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형식은 대담으로 진행되며, 내용은 파트별로 신학/철학/종교학 편으로 구성된다. -편집자주
▲‘삶/고통, 죽음에 대해 묻다’ 특별대담에 참여하고 있는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좌)와 본지 김진한 편집국장(우). ⓒ베리타스 |
- 다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논하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일반적으로 ‘몸’은 죽고, ‘영혼’은 영생한다고 믿습니다. 종교학자 정진홍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어떻습니까?
“실존적 고백을 하라는 얘기인지 학문적인 얘기를 하라는 얘기인 줄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게 분리되지 않아요. 모든 학문에는 학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자기 실존적 모티브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 모티브를 발전시키지 않는 학문이 될 적에 그것은 호기심 위주의 학문, 탐정 소설 같은 논문을 쓰는 학자와 같이 될 수밖에 없어요. 사실을 밝혀낸다면서 온갖 전적을 다 뒤져가지고, 어떤 것은 잘못되었다든지 하는 것 말이에요. 실존적 모티브가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상응하는 그것이 정말 학문하는 자세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왜 생겼을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일까? 전 그렇게 생각하질 않거든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유한을 경험했을 적에 무한을 상상할 수밖에 없듯이 몸의 종말을 경험했을 적에 영혼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에요.
“영혼이라는 것…상상이 만들어 낸 실재”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
그러니까 (영혼이)실재하는 것으로, 내 밖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죽음이라는 것은 몸의 현상이거든요. 그런데 존재라는 것도 몸의 현상이에요.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소멸하는 것이고, 내가 소멸한다는 것은 몸의 부재를 선언하는 것이에요. 몸의 부재의 사건이 죽음이죠. 그래서 답답한 것이죠. 뭔가 벽에 부딪힌 것 같고 말이지요. 그래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내가 또 살 수는 없을까?’ ‘다른 형태로 지속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죠. 그때 상상이 만들어 놓은 것이 영혼이라는 실재 같아요. 그게 소울(soul)이라고 말하든 스피릿(spirit)이라고 말하든 넋이라고, 얼이라고 얘기하든 말이죠. 저는 이게 몸의 현실이 낳은 상상력의 실재라고 생각해요. 논리적으로 얘기를 한다면 사람이 죽으면서 반드시 영혼의 실재가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생각하면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어요. 몸의 부재가 낳을 허무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영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영혼이 가짜냐? 아니요. 그렇게 믿고 있으면 되는 것이에요. 그게 고백의 언어란 말이죠. 영혼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그러면 나에게는 있는 것이죠.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생한다고 믿느냐?’ 그렇게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할 것이고, 없다고 생각한다면 육의 현실에서 끝난다고 얘기할 것이고요. 그게 사실의 서술 개념은 아니에요. 전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해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제일 느꼈던 것은 신의 존재라는 것이 그런 것이에요. 있다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는 사람에게는 없어요.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자기 경험이 그런걸요. 있다고 그러면 있는 것이에요. 왜 자꾸 시비 걸어요. 또 없다고 하면 없어요. 그것도 왜 시비를 걸어요. 그렇게 다 조화롭게 살아요. 내 마누라만 예쁘다고 하고 살면 세상 어떻게 살겠어요? 다 남의 마누라 밉다고 하고 너 착각하고 있다고 하고요, 착각인줄 모르고 사는 너는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겠어요? 그렇게 안 살거든요. 그렇게 안 사는 게 현실이거든요. 왜 그 현실은 안 보고요. 신학은 왜 자꾸 엉뚱한 논리를 전개해요. 그게 현실이거든요. 왜 그렇게 부정직하냐 이 말이죠.”
