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근래에 와서 한반도에서는 미군과 한국군이 최첨단 무기들을 동원하여 공동으로 수행하는 합동군사훈련 즉 전쟁연습(키 리졸브 훈련)으로 인해서 북한과 미국 그리고 북한과 한국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최조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훈련이 끝난 다음에도 한국군만으로 수행되는 군사훈련(전쟁연습)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군사훈련들, 말하자면 전쟁연습들은 결과적으로는 낡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고 경제적 난관에 직면하여 모든 면에서 열세에 처한 불안한 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핵무기 개발에 진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몇 십 년에 걸친 연구 끝에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인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생산에 전력을 투구하게 된 것은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핵무기 확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소유함으로써 더욱더 북한을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했으며 동시에 군사적으로 더욱더 위협해 오고 있다. 그동안 이런 불안정한 한반도의 사태에 대해 중국은 중재 와 6자 회담 등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비핵화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미국과 북한은 피차 성실한 약속이행에 실패함으로써 쌍방 간의 이해충돌로 이러한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갔고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적대적 관계는 점차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 휴정협정이 체결된 이후 이들 사이에는 몇 차례의 충돌과 갈등이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반도에서 이데올로기 국가의 출현과 거기에 따른 동서냉전체제의 최초의 무력충돌이었던 한국전쟁과 그 결과로서의 남북한의 분단과 정치적 및 군사적 갈등은 1990년 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예외적으로 계속되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 대결과 갈등을 낳고 있다. 이러한 남북한의 분단과 갈등의 일차적 원인은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지만 그 대결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은 그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반도에 막강한 군사력을 배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남한)의 제반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관여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패권주의정책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미국과 남한과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구라파 국가들은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이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정상적 우호관계로 돌아왔다. 단지 냉전체제 해소 이후에도 북한과 미국만이 여전히 적대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다. 미국에 의한 북한정권의 체제보장을 통해서 대결정책의 해소를 갈망하는 북한에 대해서 미국은 예외적으로 “악의 축”등 비상식적 낙인을 찍고 군사적으로 위협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긴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현재의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적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국제정치적 관계에서 중국의 존재 등을 고려할 때 사실상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현금의 북한과 미국의 비이성적 대결로 인해서 한반도에서 야기되는 갈등은 전쟁 일보직전의 긴장상태가 한미군사훈련이 진행될 때마다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한국과 북한 사이의 대결과 갈등도 점차 첨예화되고 이런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남북한 사이의 분단과 대결의 원인을 모두 강대국에게만 돌리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동안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러한 분단과 대결의 현실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피차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북한에서는 분단과 대결을 정권의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삼았고 남에서는 특정한 (특히 보수 친미)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이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동안 남북한의 분단과 대결로 인해서 치러야 했던 인명피해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손실은 실로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일일이 계산조차 할 수 없다. 북한의 경우 이러한 남북대결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아 인민들에게서 정치적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게 만들었고 또 엄청난 군비지출로 인해 결과적으로 경제파탄을 가져오게 되어 국민들을 굶주림에 빠지게 만들었다.
남한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승만의 독재체제가 한생혁명으로 붕괴되고 등장한 군사독재의 장기화로 국민들은 정치적 탄압과 함께 경제적 착취에 시달려야만 했다. 1986년 이후 민간정부들이 들어섰지만 정치적으로 기본민주주의는 완성되지 못했고 그동안 경제정의 없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경제적 성과는 몇몇 특정 재벌들의 손아귀에 장악됨으로써 사회적 평화는 깨어지고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남한에서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예속됨으로써 국민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처절한 대결과 경쟁 가운데서 매일매일 전시상태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남한의 경우 김구와 같은 자주적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지향했던 지도자들은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 세력에 의해서 암살당하거나 제거되었다. 그 후에도 이러한 민족 화해적이고 통일 지향적 인사들이나 단체들은 친미적이고 반통일적 세력에 의해서 탄압을 받거나 제거되었다. 북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통일을 강력하게 주창하고 나섰지만 실은 그들 기득권 세력의 이익에 복무하는 한에서만 그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분단과 대결로 인해서 지불해야 할 비용들을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만일 남북한의 애국적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남북한 민족이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했다면 그동안의 대결과 전쟁준비를 위해서 사용한 비용의 절반만 사용했더라도 우리 민족은 벌써 화해를 이루고 통일과 번영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그동안 만족할 수는 없지만 민족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대통령 시절인 1972년 “남북 7.4 공동성명서”에서 남북통일을 위한 3대원칙을 발표했고 그리고 노태우대통령 시절인 1992년 2월 18-21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와 통일의 노력은 200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거기에는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통일, 긴장완화와 평화, 교류협력의 활성화 그리고 이산가족의 상봉 문제 등이 담겨져 있었고 이러한 합의들은 부분적으로 실천에 옮겨지기도 했었다. 이어서 2007년 10월 2-4일 역시 평양에서 열렸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의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선언”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경제협력에 관한 다양한 프로젝트 등이 거론되고 결정되기도 했었다.
