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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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삼각형은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 변의 한 쪽이 다른 한쪽으로 기울어 정삼각형의 균형이 기우뚱해지면 이 삼각구도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한 집안의 어린 아들 셋.(아, 나랑 같다.) 첫째와 셋째의 알콩달콩한 사이에 끼인 둘째의 질투. 그 질투는 천진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그 위험의 후과에 대해 아무런 죄책도 없다. 이로부터 발원한 막내 생매장의 끔찍한 살해 사건은 첫째에게 상처이고 고통이지만 둘째에게는 유희이고 가벼운 보복이다. 이렇듯 폭력의 본능은 Stoker라는 한 가문의 핏속에 유전된 과학의 결과이고 필연적인 운명의 유산으로 예시된다.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자 <박쥐> 이후의 신작 <스토커>는 스토커 가문의 피로 얼룩진 폭력의 잔혹극을 명징한 연출로 빚어낸다. 섬세하고 강렬한 색감으로 조형한 미장센의 유려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릴 넘치는 장면들의 스피디한 교차편집과 음악도 스토리 라인의 집중력을 강화하는 데 강렬한 고밀도의 에너지를 부여한다.
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 분)는 풋내기의 탈을 벗고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섬뜩할 정도의 공포스런 경험 가운데도 냉정함을 견지하는데 제어된 폭발 직전의 그 진지한 표정이 내내 인상적이다. 삼촌 촬리(매튜 구드 분)가 가족사의 비극에 기원을 여는 악한 피의 매개였다면 인디아는 마침내 그 집안의 악한 피를 정점으로 응집시키는 최후의 계승자이다.
계승되는 것은 악한 피만이 아니다.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올드 보이> 등에서 보여준 폭력을 다루는 박 감독의 능란한 솜씨와 세밀하게 조탁된 이미지들이 이 신작에서도 세 건의 살인 행위를 통해 꾸준히 계승된다. 이미지로 말하게 하는 사례로 제시된 신발들, 풀밭으로 연결되는 머리카락의 결, 몸의 은밀한 부위로 기어드는 거미, 정원에 장식된 매끄럽고 동그란 바위 등은 스릴 넘치며 기괴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첫 번째가 힘들지 한번 통과하면 폭력과 살인조차 일상의 버릇처럼 천연덕스럽게 즐기듯이 담담하게 또는 유희적으로 실행된다. 그래서 폭력의 미학도 가능해지고 살인의 추억도 되뇌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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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 감독의 신작 <스토커>의 한 장면. |
이 영화에서 교훈으로서 메시지를 찾는다는 것은 강바닥에서 사금을 캐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듯싶다. 다만 박찬욱 감독은 그의 초기작부터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인간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폭력과 복수의 욕망을 거의 유전자 결정론 식의 논법으로 조명해오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잔인한 ‘동물성’이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지녔는지, 또 그것을 현대문명의 아우라로 포장할 때 얼마나 세련된 미학적 공간이 창출되는지, 그는 거의 짐승적인 후각으로 포착해낸다. 특히 그 폭력의 쾌감이 빚어내는 내면의 긴장과 공포의 심리를 현란한 편집과 공간 연출로 세밀하게 포착하는 솜씨는 가히 일등급 수준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작품을 증거로 박찬욱을 새 시대의 히치콕으로 상찬하는 평자도 있지만 그는 그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어느 지경을 넉넉하게 관조할 만한 장인의 기예를 살려 그 작품 속에 가장 끔찍한 인간관계의 악마적 비극을 유희적으로 부려놓았을 뿐이다.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면 그 저주의 항목 속에 악에 눈뜨면서 세상을 비로소 깨치고 세속적 삶의 주체로 우뚝 서는 통과 절차란 게 있는 법이다. 이 영화는 인디아라는 모범 여고생이 18세 생일을 기점으로 그 악의 기미를 느끼며 그 수상한 징후를 탐색하다가 마침내 그 악의 메시아처럼 자신의 정체를 확신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기묘한 성장영화다.
‘때로 나쁜 일을 해봐야지 더 나쁜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인디아의 생활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다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등장한 삼촌 촬리는 말한다. 이 말이 내게는 금기는 위반을 위해 존재하고 위반은 또 다른 금기의 기원을 이룬다는 바타이유의 전언처럼 울린다. 때로 까마득하게 동떨어진 듯 보이는 선과 악의 거리는 얼마나 깊숙이 뒤엉켜 우리의 피와 살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것이 독립된 주체로 길 떠나는 인디아의 미래 여정에 옹골차게 실증될 수 있을까.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신학자(그 ‘어떤’의 범주에 해당되는 자들은 꽤 많다)는 내가 발표한 어떤 글에 대한 논평으로 글쓰기가 ‘관념의 유희’로 흐르면 안 된다고 점잖게 타일렀다. 그에게 유희는 타기되어야 할 악덕이고 금기였던 셈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유희의 동력이 없이 글을 쓰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힘에 실린 폭력의 충동을 배제한 채 글의 물리적 심리적 기원이 해명될 수 있는 것인지 (속으로 그를 바보 등신 취급하며) 따지며 되묻고 있었다.
내게 학문을 위한 학문의 가능성이 내 속에 잠재된 순수와 폭력의 오랜 숙원이었듯,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박찬욱의 이런 영화 텍스트는 여전히 ‘유희’에 대한 강박적 반작용으로 과도하게 엄숙함을 꾸미는 무리들에게 미학적 계몽의 섬뜩한 일갈처럼 읽힌다.See More(사진= 스틸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