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세계가 만약 하나의 집안이라면’ 세계가 하나의 집안이라면 난 하늘 같은 솥을 하나 걸겠어. 한쪽 발은 히말라야 봉우리에 걸치고 다른 한쪽 발은 안데스 산줄기에 걸치고 그 커다란 솥단지에 산봉우리처럼 가득 하얀 쌀을 들이붓고 온 세상의 아이들더러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오라고 해서 따뜻한 불을 지펴 밥을 지으며 옛날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애들아 만약 우리들의 아버지가 하나라면 이 밥을 지어서 누구는 주고 누구는 굶주리게 하겠니 누구는 따뜻한 방에 재우고 누구는 길바닥이나 들판에서 추위에 떨게 하겠니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하얀 쌀밥으로 배를 채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어느덧 쌔근쌔근 잠이 들 테지 하나의 집, 하나의 아버지를 꿈꾸며 내일도 어김없이 주어질 따뜻한 쌀밥을 꿈꾸며 안심하고 깊은 잠에 떨어질 테지 가끔 망상을 한다. 세상이 만약 하나의 집안이라면 좋겠다고. 그렇게 된다면 지구상 어느 한 쪽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 성인병을 걱정하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과 원시적 질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어디 그뿐이겠는가. 소고기를 먹는 잘사는 사람들을 위해 지구 위의 수많은 열대우림이 사료용 콩을 기르기 위해 베어지고 불에 타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자동차를 타고 산과 바다로 놀러다니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구 위 어디선가는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그 전쟁 통에 남자들은 총을 들고 싸우다 죽어가고 있고,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또 다른 굶주림과 범죄에 시달리고 있다. 최첨단 컴퓨터와 휴대전화와 자동차로 빠르게 움직이며 한 시간에 몇만 달러를 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대바구니를 엮어도 제 식구 하루 끼니를 연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세상의 물산과 에너지는 불과 소수의 나라, 소수의 풍요를 위해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소모되고 있다. 이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이제 생명체 존재의 근원인 생태계의 순환체계마저 파괴될 위기 앞에 직면해 있다. 만약 세계가 하나의 집안이라면 이런 일들이 용납될 수 있을까? 소수의 풍요한 삶을 위해 지구자원을 한없이 소모하면서도 경제성장이며 발전이라고 아무런 염려도 없이 달려가는 오늘의 문명을 그대로 용인할 것인가. 자원고갈과 생태계의 위기는 물론, 아직도 절반 이상의 인류의 배고픔과 질병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21세기 인류의 문명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런 일을 눈 뜨고 바라보는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다. 1. 무한성장의 욕구만이 지배하는 21세기 한국사회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6.25라는 남북 전쟁의 끝 자락에 태어난 나는,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제 가족들과 하루 세끼만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삶인가를 되뇌는 부모들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마 오늘 한국사회를 이끄는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겐 전쟁과 가난이라는 공포가 유전인자 깊숙이 뿌리 박혀 있을 것이다. 그것이 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적 경제개발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하였고, 그 과정 속에서 경제성장과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집단적 목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런 집단적 욕망이 지난 30여 년 이상의 한국사회 성장의 밑바탕을 지지 하여왔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어떤 방식이든 가난을 퇴치하고 더는 전쟁으로 위협당하지 않는 그런 나라를 꿈꾸었다. 따라서 그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동원형 사회체제와 억압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며 조국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인권이나 다양성 등의 가치는 희생되거나 유보될 수도 있다는 사회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한 사회적 흐름이 오늘도 여전히 한국사회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다행스럽게도 소수였으나마 지식인, 양심적 종교인들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오랜 투쟁 끝에 결실을 거두어 마침내 87년 6월 시민항쟁을 통해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이 물러나게 되었다. 그 이후 2008년 오늘까지 20여 년 동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한국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바람직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과거 권위주의적인 사고와 체제가 많이 사라지고 민주주의, 문화적 다양성, 인권, 평화 등의 가치가 알게 모르게 많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87년 민주화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 고통의 경험은 없지만, 삶의 문화로써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체화하며 살아온 세대이다. 