- 종교학에서는 죽음을 숙명(Fate)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까? 아니면 낭만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까?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죽음이 저주가 아닌 자연스런 삶의 현상이라고 말했다. 죽음이 삶 밖에 있는 현상이 아닌 삶이 겪는 현상이라는 얘기였다. ⓒ베리타스 |
“종교학이라고 해서 특정한 입장을 교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아니고요. 어떤 종교는 어떻게 얘기하더라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이 종교학이 가지고 있는 입장인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현상이거든요. 몸이 죽는 것이거든요. 조금 더 나아가서 개념적으로 얘기하자면 모든 생명은 죽어요. 생명 아닌 것은 안 죽어요. 시인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돌멩이는 안 죽어요. 죽음은 생명 현상이에요. 생명이 지닌 현상이 죽음이니까요. 생명이 아니면 죽음이 없어요. 그것은 숙명도 아니고, 낭만도 아니에요. 생명 현상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땅한 것이에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라는 말은 굉장히 부정확한 서술이에요. 생명은 소멸되게 되어 있어요. 몸은 끝나게 되어 있어요. 몸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이랄 수 있죠. 몸의 현상이고, 생명의 현상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숙명이냐 낭만이냐 얘기를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게 얘기한다고 해도 그 현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저주 아니다…사람은 죽음을 배태하고 태어나”
“죽음은 생명 밖에 있는 현상 아닌 생명이 겪는 현상”
죽음이 생명 현상이라고 한다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속에 죽음을 배태하고 태어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늙어서 그 죽음이 확 꽃을 피우면 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얘기했을 적에 내 몸의 소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죽음이 숙명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내 몸의 소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말이죠. 현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생존의 원리라고 한다면, 생명의 마지막 현상인 내 몸의 부재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죽음관이 중요하다는 얘기죠. 죽음은 생명 밖에 있는 현상이 아니에요. 생명이 겪는 사건이에요. 우리가 다 겪을 게 죽음이니까요.”
- 죽음은 생명의 현상으로, 생명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럼요. 죽지 않으면 저주에요. 생명이기를 거절당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주제 사라마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죽음의 중지’라고 하는 소설을 보면 아주 재밌게 그려놨죠. 어느 나라에 갑자기 죽음이 안 와요. 고통은 지속되는데 죽질 않아요. 그래서 외국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밀수출해요. 그래서 외국으로 가면 죽어요. 죽음이 얼마나 축복이냐 하는 것을 얘기를 해요. 굉장히 역설적인 얘기죠. 죽음을 면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가 점점 구체화 되고 있잖아요. 장기도 바꿔놓고 그러면서 살잖아요. 그런 문화를 희화화 한 것이죠.”
- 성경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성경에서의 죽음관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같이 창조주는 인간의 몸을 한 번 죽는 것으로 프로세스를 만들었습니다. 왜 굳이 그렇게 했을까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창조주가 이런 프로세스를 정하셨다면 분명 죽음에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보이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제 입장이 자꾸 전도된 것 같은 이야기로 들릴텐데 신이 그런 프로세스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그런 프로세스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죠. 그걸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얘기를 했겠죠. 인간의 어떤 경험이 그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것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얘기를 한다면 신이 왜 이따위 짓을 했을까 그게 아니라 인간이 왜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러면 오히려 확 들어와요. 신이 그랬다고 하면 올마이티 갓이 모르는 게 없었는데 왜 이런 프로세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괴롭힐까 이럴게 아니라 말이죠. 그것 보다는 사람이 살면서 어떤 고민들을 했기에 어떤 것이 문제였기에 이런 형식으로 그것을 정리를 하려고 애를 썼을까? 그것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하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들도, 모두 종교인들이 그래요. 교리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읽어야 해요. 그러면 다 의미가 있어요. 공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말이죠.
“죽음도 삶이기에 삶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것”
“죽음을 향해 가지 말고 죽음 자리에서 삶을 조망해야”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면 그처럼 절망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라면서 오히려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조망하는 존재로 살아갈 때 희망을 갖고 온전성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리타스 |
앞서 말한 것처럼 결국 죽음도 삶인데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태어나는 것도 어른이 되는 것도 고통을 겪는 것도 내가 죽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들이 다 연계가 되어서 제게는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이에요. 예를 들면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은, 내 가족들은, 내가 한 일은 어떻게 되나’ 이런 것과 연결될 것이고요.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할 것이고요. 그러다보면 미완의 삶을 살았다는 자책도 있을 것이고요,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후회도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죽음은 더 이상 삶이 지속될 수 없는 단절이라고 얘기를 한다면, 어떻게 보상할까 꿈도 꾸게 되고요. 죽음 이후를 생각하면서 벌을 받을지 몰라 혹은 그때 비로소 완성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에요. 그게 사람일 것이에요. 그게 그렇게 나타난 것이지, 신이 프로세스를 만들어 놓고 몰고 가는 게 아니죠. 그렇게 이해한다면, ‘죽고 난 다음에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래요, 그럴 거에요.’ 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죠.