이렇게 남과 북 사이에는 우여곡절과 힘들게 진행되었지만 서로 대화가 이어졌고 그동안의 대결국면이 완화되어가는 징조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러한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향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던 남한 내의 친미적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남북화해정책을 위험시하고 그동안 진행되던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을 “일방적 퍼주기”라고 비판하면서 안보위기론을 들고나와 이러한 변화에 대결자세를 취했다. 특히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 북한에 대한 이제까지의 화해정책을 대결정책으로 선회하면서 남북 사이의 화해무드는 급격하게 냉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 병사에 의한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키고 북한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상호주의를 내세워 철저하게 금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남북 사이의 대결은 선전선동을 넘어 무력충돌에까지 이르게 되어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했고 나아가서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포격으로 인해서 극에 달하게 되었다.
북한에는 젊은 김정은이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고 남한에도 박근혜정부가 새로 들어서서 “남북 간의 화해 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을 제시하면서 국민들 사이에는 이명박 정부시절의 극단적 대결국면은 피해갈 수 있는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발전해 갔다. 박근혜 정부는 비록 한반도의 신뢰프로세스라고 하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는 이명박이 속해 있던 보수적이고 반북한적인 한나라당 출신이고 동시에 그가 취임하자마자 미국과 함께 최첨단무기들, B2 장거리 전폭기, 최첨단 스텔스 전폭기, 핵잠수함 등을 총동원하여 북한의 코앞에서 키 레졸브라고 하는 위협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적대적 정책의 변화가 보이지 않자 북한은 다시 핵실험과 대륙 간 탄도미사일 발사로 응답하면서 매일같이 군사적 긴장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급기야는 남북한의 유일한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협력의 상징적 공간이고 사업장인 개성공업지구에서 노동자들을 철수시킴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남북한 사이의 긴장과 대결국면은 남북한 정부 당국은 물론이고 평화롭게 살기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위협이고 동시에 정신적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한반도에 사는 국민들은 언제까지 이러한 분단으로 인한 대결과 거기에서 빚어지는 군사적 심리적 위협 아래서 불안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특히 세계 어느 나라 국민들도 경험하지 못하는 핵무기의 위협 아래서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미국의 핵우산이 남한을 지켜준다고 하지만 만일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한의 모든 국민들은 물론 인근의 일본이나 중국의 국민들도 그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얼마간의 사람들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들은 피폭된 땅에서 피폭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후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유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피난을 준비하고 있다지만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미국의 이익에 따라서 수행되고 있는 이른바 남한의 안보정책을 통해서 왜 죄 없는 국민들만 전쟁의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가? 보수적 기득권 세력들은 한국 국민들이 안보불감증에 걸렸다고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상 국민들은 고통스러운 생활전선에서 매일같이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안보정책에서 국민평화정책으로
이제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 남북한 사이의 분단과 증오와 대결을 넘어서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향해서 우리의 사고의 전환과 삶의 자세의 변화를 가져와야 할 때이다. 남북한은 휴정상태에서 60여 년 동안 전쟁의 위협과 불신과 대결 가운데 수 많은 젊은이들의 장기간의 군복무와 신예 무기체제의 강화를 위해 인적 경제적 비용을 치르면서 살아온 이 고난과 낭비의 세월을 중단하고 남북한 민족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통일과 번영의 길들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제까지의 분단에서 오는 남북 간의 적대적 사고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현실, 즉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앞서도 이미 지적했지만 오늘날의 한반도의 분단과 대결은 우리들 스스로가 원하거나 자초한 것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외세들에 의해서 강요된 것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외세들에 의해서 규정되던 숙명적 고리를 끊고 우리 민족이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된 자주민족으로 탄생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1919년 삼일독립선언서에도 나타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자주민족임을 해내외에 선언하고” 자주민족으로 살아가는 길을 함께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은 고려시대에는 몽고, 조선시대에는 중국 그리고 근세는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현재에는 미국에 의해서 규정되어왔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적 운명은 이러한 외세들을 추종하여 민족을 배반한 매국적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좌지우지 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신채호선생의 말마따나 “역사는 자아와 피아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자아에 의해서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피아에 의해서 객체적으로 규정당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반도의 피아에 의한 역사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우리의 운명을 자아가 결정해야 한다는 사고로 전환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민족의 주체적 사고로의 전환에서부터 우리는 그동안의 외세 의존적이고 분단 긍정적 사고에 근거한 남북한 사이의 증오와 대결적 자세를 청산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한 민족. 한 국토, 한 언어, 하나의 관습을 가지고 같이 살아온 한 민족이 동족들끼리 타의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서로 적대시하고 증오해야 하는가?
