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은 일자의 지배도식이 아니라, 다자(다중)의 화해의 도식 즉 이웃사랑이다. 그러므로 시내산 십계명은 다시 써야 한다.”
십계명을 지배가 아닌, 피지배(소수 약자, 타자 등)의 시선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석규 전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새길이야기 2013년 봄호에 기고한 글 ‘십계명과 인간의 욕망’에서 "십계명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신을 투사한 집단 인간 공동체의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욕망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라는 무의식의 그물망"이라며 십계명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우선적으로 그는 십계명을 지배담론으로 해석해선 안되고, 다자의 피지배의 담론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껏 십계명은 유대교와 가톨릭 그리고 기독교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일자에 의한)지배담론으로 읽혀져 온 게 사실이다.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얼과 꼴을 갖추고 있는 십계명을 이렇듯 지배담론으로 읽을 시 "금지와 처벌"로만 새겨질 따름이다. 때문에 인간억압 기제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그러나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자유의 해법을 찾았다"는 데서 십계명 다시 읽기의 출구를 찾았다. 이 교수는 "(기존의)금지와 처벌의 관계가 재형성되었다. 이는 곧 금기와 처벌이라는 율법의 완성으로서 용서와 사랑이다"라며 "예수야말로 십계명의 은폐된 욕망의 주체를 발견하고 그 주체의 트라우마를 발견하고 치유한 참다운 주체가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어 전통적인 십계명 해석을 통해 "이웃이 은폐되었다"고 지적했으며, (인간의)무의식을 지배하는 권력자로서의 주인만이 한껏 부각되었음을 확인했다. 이 교수는 "우리는 타자로서가 아니라 예수 사랑의 완성으로 주체인 가깝고도 먼 이웃을 발견해야 한다"며 "여기서 주체는 일자의 십계명의 명령자인 주체로서 주인이 아니라, 바로 노예에서 친구로 극복되어야 할 이웃이야말로 십계명과 예수 사랑의 진정한 주체이며 이는 용서의 주체인 동시에 사랑의 주체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예수가 주인과 노예가 아닌, 주인과 친구의 관계를 역설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진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교수는 "여기서 일자 신과 종교적 헤게모니는 주인으로서 지배적인 아버지 대(大) 타자의 담론에 주체가 아니라,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아들로서의 아버지 즉 고난당하는 아들의 아버지"라며 "그리하여 예수는 신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통해 율법을 통한 감시와 처벌을 용서와 화해의 사랑으로 변화시킨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십계명의 복종자와 처벌자로 희생된 타자(혹 이웃)가 예수의 사랑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며 "십계명은 특정 일자의 지배계급의 시선으로 해석되거나 읽혀져서는 안 되고, 약자 소수자의 시선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다시 읽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약자 소수자, 타자의 시선으로 본 원래의 십계명은 "인간에 대한 지배를 확정하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위협하고 억압하려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라며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선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인간의 욕심(결핍된 욕망)은 죄를 낳고 그 죄는 사망을 낳는다고 했지만, 예수의 사랑의 계명은 다른 모든 법에 우선한다"며 "왜냐하면 예수의 욕망은 결핍된 욕망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는 생명의 그리고 창조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예수의 사랑의 계명은 십계명과 율법을 이데올로기와 우상으로 계속 옷 입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속 벗겨내는 것"이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계속 따르기 위해서 기독교는 십계명과 교회와 신학과 신앙의 삶의 실천을 이데올로기와 우상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이웃인 인간과 자연에 향한 사랑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이 교수는 이러한 십계명 다시 읽기를 통해 "십계명은 예수의 사랑으로 계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이웃종교/인들을 원수나 적대자가 아니라 친구로 대하게 할 것"이라고 했으며, "기독교공동체는 성경의 율법과 온갖 교회법을 도구로 삼아 약자 소수자를 사냥하지 말고 예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화해의 정신을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전하며 글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