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2.12.22.
위험한 '성탄'
(마태 2:1-18)
1. 예수의 '성탄'은 정치적 사건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사건은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마태복음의 증언은 바로 이러한 성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성탄의 현실은 우리가 즐기는 크리스머스 축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칭호는 결코 상징적인 칭호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정치적인 통치자로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께서 실제로 정치적 통치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랫동안 서구 기독교 신학은 예수를 종교적인 영웅으로만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정치적인 통치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 중에 6절에 인용된 구약성서의 말씀에서 메시야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구약의 미가서 5장 2절과 4절 말씀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의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약속한 미가서 5:1-5절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군대의 도성아, 군대를 모아라! (혹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아, 네 성벽을 튼튼하게 하여라!")
우리가 포위되었다!/ 침략군들이 몽둥이로/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뺨을 칠 것이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야훼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 형제,/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야훼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 주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미가 5:1-5)
이 말씀을 선포한 사람은 예언자 미가입니다. 아마 그는 기원전 721년, 북왕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것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에 오늘의 말씀을 선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정치적 격동기에 살았고, 남왕국인 유다왕국의 백성들이 한편으로는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정치지도자들과 부자들에 의해 고난받던 시기에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억압받던 소농민 출신의 예언자로서, 도시민들의 사치와 퇴폐적 생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행한 예언자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 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전혀 새로운 통치, 곧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정의와 평화가 현실화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통치를 실현시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아기는 유다 족속들 가운데 가장 작은 부족이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할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왕들의 지배를 폐지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통치를 실현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폭력을 휘두르는 정복자가 아니라,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모습으로 통치할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동료인간들을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떼들을 푸른 풀밭과 맑은 시내물가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맹수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합니다. 목자는 양떼를 섬김으로써 그들을 통치합니다. 바로 그 메시야가 평화의 왕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정치적 통치자가 메시야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 성탄절에 태어나는 아기는 바로 이러한 미가의 예언에서 기대되었던 그 메시야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십니다. 로마 제국에 의해 짓밟힌 식민지 유대땅에, 로마의 앞잡이인 헤롯대왕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삶을 죽음처럼 살아가야 했던 그 고난의 땅에 왕으로서 태어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탄생은 억눌려 살아가는 유대민중들에게는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지만, 헤롯을 비롯하여 특권을 누리고 있던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불길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증언하기를, 헤롯대왕은 새로운 유대왕의 탄생 소식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당황'하였다고 했습니다.(3절) 그들에게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성탄'의 소식은 그들이 누리던 온갖 특권들과 부귀영화를 박탈할 '좌경급진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불길한 정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대왕은 아기 예수를 암살할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특권을 함께 누리던 종교지도자들마저도 메시야 탄생을 환영하고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탄생장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암살계획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간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헤롯과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크리스머스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상 크리스머스를 단지 종교적인 축제로 즐기려는 사람들은 헤롯만큼도 성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탄생은 세상의 통치자들의 통치에 대한 종말이 가까웠음을 알려주는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2. 망명가는 메시야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전해준 정보에 따라서, 요셉은 한밤중에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게 됩니다. 성탄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히브리 노예들의 구원자인 모세가 태어나자마자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듯이 유대인들의 메시야인 예수님의 생명도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해방자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은 왕으로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았기에 정치적으로 더욱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능가하는 해방자로서 역사 무대에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상들이 탈출하였던 그 땅, 이집트로 망명을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집트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미 팔레스틴의 현실이 얼마나 비극이었는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통하여 팔레스틴 땅에서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인간의 역사 안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기 예수의 '성탄'은 세상의 모든 권세와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거부이며, 철저한 저항이며, 심판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꿈꾼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개입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체제를 뒤엎고 철저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탄은 하나님에 의해 야기된 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의미에서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절의 아기 예수는 과연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존재로서 인식되고 있습니까? 오늘날 성탄절의 주인공은 더 이상 위험한 예수가 아니라, 선물공세로 인기를 온몸에 받고 있는 싼타클로즈가 아니던가요? 싼타클로즈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사이비 메시야입니다. 싼타클로즈는 현실을 변혁할 힘이 없습니다. 싼타클로즈는 기존의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권력과 물질적 축복을 약속함으로써, 미국식의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을 긍정하게 만들고 맙니다. 싼타클로즈는 물질적 탐욕과 환상만을 부채질합니다. 교회에서 기다리는 아기 예수도 이런 세속적 축복만을 나누어줄 아기 싼타로 둔갑하여 버린 것은 아닌가요? 그런 예수는 결코 망명길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우여러분,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메시야는 망명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 외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누구나 환영하는 메시야, 아무에게도 위험하지 않은 메시야는 결코 억눌리고 착취받는 유대인들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결코 지배자들과 재벌들의 메시야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태어나자마자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머스에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바로 망명객이 된 '이' 아기 예수입니다.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자들의 권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는 주님은 헤롯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입니다.
