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 6:4-9, 갈 5:1, 13-23, 눅 2:41-52)
설교문
[들어라, 그리고 마음에 새겨라]
목사 후보생 시절, 일 년에 한두 번씩 노회 고시부 목사님들이 면접을 보았습니다. 목사 후보생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목사직을 감당할 소명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때마다 반복되는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성경은 1년에 몇 번이나 읽나?" "기도 생활은 잘하고 있나?"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이 있나?" 같은 질문입니다. 그중에 꼭 등장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중에 어떤 목회를 하고 싶나?" 저는 목사 후보생이 된 순간부터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면접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육 목회를 할 생각입니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 저는 학교에서 배우는 신학과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사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데, 목사는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교회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고, 이상하고, 한심스럽기도 했습니다. 오늘 신명기 말씀은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언제 어디서나, 기회를 얻거나 못 얻거나 몸에 찰싹 달라붙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즉 말씀과 삶이 분리되어선 안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자신의 인격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즉 신앙과 신학이 동떨어져 있고, 그래서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치유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 목회란 바로 교인들이 올바른 신학 위에 건전한 신앙을 세우도록 돕고,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뜻밖의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가 드러나도록 돕는 목회가 바로 교육 목회입니다.
한편 오늘날은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절이 아니기에,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합리성과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고,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가르침에도 귀를 열어야 합니다. 교육 목회를 지향하는 저는 그래서 제가 먼저 열심히 배우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하는 공부에는 교회 교인이신 최무영 교수께서 뉴탐사 유튜브 채널에서 하시는 물리학 강의도 있는데, 최근에는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시고 교육과 관련하여 3강 연속 강의를 하셨습니다. 내란과 계엄을 겪고서도 선거 지형도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황과 20대 30대 젊은이들의 보수적 투표 경향을 보시고 크게 고민이 되어서 교육의 문제를 되돌아보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합리성과 비판적 사고를 함양하여 자기를 성찰하고 사회와 공동체적 가치에 책임 의식을 지녀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와 문제 해결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고, 제대로 배우면 사회의 다양한 사건을 깊게 해석하면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남들과 소통하고 예술적 소양을 기르고 더 나은 문화를 진작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육의 현실은 점수를 많이 얻어 좋은 학벌을 따는 것에 급급하고, 수업 방식은 일방적 주입에 암기 위주라 비판적 사고를 기를 여유가 없고, 무한 경쟁 속에서 사회와 공적 책임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으며, 틀에 박힌 문제 풀이만을 반복함으로써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돈만 아는 자본주의는 의미를 추구하는 일을 억압함으로써 세상과 인간, 자연, 더 좋은 삶에 대한 도전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는 미숙하다는 것이 최 교우의 판단입니다. 무한 경쟁 한복판에서, 패배자는 열등감에 빠져 체제에 순종하거나 분노를 느끼고, 승리자는 우월감을 느끼며 체제를 악용하여 독단적 지배를 하려 들기에, 오늘 한국 교육이 노예나 괴물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탄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공동체로서, 또 신앙을 지닌 한 명의 시민으로서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다룹니다. 누가복음에서만 보도하는 이 시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는 자기 종교 전통에 매우 충실합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도 데리고 갑니다.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성전에 감으로써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부모를 따라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길을 충실히 걷는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유대 율법 선생과의 토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교육은 구약성서의 율법인 모세오경에 대한 주석서인 미드라쉬를 놓고 서로 토론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 대학의 도서관에서는 어떤 구절을 놓고 둘씩 짝지어 열심히 토론을 하는데, 그래서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도서관이 엄청 시끄럽습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도 교사는 학생들의 의견을 계속 묻습니다. "마따호세프" 히브리어로 "마따호세프"는 "네 의견은 무엇이니?"라는 뜻인데 교사는 계속 이렇게 묻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대답합니다. 정해진 정답도 없고, 시험도 없고, 획일화된 표준 교과서 같은 것도 없습니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눔으로써 사유의 능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듣는 훈련도 합니다. 계속되는 토론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비논리적으로 우기는 무지함에서 탈피할 뿐만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말하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율법 교사들과 토론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는 이른 나이부터 자신이 있을 자리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어머니 마리아의 말에 소년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자기 욕심으로 아이들을 내몰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이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있지만, 부모는 자기가 알고 있는 40가지도 안 되는 것 중에서 한 가지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재능도, 아이의 행복도 감소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의 부모는 어린이 예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이 말을 잘 간직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어디일까요?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인간은 실수하고 넘어지고 유혹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건넨 질문은 바로 "사람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서 배우기]