물음 주체, 삶 주체, 죽음 주체의 삶이 빚어내는 것이지, 신이 그렇게 했다고 가르쳐서 그 도식 안에서 살아간다면 이미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지금 죽음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의도하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되지 말고,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거든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는 절망이죠. 그런데 죽을 것은 명약관화하니까, 생명 현상이니까요. 오히려 죽음의 자리에서 내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삶을 조망하면서 살아가면 삶을 완성해 가며 살 수 있을 것 아닌가. 그게 죽음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거든요. 그런 자리에서 본다면 왜 이런 프로세스를 신이 만들었을까 묻는 것 보다는 인간은 이런 프로세스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더 필요하죠. 삶을 진지하게 고뇌하고, 죽음을 진지하게 고뇌하는 한 말이죠. 그래서 모든 종교에는 내세가 있고, 모든 종교에는 보상에 대한 얘기가 있고, 그런 게 아닐까. 인간의 보편적 경험 속에서 말이죠. 그렇게 얘기하면 되죠. 천당이 몇 층으로 되어 있고, 불이 어떻게 타는 줄을 모르겠지만 그 프로세스라는 것은 (신이)만들어 우리에게 과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고백한 실재다, 현실이라고 고백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어서 죽음의 성격에 관해 잠시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죽음도 생명의 현상이라면, 삶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일진대 각 사람의 삶의 방식에 따라 죽음이 슬플 수도 기쁠 수도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일까요?
“본래적으로 어떤 것이라는 규정은 없어요. 그런데 죽음 자체도 삶이기 때문에 죽음 사건 자체를 존엄하게 하자는 얘기를 할 수는 있어요. 함부로 하지 말자 이거죠. 예를 들면 주검, 시체라는 것을 함부로 다루지 말자. 생명을 존중하듯이 주검도 존중하자. 내 몸을 아끼듯이 주검도 아끼자. 썩어 없어질지라도 말이죠. 귀하게 다루자는 얘기 말이죠. 예를 들면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는 매장을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화장하잖아요. 근데 그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렇게 바뀌었나를 보면 시체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주검을 편리하게 처리해야 할 쓰레기로 여기거든요. 산소를 보존하는 데 드는 어려움이 많다는 등의 편의주의가 죽음 자체를 귀하게 여기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젊은 아이들이 아기를 낳고, 아무런 책임 없이 고아원에 버리는 것 하고 똑같아요. 그랬을 적에 생명의 존귀,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고 하는 것이 점점 소멸되거든요. 화장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한꺼번에 그렇게 바뀌는 우리 문화 자체가 죽음을 얼마나 소홀하게 다루고 있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생명 현상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결국 그것이 유치한 문화죠. 그런 것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 슬픈 것이냐 좋은 것이냐 삶에 따라 다르죠.
우리사회의 장례 문화·죽음 문화의 현실은
“죽음을 소홀히 하는 문화는 생명도 소홀히 하는 문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죽음을 값싸게 여길 적에 생명도 값싸져요. 죽음을 곡하지 못할 적에 삶도 정주고 살 수가 없어요. 정을 주고 살았다면 곡을 해요. 가슴을 치고 울어요. 그러나 가슴을 치고 울만큼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곡하지 않아요. 죽음과 삶이 결국 하나에요. 죽음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죠. 죽음 문화가 어떤지를 보면 그 공동체의 삶에 대한 태도가 측정될 수 있어요. 산소를 자주 찾아가지 않는다거나 그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낳느냐가 문제거든요. 그런 죽음 문화 전체에 대한 새로운 감성이 필요해요. 정부에서 왜 화장을 장려했느냐? 국토의 묘지화는 비생산적이다 이거죠. 경제 원리가 인간의 존엄과는 아무 상관없이 화장을 권장한 것이에요. 제가 가끔 농담하는 게 골프장만 다 없애도 몇십 년 묘지는 얼마든지 확보하겠다는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죽음도 생명 현상이라고 하는 인식이 없는 문화가 얼마나 천박하게 흘러가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과 연결시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의 죽음 문화가 결국 생명 문화를 결정짓는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베리타스 |
- 죽음이 결국 삶이라면, 죽음 값이 삶 값인데 우리가 그동안 죽음 값을 소홀히 하지 않았나 돌아봅니다.
“삶을 존귀하게 여기면 죽음도 존귀하게 여겨요. 죽음을 존귀하게 여귀는 문화는 삶도 존귀하게 여기는 문화에요.”
