는 다층적이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시온성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한자가 뜩하는 바, ‘시 시(時)’ ‘쌓을 온(蘊)’ ‘성 성(城)’ 문자 그대로 ‘시를 쌓아 놓은 성’이란 뜻으로 자신이 지닌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담은 별호였던 것이다.
송창근이 20대 때부터 활발하게 시작한 각종 장르의 집필활동에 따라 ‘만우’와 ‘시온성’은 여러 언론 매체의 지면에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또한 뒷날의 이야기인데, 그는 미국 유학 중에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었다. 그것은 물론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서 딴 이름이었다.
자료제공: 경건과신학연구소(소장 주재용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