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의 한 장면. ⓒ<피에타> 스틸컷 |
가인의 후예로서 아벨의 피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속죄’가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이러저렇게 그려낸 실존에 ‘속죄’가 필요하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는 인간과 죄, 그리고 그에 대한 속죄에 대한 근본적인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피에타>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실존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사채를 돌려받기 위해 타인을 불구로 만드는 주인공 ‘이강도’(이정진 분, 이하 ‘강도’)의 악행은 현실적으로 표현된 인간 실존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실존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불구로 만드는 운명을 지녔을 지도 모른다. 내가 부정당하기 싫다면 타인을 부정해야만 하고, 내가 생존하고자 한다면 타인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함을 이 현실에서 너무나 자주 목도한다. 벌써 3주기를 넘어가는 용산참사나, 카페 마리가 겪었던 일들, 우물을 빼앗겼던 두리반 등, 우리는 겉으로는 서로를 사랑 한다 어쩐다 하지만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칼을 겨누고 있으며, 그렇게 의도치 않게, 혹은 너무나 의도적으로 서로의 목숨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 생존에 대한 욕구와 열망에 의해 필연적으로 악을 행한 과거, 현재, 심지어 악을 행할 미래마저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극에서 ‘강도’에게 당한 피해자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된다. 혹은 반대로, 잔학무도한 ‘강도’ 자신마저도 ‘엄마’(조민수 분) 앞에서는 순진무구한 청년이 되기도 한다. ‘강도’에게 아들을 잃은 할머니는 ‘엄마’를 해치려는 가해자가 되려하고, ‘강도’에게 팔을 잃은 남자는 아내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또 다른 피해자의 아들은 ‘강도’를 향해 복수의 연필을 찔러대며, 궁극적으로 ‘엄마’ 또한 자신의 진짜 아들을 잃고 ‘강도’에게 최후의 복수를 하고자 접근했던 가해자되고 마는 현실이다. 이렇듯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껍질을 벗겨보면 가해자 또한 누군가의 피해자이며, 피해자 또한 누군가의 가해자가 된다. 진정한 피해자도 없고, 순수한 가해자도 없다. 단지, 모두가 한을 품은 죄인일 뿐이다.
그렇기에 ‘복수’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의 결말이 암시하듯이 복수라는 행위는 타인의 죄에 대한 심판의 기능은 할지언정, 새로운 화해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속죄함 없는 누군가에게 복수가 남기는 것은 또 다른 가해자로서의 악마성과 그에 대한 절망일 뿐이다. 복수는 어떤 면에서 고귀한 제의이지만, 제의를 치룬 이를 새로운 가해자, 악의 본체로 만들어버리는 마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복수’는 인간을 죄에게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한편, 가해자의 ‘죄’에 대한 아무런 책임 없이 이루어지는 ‘화해’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우리는 책임 없는 화해가 불러오는 비극을 볼 수 있다. 피해자의 용서가 사라져버린 ‘절대자의 용서’와 그로 인한 화해는 진정한 의미의 화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가해자의 자기 위안이자, 자기 가식, 심지어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되어버린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의 한 장면. ⓒ<피에타> 스틸컷 |
‘화해’에서 ‘속죄’는 언제나 ‘용서’와 함께 짝을 이룬다. 비록 그 주체와 행해지는 방식이 다르지만 속죄의 대상은 용서의 주체가 되고, 용서의 대상은 속죄의 주체가 되기에 양자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피에타>는 그런 점에서 철저히 ‘속죄’에 집중하고 있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 말미에 ‘강도’의 자발적 죽음만을 제시하면서 화해의 시작은 ‘속죄’에서 시작된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값없는 용서, 화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구원의 가능성은 ‘진실한 속죄’로부터 주어진다. 그것 없이 화해는 가능성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부재는 곧 구원의 가능성 또한 부재함을 의미한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고, 구원이라는 것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속죄는 그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할렐루야는 영원할 지어다’라는 간판을 끊임없이 비춰주는 <피에타>, 김기덕 감독의 시선은 우리에게 예수의 대속이 지니는 의미, 인간에게 속죄가 지니는 의미를 계속해서 되묻고 각인시키려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는 이러한 속죄-용서의 구도를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교리에 대한 믿음’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피에타>는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허울뿐인 자세인지를 드러낸다.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 속죄의 자리에 올라앉은 이들을 우리가 얼마나 진심어린 눈으로 보았으며, 반대로 용서를 받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속죄의 제단에 올려놓아보았는가? 영원할 것이라는 할렐루야 이전에 인간이라는 실존 전체를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놓으시고자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은 어디 가셨나?
고난주간이 다가왔다. 이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은 단지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주시고자 죽으셨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죄에 억눌린 피해자이자 또한 가해자임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 한 주, 우리는 다시금 용서와 속죄에 대해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다만, 속죄에 더 가중을 두었으면 하는 것은 우리 모두 피해자이기 보다는 누군가의 가해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화해의 작지만, 큰 가능성이 있다.
글/ 권헌일(연세대 신과대학 4학년)·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