- 사실 우리의 삶이란 게 죽음으로 둘러싸인 삶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 달리 말해 이승과 저승 사이의 간격은 왠지 모를 공포심 때문인지 생각 보다 상당히 벌어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근원적으로 인간을 갈등하게 하는 것이 사물을 이원론적인 구조로 보게 하는 것이거든요. 듀얼리즘(Dualism)이 문제죠. 동양적인 사고는 이원론적이 아니라고 하고, 서양적인 사고는 이원론적인 것이라고 하는 도식적인 얘기를 하는데 그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서양적인 사상이 꼭 이원론적인 것은 아니고, 동양적인 사고라고 해서 이원론적인 것을 극복했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하여간 인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불교적인 해석일지 몰라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 삶과 죽음, 하늘과 땅, 빛과 그늘 등 자꾸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게 갈등의 원인이거든요.
종교의 이원론적 가르침, 죽음과 삶 괴리 불러와
죽음과 삶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죠. 그렇게 되면 상반하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게돼요. 그러나 상반이라고 하는 대치라고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보면 늘 부딪히는 것이거든요. 죽으면 더 이상 못 만나고,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말이죠. 그런 것을 늘 갈등으로 이해하면 힘들어지죠. 그러나 그 갈등이 사실이 하나라고 가르치면서 이런 측면도 있고 저런 측면도 있다고 가르치면 되거든요. 그러나 사실 모든 종교는 그것을 하나라고 가르치거든요. 신에게 귀속된다고 얘기해도 좋고, 본래 그것이 우주적 질서라고 해도 좋고, 깨달으면 분간을 벗어난다는 얘기, 그러니까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불교적인 가르침을 보더라도 죽음에 대한 이원론적인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죽음도 삶이라는 입장에서 지양되면 좋겠고, 그것이 이원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을 적에 오히려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따뜻한 안식이 있다.’, ‘이제 평화롭다.’ 이런 얘기를 자꾸 하면 죽음을 극복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덧붙인다면, 이원론을 얘기하지만 거기에 깔려 있는 전제는 사실 일원론이 아닐까요? 예들면 흑보다 백이 낫다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에 흑을 겪을 때 자꾸 고통스러워하고 갈등을 겪듯이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악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 굉장히 많은 얘기들이 있잖아요.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정론의 문제가 그래서 생기잖아요. 그런데 악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비롯되어서 인간을 괴롭히느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삶의 현실에서 어쩔수 없이 부딪히는 한계 같은 것, 그것이 내 정상적인 삶을 일탈하게 하고, 위협한다면 그 현상 자체가 악이지, 악의 실체가 따로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내가 삶을 온전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을 하면할수록 내가 예상했던 악의 현존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되질 않나. 그러나 끊임없는 과오의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과오의 가능성은 내가 수용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겸손해질 수 있고, 독선적이지 않게 되고 그러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 나가면 악의 존재라는 것이 처음부터 있어서 처음부터 갈등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말고, 삶의 현실이 온전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 까딹을 생각하기 보다는 더 좀 온전하게 되면 (악의 현존이)더 줄어들 것이고, 그런 식으로 노력을 하고 말이지요. 또 어떤 측면이 나를 얼마나 겸손하게 하고, 성찰하게 하고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너무 현학적인 악의 존재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그런 입장에서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요.
조금은 현실적인 경험에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주장을 얘기하다 보니까 개념화 시키고 개념을 만들다 보니까 개념이 다시 자기를 전개하려면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개념이 개념을 낳아요. 그래서 개념의 논리가 형성이 되고, 개념의 세계가 형성이 돼요. 그런데 나중에 이렇게 보니까 현실하고 떨어져 있어요. 그게 학문이 갖는 병폐거든요. 끊임없이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다가 개념의 세계로 되돌아 가야하는데 말이지요. 사실 개념의 얘기로 하지 않으면 보편적 소통이 불가능해요. 예를 들면 고통이라는 것도 일일이 사례를 들 수는 없잖아요. 인간은 고통스러운 존재라고 할 적에 개념어로 전달을 하듯이 말이지요. 따라서 소통을 위해서 개념어가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인데 그러나 개념어가 만들어 놓은 개념의 세계에 갇히면 현실에서 이탈될 수밖에 없죠. 그런 게 문제죠.”