아기 예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예수, 곧 임마누엘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세상의 주님인 그가 망명생활을 강요받았고, 세상의 권력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로 그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성탄 축하의 의미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그토록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 사람들은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동방이란 아마도 지금의 이란지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이란 점성술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말없는 별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려 노력한 지성인들입니다. 외국에서 온 그 지식인들만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의 탄생을 축하하지 못하였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려는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들의 인도에 따라 아기 예수를 찾아, 엎드려 경배하고, 그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칩니다. 몰약(沒藥)이란, 일종의 아라비아산 관목에서 추출한 액체인데, 유황과 비슷한 향기를 풍긴다고 합니다. 그들이 엎드려 경배하고 이 세 가지 예물을 바쳤다는 것은 아기 예수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왕으로서 간주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성탄축하는 새 시대를 열어갈 왕의 출현에 대한 축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도 외면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야훼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외국의 지성인들이 축하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외국인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유명한 지도자들은, 정치지도자든 종교지도자든, 모두 예수의 탄생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왜곡시키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바친 막대한 헌금들을 기독교계 방송사에 제공하고 마이크를 잡는 유명한 설교가들이야말로 대부분 예수의 탄생을 오해하거나 왜곡시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출세한 자들, 호의호식하는 자들, 권세를 누리는 자들은 성탄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방박사들의 성탄축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헤롯대왕도 성탄을 축하겠다는 구실로 동방박사들에게 아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별의 인도를 따라 긴 여행을 마친 동방박사들의 진정한 성탄축하와 헤롯의 정략적인 성탄축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헤롯의 축하는 진정한 축하가 아닙니다. 그는 축하를 구실로 아기의 목숨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의 축하는 아기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헤롯의 기쁨은 아기 예수의 제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가 누릴 성탄의 기쁨은 예수를 맞아드림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를 학살함으로써 가능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결국 그는 아기 예수의 생명을 빼앗기 위하여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학살극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독재자였던 헤롯 대왕의 통치방식을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는 유다 남부에 있는 이두메 지역 출신으로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황제에게 뇌물을 바쳐 왕권을 획득하였으므로, 그는 로마 황제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아부하였으나, 국내정치에서는 정적들에게 매우 잔인한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권안보가 위협을 받는다고 판단되면 사위, 삼촌, 장모, 아내는 물론 세 명의 친아들까지도 가차없이 학살하였던 자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죽기 직전에, 그의 죽음과 동시에 정적들을 대량학살할 계획을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을 애도할 사람들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대량학살 당한 자들의 유가족들의 한 맺힌 통곡소리를 유발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잔학한 독재자였으니, 성탄으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못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이 위험한 아기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던 헤롯의 뒤를 바로 우리 자신이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는 아기의 예수 없이 성탄'절'을 즐기려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 없는 크리스머스, 아니, 예수가 없어야만 즐거운 크리스머스를 즐기기 위해 은밀히 우리의 가슴 속에서 아기 예수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4. 2002년의 성탄절을 앞두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교우 여러분! 아기 예수는 성탄절 행사를 위한 마스코트로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사회정의가 짓밟히고 폭력이 난무하며,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감행하며, 예수의 이름을 파는 종교적 사기꾼들이 날뛰고 있는 이 현실을 보증해주고 정당화 해주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하나님에 의해 시도된 혁명적 사건입니다. 성탄은 새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 즉 개개인의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모든 삶의 영역에 미치는, 철저히 새로운, 하나님에 의한 변혁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정치권력과 사회체제, 그리고 종교체제의 철저한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 변혁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붉은 악마'의 활약에서 반공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놓은 붉은 색 공포증(레드 컴플랙스)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휴전선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미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반세기 넘게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촛불시위에서, 인권과 주권회복을 향한 위대한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난주에 발생한 선거혁명을 통해 정권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른바 주류들이 몰락하고 비주류가 승리하였습니다. 가난한 서민의 고통을 아는 사람, 짓밟힌 사람의 눈물에 연대하는 사람,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 분배정의를 약속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 변혁의 현장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하하여야 하는 크리스머스는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계에는 어떤 변화가 발생하여야 합니까?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가 변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 정작 아기 예수의 자리가 없다면, 교회는 버림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 예수입니다. 아기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지 않는 교회는 종교집단에 불과합니다. 아기 예수가 없는 성탄절에 도취된 교회는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고, 교회를 그렇게 인도한 목회자들은 옷을 벗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학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진정 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위험천만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아기 예수의 뜻에 맞추어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기 예수 없는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탄의 기쁨은 하나님의 혁명으로부터 약속되는 새로운 역사에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성탄의 축복은 새로운 삶으로의 방향전환으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방향전환 없이는 새로워질 수 없고, 새로워지지 않고는 성탄의 감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번 성탄절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위험한 성탄을 축하하는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들 자신이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더 나아가 우리의 사회가 새롭게 변화되는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