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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의 길위의신학] 불화와 자업자득의 방정식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불행의 원인은 다양하다. 천재지변의 참화나 예기치 않는 사고, 평생 모범생으로 부처님 가운데토막처럼 착하게 살아온 사람의 급작스런 비명횡사 등으로 겪는 개인적 불행이란 게 분명 존재한다. 이와 같이 불가피하고 해명하기 어려운 불행의 미궁을 설명하는 하나의 간편한 장치는 운명이나 팔자다. 그렇게 타고났다는 것이다. 또는 불교의 논리대로 전생의 업보를 치르고 있다는 식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가져다붙이는 선택이 가능하고 이슬람교도 ‘인샬라’라는 편리한 레토릭이 만능으로 통한다.

이와 별도로 우리 인생의 불행은 더 많은 경우 인간관계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저 홀로 불행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혼자 독처하다가 고독사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 죽음의 보편적 불행을 제거하면 생각하기에 따라 고독이란 삶의 방식 안에서 얼마든지 자족적일 수 있다.

사람은 사람과 만나 부대끼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치이고 눌리고 불화의 대치 상황을 만든다. 수틀리면 헤어지는 지름길이 있긴 하다. 그러나 헤어지기에 너무 늦었거나 부적절한 형편 가운데는 헤어지기 때문에 더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불화의 관계로 인한 갈등이 90:10, 심지어 99:1의 부조화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전적으로 피해자이며 상대방은 전적으로 가해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죽일 놈/년처럼 보이는 상대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애당초부터 죽일 놈/년의 팔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사람 역시 살다보니 그렇게 죽일 놈/년처럼 꼬인 것이고, 그 과정에 피해자연하는 사람이 일정 부분 가해자로 그 불화의 방정식에 어떤 변수로든 연루된 것이다.

내가 만나고 겪은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내 직관은 모든 인간관계의 불화가 결국 51:49의 게임으로 사소한 비틀림과 기우뚱한 부조화의 긴장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조율하는 데 실패한 결과라는 쪽으로 쏠린다. 근인을 따져보면 한쪽의 잘못이 훨씬 더 커 보이지만 원인으로 소급하여 찬찬히 그 관계의 굴절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쌍방이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한쪽이 꿀리면 상대방이 그 꿀리는 부분을 보충하여 감싸고 포용하는 사랑의 능력이라도 발휘하여 관계의 수위를 조절하면 울퉁불퉁한 길을 기우뚱거리며 걷게 될망정 파탄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란 게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지 않다. 나이만 먹는다고, 신체적인 성인이 된다고, 저절로 사람을 깊이, 오래, 너그럽게 사랑할 줄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는 데만 익숙해온 사람들, 인생의 쓰린 고난을 겪어본 적도 없고 겪더라도 그 고난에서 존재의 비밀을 아무것도 신통하게 배우지 못한 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어리숙한 철부지로 겉돌며 ‘왕자/공주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그 불화의 종합적 소인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이런 상대를 만나 인생이 꼬인 이들은 자신을 가해자로 몰아붙이는 자를 반격할 적실한 꼬투리를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겠지만 사람 보는 자신의 안목이 너무 편중되어 충분히 현명하고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니 이 또한 자업자득의 측면이 강하다. 피해의식이 강하면 자신의 그 피해 이면에 자신의 결핍과 무능력을 살필 겨를을 얻지 못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이 강한 경우는 그 죄책의 부담을 탈피하기 위해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가해 사실에 무감각하거나 오히려 위악적 언행으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불행의 밑바탕에 깔린 불화의 탈출구는 그것이 쌍방관계의 자업자득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는 걸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피해자이며 가해자이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관계의 세밀한 다이내믹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야 90:10으로 치우친 관계의 가파른 불화는 51:49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가로지르며 조율의 곡예를 성사시킬 수 있다.

햇살이 아직 남아 있는 늦은 오후, 천변을 걷는데 쑥 캐는 아낙이 눈에 띈다. 한 움큼 뜯어 올린 쑥의 향기가 콧잔등을 스칠 듯하다. 겨우 내내 차갑고 딱딱한 얼음 땅속에서 견디며 피워 올린 새싹을 나오자마자 냉큼 잘라가는 것이 너무 야박한 짓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햇살의 은총을 받아 곰곰이 재고해보니 쑥의 뜯김이 자발적 공여의 성격이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식물성의 천진한 공여는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여 피해의식을 드러냄도 없고 자신을 지키려는 가해적인 저항도 없다. 쑥과 아낙의 칼이 만나는 방식은 49:51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1을 -1에게 할애하는 텅 빈 은혜의 채널에 의존한다. 아낙은 명랑한 표정으로 그 애잔한 식물의 몸을 거두고, 쑥의 표정을 살피자니 좀더 버티고 몸집을 키워 봄 한 철을 보내다가 결국 메말라 스러지는 운명을 조금 일찍 흔쾌히 마감한다고 여기는 태연한 포즈 아닌가. 아무리 냉정하게 살펴도 그 자리에 쑥과 아낙의 불화는 보이지 않았다. 자업자득의 쓴맛도 물론 예감되지 않았다.

비스듬한 저녁 햇살의 각도가 정수리를 겨냥하는 정오의 빛보다 더 너그럽다. 거기에는 갖은 풍상을 겪어낸 인간이 제 측근 인간에 대한 긍휼을 머금고 떠는 애잔한 삶의 풍경이 있다. 타자에 대한, 타자의 고통을 향한 가난한 떨림과 웅숭깊은 울림의 메아리로 반향하지 못하는 온갖 불화의 저변에는 늘 제 변명의 자장 안으로 스러지는 자업자득의 불행한 그림자가 맴돈다.

내가 너무 잔인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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