- 종교적 인간의 습성일지 모르겠으나 영악한 우리네 인간들은 십자가(고통 혹은 죽음)는 꺼려하고, 부활의 영광(내세)만을 좇는 경향이 강합니다. 종교적 인간으로서 ‘안정성 추구의 욕망’에 빠져 있다는 말인데 본회퍼나 불트만은 그러한 욕망의 포기로서의 ‘신앙’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딪힐 ‘고난’이 ‘죽음’이 그 ‘신앙’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즉 자아성찰을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어떻게 봅니까?
“저는 아주 심플하게 대답을 드리고 싶어요. 당연하죠. 고통은 불가피한 가장 어려운 삶의 현실이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살피게 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좌절을 겪었을 적에 좌절 자체의 원망에 빠지기만 한다면 성숙한 인간이 아니죠.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처지에 빠졌나, 내가 상황 판단을 잘못한 것 아닌가, 내가 나를 되돌아보지 않았지 않았나. 자성의 계기가 되는 것이죠. 고통이 자성의 계기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적에는 덜 큰 사람이죠. 덜 성숙한 사람 말이죠. 자꾸 성숙이라는 말을 쓰는데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이 되질 않아요. 송아지는 어미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소에요. 그러나 인간은 어미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인간 아니에요. 인간 구실을 하려면 얼마나 성장 과정이 필요한 줄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성숙해야 하고, 어른이 되어야 해요. 전 인간은 독특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 성숙한 인간”
“사람은 독특한 존재…날 때부터 송아지가 아니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이 없는 인간은 덜 성숙한 인간이라며 사람은 날 때부터 송아지가 아니라고 했다.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의 독특성을 확인한 그는 인간의 성숙함의 지표가 자아성찰 능력에 달려있음을 확인했다. ⓒ베리타스 |
그런데 그 성숙의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에요. 호모 사피엔스라고 할 적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생각은 다 하는걸요? 그러면 ‘너 생각하는 존재가 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의식이 없는 인간은 없잖아요.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은 고전적 입장에서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Reflective Thinking, 자성이거든요. 내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말이죠. 그런 것을 할 줄 알도록 커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유치한 인간이에요. 사람 덜 된 놈이에요. 분명히 사람은 송아지가 아니에요. 소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 아니에요. 사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해요. 고린도전서 13장이 나오는 사랑의 얘기에서 늘 감동받는 것은 그런 것이에요. 사랑은 누가할 수 있는 것이냐? 어렸을 때 일을 버린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어렸을 때 일을 다 버렸노라.’ 사랑의 전제 조건이에요. 사랑은 성숙한 인간이 하는 것이지, 유치한 인간이 하는 게 아니에요. 자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사랑이에요. 그래야 사랑하는 책임 주체가 될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애를 낳아도 아비 어미 노릇을 하며 살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요.
아주 좋은 예를 들으셨는데 이런 생각이 본회퍼나 불트만을 통해서 비로소 이뤄진다면 문제에요.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는 일인데 본회퍼는 어떤 맥락에서 이것을 클로즈업 시켰고, 그런 것이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어야 돼요. 자기 일상과의 정직한 만남을 의도한다면 고난의 의미 있음, 그것을 생활화 할 수 있어야죠. 그런 자성을 해 나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연스럽게 말이죠. 그래서 자연스럽다는 말을 자꾸 하고 싶어요.”
- 일상을 대하는 종교인들의 태도가 그만큼 반자연적이기 때문에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계속해서 자연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닐까요?
“억지로 만들려고 해요. 사제의 권위가, 신학자의 현학이 억지로 만들어 내서 이런 규범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얘기해요. 아니에요.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는 것이에요. 특정한 사람만이 예수 믿고, 특정한 사람만이 구원 받고, 특정한 사람만이 사유 의식을 갖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어디 그런가요? 누구나 그럴 수 있기에 그런 사람이 생긴 것이잖아요. 누구나 시적 감성이 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시적 감동이 있는 것이에요. 시인만이 시를 향유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시인 아닌 사람도 시를 읽으면서 감동하잖아요. 시적 상상력이 다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시인이 ‘나밖에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나 밖에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오만의 극치죠.”
- 기독교 신앙인들은 죽음 뒤에 부활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활’이란 죽음이 단지 ‘끝이 아니다’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종교학자 정진홍이 믿는 ‘부활’ 혹은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신학적인 서술이 아닐 수 있는데 소박하게 이렇게 생각해요. 예를 들면 내 선친께서 6.25 때 시신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날짜도 몰라요. 내가 죽으면 아버지를 뵐 수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아버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 만나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보고 해야 될 것 같아요. 그게 꿈이고, 제 현실이기도 해요.
