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 상 우디 앨런이 감독한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이와 같이 <>로, 영화 속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로 표기합니다.) 1930년대 공황의 늪에 빠진 뉴저지에서의 비참한 삶을 세실리아(미아 패로우 분)가 견딜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영화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해고당하고, 실직자 남편에게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구타당한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항상 그래왔듯 동네 영화관에 찾아가, 때마침 상영 중이던 ‘카이로의 붉은 장미’라는 이름의 영화를 앉은 채 쉬지 않고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본다. 맨해튼 부르주아들의 호사스런 삶이 이상적으로 묘사된 이 영화가 5번째 반복되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영화 속 탐 백스터(제프 데니얼스 분)가 관객석의 세실리아를 알아보고 몇 마디 어색한 말을 주고받더니만 불쑥 흑백 스크린 밖의 현실 세계로 들어선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초반 아주 짧은 순간 등장하는 이 기적과도 같은 컷에서 감독 우디 앨런은 사실 별다른 영화적 장치나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떠한 장치도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컷은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이 영화에서 벌어진 이 기적 같은 일을 적어도 한 번쯤은 머릿속에 떠올려 본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우디 앨런은 이러한 자신만의 화법을 풍부하게 변주해가면서 끊임없이 우리들이 지각하는 현실과 환상 간의 경계를 흔들어 놓는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한 장면. ⓒ<카이로의 붉은 장미> 스틸컷 |
영화 속에서 뛰쳐나온 톰 백스터는 정의롭고 용감하며 시적이지만, 말 그대로 영화 속 등장인물로서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들은 알지 못한다. 예컨대 그는 자동차 운전을 할 줄은 알지만 시동을 거는 법을 모르며, 키스를 할 줄은 알지만 키스를 하는 동안 화면이 페이드아웃 되지 않는 이유는 모른다. 영화가 가진 환상적인 힘을 무한 신봉하는 세실리아는 이러한 백스터를 현실 세계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이라는 공간은 스캔들에 혈안이 된 기자들과 분개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관계자들로 가득하며, 백스터와 세실리아 둘 역시 서로의 이상과 현실을 절충해가는 과정에서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가 영사되고 있는 스크린 안팎의 모두가 황망하고 답답한 와중에서도 백스터와 세실리아 둘 만은 자신들이 모든 현실로부터 벗어나 꿈같은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영상 연출과 적절하게 제어된 음악, 두 주연 배우의 훌륭한 연기와 풍부한 이야깃거리 등, 영화적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가 항상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환상과 그 환상으로부터 깨어날 때 우리가 느끼는 박탈감을 스크린 위에 이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포개어 놓을 수 있게끔 한, 현실과 이상의 본질에 대한 우디 앨런의 통찰일 것이다.
1930년대의 할리우드 샴페인 코미디의 디졸브 시퀀스처럼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카이로의 붉은 장미’도 하나의 커다란 디졸브 시퀀스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스크린의 안과 밖의 섞여 들어감 속에서 관객들은 울고 웃다가, 마지막으로 영화가 완전히 끝난 뒤에는 현실이라는 토대와 영화라는 매체의 몽환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영화 속 이상적으로 요약된 주인공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영사가 끝난 후 텅 빈 스크린의 허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글/ 류한동(연세대 신과대학 4학년)·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