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마는 무지(無知)의 공간에 산다!
1) 옛날에는 인간의 지식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둥이 치면 하늘이 노하셨다 했고, 비가 내리면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이고, 비가 오다 햇빛이 났다 하면 호랑이가 장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2)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조금씩 발전하던 인간의 지식이 3~4백 년 전부터 갑자기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라고 합니다. 잘 몰라서 어둡고 답답하던 곳에 빛을 비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과학 지식이 발달하니 인간은 실제로 전기를 발명하여 세상의 밤을 낮으로 바꿨고, 잘 몰라서 무지의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을 밝은 세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3) 원인을 잘 모르는 현상에 대하여 가장 흔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악마의 소행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악마들이 삽니다. 바다에서 배가 뒤집혀 어부들이 죽으면 바다의 악마가 재앙을 내린 것이고, 산사태가 나면 산신령이 노한 것입니다. 마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의문사가 발생하면, 귀신의 소행이거나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양 중세 시대에는 전염병이나 흉년이 들면 악마의 소행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모자라, 그 책임을 특별한 사람에게 돌렸고, 그들을 마녀로 지목하여 처참하게 고문하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무지가 불러온 비극의 역사입니다.
2. 누구의 죄입니까?
1) 원인을 아는 것은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프면 신경성인지, 뇌종양인지, 소화가 안 되어 그런 것인지 알아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제든지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이 심각하게 아프면 장비와 실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학병원에 기를 쓰고 가는 것입니다.
2) 예수님 당시에도 장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장애는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그만큼 원인과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장애는 두려운 현실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제일 먼저 아이의 손발을 보고, 건강한지 묻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 세상은 장애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장애인이 생활하기에 너무 버겁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죄인 보듯 하는 편견이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성경에서도 사람들이 장애 아이를 놓고 설전을 벌입니다. 장애 아이와 그 가족을 위로하고 새 힘을 불어넣는 데는 관심이 없고, 왜 장애가 생겼는지에만 초점을 모읍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백하는 이스라엘 신앙 전통에서 장애라는 아픔은 반드시 죄의 대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습니다. 문제는 조금 자라다가 장애가 생겼다면, 어린이도 죄를 지을 수 있으니까 죄를 져서 장애가 되었다고 설명하는데, 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의 죄인지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못보는 저 장애인은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부모의 죄입니까? 아니면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라도 죄를 지은 것인가요?
4) 중요한 것은 부모의 죄든, 본인의 죄든 당시 모든 사람들이 장애를 죄의 대가로 보는 시각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장애는 나쁜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것이고, 심판은 분명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아주 명쾌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장애는 죄이며 장애인은 죄의 대가를 달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장애인들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늘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장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1) 오늘 예수님은 아주 오랫동안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겨지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근본적으로 뒤집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은 것은 저 장애인의 장애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고, 문제는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하십니다.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니며, 장애인은 죄인이 아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폭탄선언입니다. 장애인은 육체적 불편함 때문에 어렵게 살 수 밖에 없었고, 종교 중심의 사회인 이스라엘에서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불릴 수 없었습니다. 육체적, 종교적, 사회적 소외로 몇 겹의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장애인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며, 장애는 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려내려는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천국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2) 순풍에 돛을 다는 것은 쉽고 편안하지만 역풍을 거슬러가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오랫동안 내려오던 당시의 상식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니며, 장애인은 죄인이 아니다! 연어는 자신이 떠나온 교향을 찾아서 멀고 험난한 여행을 본능적으로 시행합니다. 교향을 떠난 어렸을 때는 상류에서 하류로 편하게 갔지만, 이제 다 성장하여 산란을 하러 가는 시기는 바다에서 하류를 거쳐 상류로 올라가는 대단히 힘든 여정입니다. 결국 상류에 다다라 알을 낳은 연어는 몸의 기운이 다 빠져서 죽고맙니다. 시대를 거스른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장애인, 죄인, 세리, 창녀 등에 대한 오래된 편견에 맞서 시대를 거스르다가 십자가 처형이라는 끔찍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장애가 죄가 아니며, 장애인이 죄인이 아니라는 복음을 선언해야 했습니다.
3) 주님은 장애가 죄가 아니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장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장애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드러내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강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통해서, 병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밝히셨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건강하고 멋있고 힘있는 사람들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꺼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4) 오늘 우리가 예배 전에 함께 본 송명희 시인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송명희의 입을 통해서 장애인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공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고백을 들을 때, 우리 모두는 그의 영혼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1) 작년에 개봉한 영화 ‘은교’에서 노 시인은 가슴 뭉클한 대사를 말합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2) 장애는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장애인은 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소중한 사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한 가족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것을 선언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주님의 이 새로운 복음을 충실하게 증언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지금도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을 향해 우리 모두가 한 가족임을 힘차게 선언해야 하겠습니다.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거룩한 사역에 부름 받은 장애인 여러분 위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