정진홍이 믿는 부활이란…부친과의 만남 꿈꾸는 것
그것을 꼭 부활이라고 하는 개념하고 연결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영생, 내세라는 개념에 역시 연결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런 꿈을 갖고 살아요. 그리고 그게 현실이에요.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게 수용소였어요. 인민군에게 갑자기 끌려간 터라 여름에 내의 하나만 걸치고 있었어요. 제가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너 교복 벗어서 드려라’고 해서 벗어 드렸는데 중학교 1학년짜리 옷이 안 맞죠. 그래서 (아버지가)벗어서 도로 주시면서 ‘공부 잘 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 게 남아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께 얘기하고 싶어요. 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교수도 했거든요. 우스운 얘기지만, 학술원 회원도 되었거든요. 별난 것도 아니라 다른 데서는 전혀 그런 얘기를 못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내세라는 없어, 있어. 이런 말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건 내 꿈이고 내 현실이니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 없어요. 난 그것을 지니고 살 것이에요. 그것을 지니고 살면 행복하니까요. 그것 밖에 없어요. 죽음 이후를 얘기하라면요. 그것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에요. 아버지께 보고할 게 있어요. 그것 이상 행복한 게 어디 있겠어요.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도 어렵고 괴로울 때 혼잣말처럼 그렇게 하죠. ‘아버지 좀 봐주세요.’ 그리고 어려움을 벗어날 때는 ‘아버지 저 견뎠습니다’ 하고요. 내 경험이 그래요. 모든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요. 생각하면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간 인간이 없거든요. 그것을 종교적인 언어로 바꿔 가지고 어떤 교리 체계에 집어넣고 싶지 않아요. 그것에 의해서 훼손 받고 싶지 않고요. 나 혼자 자유롭게 행복하면 돼요. 그것을 부활에 대한 얘기라고 한다면 굳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부활'이란 뭘까? 정 교수는 죽음 후에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라는 실존적 고백을 했다. ⓒ베리타스 |
- 부친을 뵈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마음에 들지 몰라도 저 열심히 아버지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보고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아버지 마음이니까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말이지요.”
- 살아오면서 많이 그리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정상적인 일이 아니잖아요. 대단히 비정상적인 일 아니에요. 그런 사건이란 게 말이죠. 늘 아버지라는 한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죠. 그 인간의 꿈이 뭐였을까? 자식을 낳고 뭘 기대했을까? 마지막 죽음의 길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갔을까? 저리죠. 그렇게 비참하게 갔을 적에 당신의 시신도 남기지 않고 돌아갈 생각을 했을까? 전쟁의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한 두 사람이 겪었나요. 내 친구 중 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 있어요. 선친의 시신을 찾았는데 머리는 못 찾았어요. 머리 없는 (부친의)산소를 만들어 놓고 거길 찾아가요. 우리 세대는 그런 세대니까요.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게 하죠.”
- 고통 받는 현실에서 ‘부활’이란 현재적 의미에서 가능성이고 희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각 사람의 삶이 다르고, 죽음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부활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대단히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부활을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교리가 설명하는 부활이 아니라 말이죠. 그런 것이 그 교리에 수렴되었으면 좋겠어요. 교리에 의해서 그런 것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지극히 실존적인 자리에서의 꿈과 희망이 승인되고 인정되고 지녀진 채 교리적인 선언들로 아름답게 수렴이 되고, 또 종교도 그런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너 꼭 하나님께서 네 운명을 결정하신다고 얘기를 한다고 얘기해’라고 강요하지 말고요. 종교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조금만 잘못 얘기하면 ‘너 이단이야’라고 하고 말이지요.
“교리가 설명한 부활 아닌 개개인의 실존적 부활 지녀야”
신학이 좀 더 포용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이야기 되었으면 저 신학 했을 것이에요. 그런데 대학 다닐 적에 내 물음은 물음으로 다뤄지지 않았어요. 준비된 물음이 있고, 항시 그 준비된 물음을 묻게 했어요. 그리고는 그 준비된 물음에 준비된 답이 있다며 그 답을 수용하라고만 했죠. 그리고 나중에 따져보니 전부 속았다는 느낌이랄까요. 내 물음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게 신학 공부이고, 교리사이고, 조직신학이고 다 그렇더군요. 그 언어로 그 물음을 물으면 그 언어로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정리되어 있더라고요. 나하고는 상관이 없더라고요. 내가 머리가 모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것을 다 해석해서 내게 적용할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도 사실은 어떤 경험들이 추상화 되어 만들어진 것이더라고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변해왔죠.”