오늘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가 새겨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진정 참된 신앙에 도달하려면 예수처럼 우리 또한 2000년 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모임을 통해 기독교적 수행을 합니다. 때로는 소모임으로, 때로는 성서 공부로, 때로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매일 묵상을 통해 말씀이 삶에 녹아들도록 애를 씁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두 번째는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찾고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궁금증을 가지고 혼자서라도 그 뜻을 찾아 궁리하였기 때문에 율법 교사들과 만났을 때, 담대하게 묻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서가 증언하는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묻고 질문하며 자기 삶에서 녹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아셨습니다. 신앙의 년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그냥 왔다 갔다, 취미생활이나 친교의 수단으로만 삼을 수도 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기도가 우상이 된 것이고, 성경을 귀히 여기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성경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사탄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여기에서 우린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 지혜와 키를 모두 언급하면서 육체적 성숙과 함께 정신적 성숙을 겸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도 이 땅의 삶에서는 구체적인 역사와 장소, 그리고 시간, 인간 삶의 다양한 만남과 단계 속에서 지혜가 자라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혜나 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둘 다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명문대 입학이 곧 출세였던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다수의 어른은 자기 자녀들이 수능시험만 잘 보면 모든 것이 이루어져 행복이 보장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능시험 점수에 매달리지요. 그런데 여기에 맞서 온라인에 익숙한 청소년들은 무엇보다 겉모습에 상당히 신경을 씁니다. '몸짱', '얼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듯이 몸과 지혜 둘 다 중요함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식이 아닌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란 추상적 정보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기억하며 그분을 뜻이 무엇인지 묻는 가운데 발생하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삶의 기술이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특별히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자란다"라고 번역된 원어는 '진행하다', '나아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그 안에는 "장애를 치워가며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또한 한 번에 훌쩍 다 자랐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와 키가 자란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때그때 발생하는 장애물들을 치워가면서 조금씩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바로 사무엘에게 썼던 표현 그대로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제사장이 된 홉니와 비느하스는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진정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며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예수께서는 일찍부터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럴 때 사람에게도 사랑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온전히 하나님께 가 있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사람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문화 만들기]
우리나라는 개신교의 역사 150년도 되지 않아, 깊고도 넓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롯이 지닌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시에 일제 식민지에 의해 지배당하고, 밀려오는 서양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귀중한 우리의 문화 전통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국 전쟁 후 폐허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일어서서 지금과 같이 잘살게 된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천박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재력과 교양, 모두 있는 이들을 종종 만날 때가 있지만, 신라 문명이 만들어 낸 원효 스님, 조선 문명이 만들어 낸 퇴계 이황이나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을 만나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 내에서 이전의 다석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님같이 깊은 정신의 세계를 노니는 분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를 물을 때 저는 참으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처럼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된 믿음을 얻으려고 여기저기 선생님도 찾고, 믿음의 동료도 구해보지만, 너무나도 왜곡된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모습에 그저 실망할 뿐입니다. 맹자라는 동양 고전에 보면 "부귀영화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옳은 뜻을 바꾸지 않으며, 위세와 무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한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는 말이 나옵니다. 참된 신앙인은 최소한 이런 대장부 정도는 넘어서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 하나 찾아보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도 부끄러울 따름인데,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를 생각해보면, 역시 그것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신앙의 깊은 전통이 없다는 사실과 연결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뿌리가 너무 얕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대학원에서 본회퍼 목사님의 책을 읽고 그분의 신학을 배우고 신앙을 알게 되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기도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43년 4월 5일 체포되어 1945년 2월 7일까지 베를린 테겔에 있는 군 형무소와 베를린 프린츠 알브레히트의 지하 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194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감옥에 있었을 때, 그는 부모님, 형제자매들, 친구들과 제자들과 편지를 주고받는데, 이 편지에는 감옥에서의 생활뿐만 아니라 최고의 천재 신학자로서 고민했던 많은 신학적 주제들의 단편들도 담겨 있습니다.
또 본회퍼는 목사로서 감옥에 있는 동안 자기 제자이자 동료인 베트게와 조카 레나테의 결혼 예배를 위한 설교와, 또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의 세례식을 위한 글을 쓰는데,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깊이 감동했습니다. 신앙의 전통과 유산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이름은 디트리히 빌헬름 뤼디거 베트게인데, 본회퍼 목사는 이 아기의 대부(代父)로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너와 더불어 우리 가정에 새로운 세대가 시작된단다. ~ 중략 ~ 너는 새로운 세대의 대열에서 선두에 서게 되었다. 네가 너보다 앞선 제3, 제4 세대와 함께 네 삶의 한 부분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너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소득이 될 것이다. ~중략 ~
네가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이름은 네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세 가정을 가리키고 있단다. 너의 아버지 쪽을 보자면, 네 조부 가문은 마을의 목사 가문이었다. 소박함과 건강, 집중적이면서도 다양한 정신적 생활, 눈에 띄지 않는 삶의 자산들에 대한 만족감, 자연스러우면서도 편견 없이 민중들과 노동과 삶을 나눌 수 있는 능력, 삶 자체가 가진 실제적인 것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 내적 만족에 기초하고 있는 겸손, 이 모든 것이 마을의 목사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가치들은 네 아버지에게서도 나타난단다. 이러한 것들은 너의 삶 전체에 있어서 사람들과의 공동생활, 진정한 행위, 그리고 내적 행복을 위한 기초가 된단다.