따라서 오늘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은 잘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런 사회문화적 권리들을 쉽게 빼앗기는 것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화가 되었음에도 경제지상주의, 경제성장 만능주의가 여전히 우리 사회 큰 흐름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과거 세대만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화 이후 태어난 세대들을 더욱 교묘하게 지배하고 있다. 80년대부터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며 이전 세대와는 달리 풍요 속에 살아온 젊은 세대들은 돈 많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살아왔다. 따라서 그들은 함께 살아간다는 가치, 공공성의 가치보다 경쟁의 가치, 효율성의 가치가 더 유효한 것으로 체감하며 살아왔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을 살았던 세대들은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아무리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일정하게 무분별한 소비를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언제 다시 어려움이 올지도 모르며, 설령 어떤 어려움이 와도 감내하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20-30대들은 1980년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혜택 속에 자라오면서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왔다. 세끼 밥과 잠잘 집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고, 거리에 나가서 외식하고 새로운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이 나오면 당연히 바꾸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철 따라서 새 옷을 사 입는 것을 당연하게 알았다. 그들에겐 오로지 경제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멈춘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이렇듯 가난을 경험한 세대의 무조건적 경제성장 욕구와 젊은 세대들의 풍요로운 소비를 누리기 위한 성장의 요구가 맞물려 한국사회는 그동안 거대한 용광로처럼 물질만능주의로 들끓었다. 끝도 없는 부동산투기, 펀드와 주식투자 등등,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대열에 온 국민이 광풍처럼 빨려들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대출을 받아서 땅을 사고 아파트를 샀다.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은 해외까지 발을 넓히며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투자하기 위해서 몰려나갔다. 경제성장과 부의 축적이라는 광풍 속에서 어떤 공공의 질서도 함께 살아가는 배려의 문화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효율성과 경쟁이라는 가치가 사회 최대의 지배적 가치가 되었다. 그런 가치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 여겨왔던 학문과 교육, 문화와 예술에서도 오로지 투자가치, 이윤추구의 가치가 없는 분야는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는 그런 집단적 욕망이 빚어낸 총체적 결과였다. 정의로운 사회보다는 경제적 성장만 가져다준다면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다는 합의가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돈을 위해서는 산 사람의 가슴도 잘라낼 수 있다는 ‘베니스 상인’에서의 이야기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돈을 위해서는 공직자가 되었건, 정치인이 되었건, 기업의 임원들이건 모두 법도 사회적 규범도 뛰어넘어 부정과 범법을 관행처럼 저질렀다. 어쩌다 법정에 서면 경제사범이라 해서 형을 적게 받기도 하고, 각종 특사를 통해서 가볍게 사면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한편에서 몇 푼의 돈에 범죄를 저지른 일반 시민들은 꼬박꼬박 중벌을 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돈과 돈을 앞세운 권력 앞에 법도 정의도 양심도 사라지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종교마저도 가세하여 돈 많이 버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벌었던 돈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였다. 무한한 경제성장과 부정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부의 축적을 축복하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부정과 부패, 구조적 빈곤, 무분별한 자원소모,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서는 눈감아버렸다. 오로지 물질적 풍요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지난 30년이었다. 돈을 잘 버는 일만이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무의미하거나 무능한 것으로 치부되어버렸다. "부자 되세요."가 인사말로 자연스럽게 가능할 수 있는 사회, 서점에서 재테크 관련 서적들이 가장 인기리에 팔리는 사회, 1억 모으기, 10억 모으기라는 화두가 젊은 대학생들에게 꿈이 되어버린 사회, 그러면서 주위에 어려운 이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과 배려도 외면하는 사회를 우리는 만들어내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도, 사회정의도, 복지도, 생명의 소중함도,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도 경제성장이라는 욕망 하나에 무참히 굴복하는 것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불어 닥친 세계 금융위기는 성장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온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줄게 틀림없다. 