- 끝으로 고통과 죽음이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삶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종교학자 정진홍에게 삶이란 무엇입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이 물이 졸졸 거리고 흐르듯 자연스럽지 않거든요.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내가 이 젊은이들을 저주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 클래스에서 늘 그런 얘기를 해요. 삶은 졸졸 거리고 흐르는 물 같이 흘러가지 않는다. 굽이도 있고, 소용돌이도 있고 격랑도 있고, 오히려 그 틈새에 가끔 반짝 드러나는 것이 행복이고, 의미이고, 가치인줄 모른다는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도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침이 주어진다. 그리고 저녁에게는 모든 것을 마치고 잔다. 자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아침이 주어진다. 그 아침을 어떻게 살까? 무한한 가능성이, 누구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가능성이 나에게 확 펼쳐지는 것으로 만나자. 아침이라고 하는 것을 말을요. 약속도 있고, 어제와도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어찌됐든 미지의 신비의 가능성의 영역이 나에게 주어진 게 아닌가. 어떻게 이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매일 그렇게 살자. 전 그렇게 살려고 그래요. 세상에 새날이 온다는 것처럼 감격스러운 것은 없어요. 그 가능성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나에요. 무한히 많은 제약에 있어요. 그러나 어찌됐든 나에요. 그 제약 속에 있는 나이지만 가능성은 주어졌어요.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고서 저녁이 되면 그렇게 가능성으로만 남지 않잖아요. 좌절하고요, 고통스럽고요, 죽어버렸으면 좋겠고요. 어쩔수 없죠. 그런데도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면 저녁에는 반드시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다보면 죽음도, 고통도 감사하면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봐요. 감사라는 게 다른 게 아니거든요. 조건 지어진 어떤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것 아니에요. 무조건적인 삶에 대한 긍정이 감사거든요. ‘이렇게 먹고 살게 되어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은 감사가 아니죠. 그렇지 못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간접적인 저주거든요. 내 감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이죠. 감사라는 것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거든요.
저는 저녁에 이렇게 잠자리에 들면 내가 나를 다독거려요. ‘너 오늘 수고했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굉장히 행복하게 잠이 잘 와요. 그러면 불면증 갖고 있는 친구들에게 그래요. 저녁에 잘 적에 ‘정말로 네가 네 어깨를 다독거려라. 너 오늘 수고했다. 잘 자라’고 하면서 자라고 해요. 온통 걱정, 근심, 불평 때문에 그렇지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것으로, 죽을 때는 죽음에 대한 것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살아요.
성경 말씀에도 너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잖아요. 이웃 사랑하듯이 너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자기는 피지컬 바디(physical body)에요. 몸뚱이를 가진 존재에요.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몸뚱이 없으면 내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신도 없어요. 모르겠어요. 꼭 지옥 갈 얘기만 한 것 같아요.”
- 아름답고, 감사한 삶을 스스로 끊어내는 결단을 하는 게 고통을 대하는 극단적인 방법인 것 같은데 자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자살의 근본적인 원인은요. 외로움 때문이거든요. 홀로라고 하는 자각이 없으면 자살하지 않아요.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있으면 자살하지 않아요. 외로움 때문이거든요. 자살은 근본적으로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본인에게 문제가 있죠. 그런데 치유를 해줘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저는 종교 보다는 카운슬링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종교는 해답의 틀이 있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데 카운슬링에서는 ‘너 자신이 되라’고 얘기를 해요. 또 자살은 우리 사회 전체가 병들었다는 얘기거든요. 연대를 상실한 것이죠. 그리고 본인에게는 치유를 해줘야 해요.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존엄사에 있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다른 얘기이고,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함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끝)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는
1937년 11월 23일생으로 서울대 종교학과와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교수, 명지대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종교학연구회 회장, 한국종교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문화관광부 21세기 문화정책위원장,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 굿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으로,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울산대 석좌교수로 활동 중에 있다. 황조근정훈장(제17회 수당상 인문사회부문, 2008)을 수여했으며, 저서로는 『우주와 역사』 『종교학 서설』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종교문화의 이해』 『종교문화의 인식과 해석』 『하늘과 눈수와 상상』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 『경험과 기억』 『열림과 닫힘』 등이 있다.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