너의 외가에서 형성된 옛 시민적 전통의 도시문화는 너의 외가에 좀 더 높은 책임성과 위대한 정신적 업적, 그리고 지도력을 위한 소명 의식을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역사적 유산과 정신적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는 뿌리 깊은 의무감을 또한 형성해 주었단다. 그 문화를 네가 이해하기도 전에 그 문화는 너에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양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 네가 이 문화에 불성실하게 대하지 않는 한, 너는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 중략 ~
네가 성장하게 되면 옛 목사관은 옛 시민계급의 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멸된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옛 정신은 오해의 과정과 퇴보의 시기를 거친 후, 그리고 후퇴와 내적 성찰, 유예기와 회복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형식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과거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삶을 좀 더 어렵게 만들지만, 또한 동시에 삶을 더욱 풍요롭고 힘차게 만들기도 한단다. 인생에는 빠르거나 늦거나 간에 삶이 언제나 다시 그리로 돌아오는 근본 진리들이 존재한단다. 따라서 우리는 서둘러서는 안 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단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신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전 3:15)
좋은 부모님의 가정에서 보호를 받고 자란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격동의 시대에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 중략 ~ 정신적 삶이 전반적으로 빈곤해지는 세상이지만 너는 네 부모님의 가정에서 정신적 가치의 보금자리와 정신적 자극들의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 부모님이 이해하고 수련해 온 음악은 네가 혼돈에 빠졌을 때 너의 본질과 감각을 분명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걱정과 슬픔에 빠졌을 때는 네 안에서 기쁨의 기음(基音, Grundton)을 일깨워 줄 것이다. 네 부모님의 부지런한 삶은 일찌감치 네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자기 손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너를 인도할 것이다. 사사로운 욕심 없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네 부모님의 선물은 너로 하여금 많은 친구와 조력자들을 사귀도록 도와 줄 것이다. 네 부모님 가정의 신앙은 떠들썩하고 말이 많지는 않지만, 너를 위해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즐겨 행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 중략 ~
나는 네가 시골에서 자라게 되기를 바란다. ~ 중략 ~ 성서의 말씀에 의하면, 가인은 대도시의 창설자다. 앞으로도 세계적 대도시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가진 찬란함은 비록 매혹적일지라도 유럽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 탈출은 시골에 있어서도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단다. 시골의 삶이 가지고 있는 조용함과 한적함은 이미 라디오, 자동차, 전화 그리고 거의 모든 생활영역의 조직화를 통해 크게 손상을 입었다. ~ 중략 ~ 고독과 고요함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찾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의 변화 앞에서 발디딜 땅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있고 거기서부터 새롭고, 자연스러우며, 자족할 줄 알고, 만족스러운 낮의 일과 저녁의 휴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분명 하나의 소득일 것이다.
이렇게 일상적인 삶의 언어로 이어가는 본회퍼의 세례식 글은 후반부로 갈수록 매우 철학적이고 심도 있는 신학적인 언어로 바뀌고, 당시 교회의 현실을 개탄한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은 오늘날 오직 두 가지 것, 즉 기도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생각과 언어, 그리고 조직은 이러한 기도와 행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네가 성장하게 되면 교회의 모습은 매우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개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너무 성급하게 조직적으로 권력 신장을 추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변혁과 정화를 지체시킬 뿐이다. ~ 중략 ~
이제 본회퍼 목사는 마지막으로 아기에게 권면의 말을 하는데, 히틀러 치하의 암울한 상황이지만 언젠가 인간이 다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이 세계가 변화될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의 일은 조용하고 숨겨진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고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너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언젠가는 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건네질 것이다. "의인의 길은 동틀 때의 햇살 같아서, 대낮이 될 때까지 점점 더 빛난다."(잠언 4:18)
[어수선한 세상 한 가운데서]
오늘의 세상은 정말로 어수선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사사기 시대처럼 저마다 제 소견이 옳다고 하면서도 책임은 회피합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먼저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향린의 신앙 교육은 우리의 예배와 활동과 우리 문화 속에서 저절로 풍겨 나는 그 무엇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낮은 자리로 끝까지 내려가면서도 품격과 품위를 잃지 않고, 기도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인내 속에서 저절로 몸과 마음에 배어나는 향기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해 주었던 말씀들로 오늘 하늘뜻펴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대들은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딤후 3:14a, 17)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전도자의 임무를 완수하십시오.(딤후 4:2, 5) 그러면 여러분의 길은 동틀 때의 햇살 같아서, 대낮이 될 때까지 점점 더 빛날 것입니다."(잠언 4:18)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