빨리 달리는 자전거만 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자전거를 천천히 타거나,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한다면 모두 쓰러지거나, 달리더라도 고통스러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는 통계가 나왔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통계를 보고도 놀라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금융위기가 한국경제 전반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또 얼마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인가. 젊은 엄마가 자식들을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어 함께 자살하는 사건을 바라보면서, 가난했지만, 훨씬 더 많은 자식을 키워냈던 한 세대 전의 어머니들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시절의 부모들은 굶주리면서도 자살하지 않고 자식들을 다 키워냈는데, 왜 경제가 더 발전하고 먹을 것이 더 많아진 오늘의 부모들은 자식들과 함께 자살하는 것일까? 이는 한국사회 전반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일 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가고 한국경제의 총생산량, 무역량이 세계 11위 정도의 규모이며, 아프리카 50여 개 나라의 총생산량과 맞먹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한국사회에 살아가면서 무엇이 사람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이 먼저 자살하는 것일까? 과학적인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동안 성장체제가 가져온 양극화의 가장 밑바닥에 내몰린 사람들, 한 가정을 이끌고 살아갈 만한 자생력을 잃어버린 사람들, 날로 극심해지는 경쟁체제에서 버텨낼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더 빠르게, 더 앞으로, 더 많이'라는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거기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 탈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주지도 않고 달려왔다. 한번 탈락하면 다시는 일어서서 복귀할 수 없는 가혹한 사회체제를 만들어 온 것이다. 만약 그들이 당장 어려워도 미래에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더라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한 세대 이전의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사람들은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경제에 의존하여 성장을 구가하였다. 그것도 국내 농업이나 중소기업과 선순환 체계를 이루며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한 원자재와 기계, 값싼 외국산 농산물과 저임금에 의존하여 발전해 온 경제모델이었다. 국내농업은 아예 말살하는 정책을 펴왔고 중소기업은 상생구조를 이루며 역할분담을 해온 것이 아니라 생산원가 절감을 위해 부담을 떠넘기는 하청구조로 전락시켰고, 경쟁력 있는 상품시장이면 중소기업들의 생산분야까지도 뛰어들어 장악해버리면서 중소기업의 자생적 발전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최근에는 유통시장까지 대기업이 장악하면서 유통단계에서 자생하던 중소기업과 종사자들을 모두 유통시장에서 쫓아내 버렸다. 이러한 관 주도형 수출 대기업 중심 성장전략은 경제개발 초기에는 유효하여 한국경제가 세계경제 속에서 일정한 시장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시켰고 그 힘으로 한국경제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97년도 금융위기 이후 개방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펼쳐지면서 과거의 한국경제 모델이 갖는 취약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외개방이 진행되면서 값싼 외국산 농산물, 값싼 해외 노동시장에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기업이 해외로 옮겨갔고 그나마 어렵던 농업은 더욱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실업은 증가하기 시작했다. 노동유연화 정책이 시작되면서 그나마 일자리도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고, 소수의 대기업 노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들, 대학을 나오자마자 거의 실업자 수준으로 변변치 못한 일자리를 얻거나 부지하세월 취업을 준비하는 수많은 젊은 대학졸업자들, 여성들, 장애인들. 이들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한계상황에 몰린 사회계층이 되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을 시작하던 초기 60년대 말부터 나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지금부터 나눠달라고 하면 언제 성장을 하며 치열한 수출경쟁에서 살아남겠느냐?."고. 정부도 그랬고 기업가들도 그랬다. 저임금으로, 저농산물 가격으로 시달리는 노동자, 농민들, 서민들이 "제발 우리에게도 성장의 결과물을 좀 돌려서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그들은 "아직은 파이를 나눌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경쟁에 살아남으려면 우선 파이를 키우고 나서 훗날 그 파이를 나눠야 한다는 논리로 설득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많은 재벌 기업들이 생겨났고, 재산을 축적한 소수 부자가 형성되었다. 강남이라 표현되는 급속하게 부를 축적하여 신흥부자가 된 계층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국근대화,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이 겨우 아파트 한 채 장만할까 말까 하며 살아오는 동안, 우리 사회 소수는 어물쩍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한국사회 새로운 상류층,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이제 투기로 벌었던, 공직을 이용하여 특혜로 벌었던 한국사회 신주류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부와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대물림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우선 언론을 장악하여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부자들에 대한 나쁜 감정을 부드럽게 약화시키려고 일하고 있으며, 그들의 부를 침해하는 어떤 정책이나 제도도 반대하고 있다. 후세대들을 외국 유학시키거나 아예 국내에 돈을 가진 사람들만이 견딜 수 있는 귀족 엘리트 코스 교육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제는 세계경쟁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교육을 버려둔 채 소수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교육체계를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공교육이 목표했던 보통 교양교육, 전인교육, 합리적인 시민교육은 거추장스러운 것, 돈이 되지 않는 것으로 퇴출당하기 시작하고 있다. 단순한 부의 대물림뿐이 아니라 정치, 사회 지배권까지 대물림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한편에서는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사회 속에서 경제성장기 10여 년 사이에 중산층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던 많은 사람이 속속 다시 하층민, 도시서민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들이 가졌던 직장이 위험해지거나 쫓겨나게 되고, 그동안 부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소유해왔던 아파트 한 채마져 가격이 내려가거나 아니면 대출금을 갚지 못해 다시 전세아파트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 교육제도까지 돈 없이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는 극심한 경쟁교육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편으론 97년 금융위기 이후 마련되기 시작한 최저극빈층을 위한 약간의 복지정책마저 다시 축소되고 있다. 작은 정부, 감세, 규제철폐가 최고의 정책이라고 여기는 시장만능주의, 효율성 만능주의가 지배적인 시대가 되어 스스로 힘으로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험한 시대를 맞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경쟁자가 되고 적이 되는 세상, 내가 내 가족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야만적인 사회가 가장 효율적인 사회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그나마 주어졌던 공공 보험, 공교육마저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기려고 하고 있다. 오늘 이제 한국사회에서 중소기업, 비정규직, 일자리 없는 여성가장, 장애인, 지방대학출신 등은 철저히 양극화된 사회체제 안에서 밑바닥을 지켜주는 내부 식민지가 되고 있다. 이등국민이 되고 있다. 불과 30여 년 사이에 합법, 비합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온 상류층, 지배층은 이제 그들의 지배체제를 완전한 사회시스템으로 정착시키고자 하고 있다. 소수의 상위층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귀족 엘리트 학교체제, 들만이 누릴 수 있는 소비문화 등등을 통해 신 카스트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밑바닥에서는 점점 안정된 삶, 안정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사람들, 젊은이들이 할렘가의 흑인들처럼 살아갈 것이다. 길거리에서, 고시원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쪽방촌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 속에 살아갈 것이고, 그런 현실에 분노한 사람들은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거나 증오에 견디지 못할 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발전할수록 한계상황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한편으론 일부의 풍요로운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지구생태계는 지속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3.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런 세상 속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공의의 하나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마구간에 태어난 예수, 갈릴리 변방에서 새로운 세상의 꿈을 전하던 예수를 따르려 크리스천이 되고자 했던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의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오늘 우리 인류에게 다가오는 생태계 절멸의 위기를 막아낼 지혜와 각오가 정말 있을까? 21세기 고도의 과학과 기술발전을 통해 이렇듯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오늘에도 우리가 여전히 가난의 문제, 전쟁과 질병의 문제, 민족과 나라간 살상과 전쟁의 문제, 일부의 풍요한 삶을 위해 무한히 파괴되는 지구자원과 생태계 문제 등등을 해결해 낼 수 없다면 인류문명에 과연 어떤 기대와 희망을 걸어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 등의 사회운동을 하면서 문명은 진보를 향해 발전한다는 믿음 하나로 살아왔다. 역사는 일시적으로는 후퇴하고 돌아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신념, 그것이 곧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라고 생각하면서 일해 왔다. 70년대 가난한 시절을 살면서도, 군사정권의 야만적인 억압체제를 살면서도, 인간의 이성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신념과 믿음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오히려 가난했고 힘들었지만,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즐겁게 운동을 하여왔다. 그러나 소득 2만 불을 바라보고,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자랑하며 사람들이 자동차를 한 가정에 두 대 씩이나 몰고 다니고, 작은 운동장만 한 아파트를 가지고 살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땅 투기, 아파트 투기를 일삼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약자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작은 물질을 되돌리는 종부세를 무력화시키고, 사회 공공부조 정책을 후퇴시키고 강자들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제마저도 풀어버리고자 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세력을 좌익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의 탐욕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함께 한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절망하게 된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니 탄소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자신들의 에너지 소비는 줄이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서 더욱 고도성장만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르게 나누어 평화를 이루려 하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야 죽든 말든 자신들의 부를 더욱 축적하고자 온갖 부당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이런 탐욕이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렇듯 탐욕스러운 오늘의 세대가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 양극화로 말미암은 공동체 분열의 위기, 나라와 민족과 계층 간 갈등을 과연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오늘 여전히 시민운동의 현장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시민운동, 사회운동이 이런 위기를 해결할 만족스러운 수단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세상 한구석 어디에선가는 불가능할지라도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물질적 탐욕이 지배하는 세계질서를 함께 배려하고 상생하는 사회질서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좀 더 고르게 나누고 함께 평화로울 수 있는 정치체제, 국제관계, 사회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시민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적게 소비하고도 즐거울 수 있는 삶의 방식과 문화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가난해도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시스템과 부조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험하며 일할 뿐이다. - 지나간 날들보다 오지 않는 날들을 꿈꾸는 것이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서 하늘을 쳐다보며 흔들리는 작은 잎사귀들이 언젠가 다가올 내 미래의 찬란한 순간들이라고 생각하며 행복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더는 찬란한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이젠 꿈꾸는 것이 두렵다. 다가가면 멀리 달아나는 무지개처럼 달콤한 꿈은 순간에 사라지고 눈을 뜨면 현실은 늘 푹 파인 포탄자국처럼 검은 입을 벌리며 비웃고 있었다. 처참한 꿈이었다. 이제 도리어 눈감고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이 행복하다. 볕 드는 상여집 흙담에 기대어 낮잠을 자면서도 미소를 짓던 거지처럼 남루했지만 찾아가면 남은 밥한 양푼을 내어주던 시절이 그립다. 목 마르면 아무 데 개울에나 머리 처박고 꿀꺽꿀꺽 물 마시던 그날들이 그립다. 한 때 나는,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살았지만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탐욕이 목 끝까지 가득 찬 시절이야. 가봐야 그 끝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으므로 - 4.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밑바닥에서 배려하는 삶의 문화, 적게 가지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생활과 문화의 훈련 필요 (NGO 와 종교 등의 역할) - 다수의 시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체제 만들기, 그러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 내수와 저소득층이 잘살 수 있는 사회구조 만들기 *이 발제문은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와 캐나다연합교회 아시아위원회 주최로 지난 11월 30일부터 열린 '제국에 관한 한국-캐나다 공동연구모임‘의 둘째 날인 12월 1일(월), 주제발제 2) “정의로운 무역을 위한 의제-대안을 찾아서” 부분에서 발표된 ‘한국의 사례연구 및 전망’에서 발표된 내용의 전문입니다.
2.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아간다는 것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