이스라엘도 약소국가로서 한국과 같이 고대로부터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서 그 운명이 규정되었다. 그들이 12지파로 출애굽 하여 지파동맹의 형태로 지내다가 마침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와서 절대군주체제의 국가를 세웠으나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와서 나라는 10지파로 구성된 북왕국(사마리아)과 2개의 지파로 구성된 남왕국(예루살렘)으로 분단된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 강대국 아시리아에 의해서 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587년 역시 강대국으로 등장한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망한다. 그 후 바빌로니아에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 의해서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국가를 세웠으나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킨 그리스와 그리스를 멸망시킨 로마 제국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다시 규정되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그들 가운데서 위대한 통치자인 정치적 메시아(구세주)가 나타나 그들을 자주적으로 독립시키고 평화와 정의 가운데 통치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과거의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메시아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의 출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이자 종교적 메시아, 혹은 미래에 올 메시아사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메시아가 다윗가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메시아로서 예수가 다윗가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마태 1:1; 12:23; 21:9; 22:42; 누가 1:32; 요한 7:42).
그런데 다윗의 후손이고 메시아로 등장한 예수도 외세들 즉 적대자(혹은 이방인 혹은 이교도들)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고 그 부당성을 지적한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는 이방인의 통치자들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마태 20:25). 소위 외세에 의한 지배의 제반 형식을 지칭하는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거나 승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 당시나 오늘날이나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방인들 즉 외세에 의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지배는 여전하며 이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많은 지배와 착취가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원수들과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43-44). 그러면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로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방민족들, 즉 예수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차원에서 이웃과의 갈등을 대결과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해결하라는 말인가? 구약성서에는 이방인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유대교 내부의 당파 싸움에서 비로소 그러한 계명이 나타난다.(쿰란문서에 보면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모든 어둠의 자식들을 미워하라"는 요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원수들에 의해서 생기는 갈등의 궁극적 해결을 추구하면서 그 방법은 원수를 증오하는 데서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데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를 박해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요구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요구는 하나님의 본질과 행동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취임의 임박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성은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심판을 내포한 율법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담은 복음 즉 사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 사이의 증오와 복수로 인한 전쟁과 대결로 멸망해 가는 세계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서 사랑과 용서로 구원받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6-17).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제까지의 인간의 역사 내에서 하나의 거대한 전환의 사건, 즉 회개(metanoia)의 사건이었다. 회개란 성서에 의하면 하나의 전환, 즉 죄로부터 의로, 증오로부터 사랑으로, 갈등과 대결로부터 용서와 화해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인간들이 전쟁으로부터 평화에로, 분단으로부터 통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단절로부터 하나가 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인간들이 서로 통합을 이루는 것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서 산상설교(마태복음 5-7장)에서 예수는 인간들 사이에 불가능하던 것처럼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된 사례들을 보여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338-44). 이러한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가톨릭신학에서는 보통 평신도들은 실천할 수 없고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과 같이 특수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산상설교의 말씀은 특수한 사람들이나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실천할 수 있고 또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는 산상설교의 말씀을 “불가능한 가능성” (Impossible Possibility)란 말로 해석하고 있다. 인간은 타락하고 사악해져서 그렇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이러한 성서의 말씀들을 능히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예수 사건을 설명하면서 그가 한 가장 위대한 사건은 사람들 사이 혹은 민족들 사이를 갈라놓는 경계선 즉 담을 흘러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에베소서 2:14-17). 바울 사도는 우선 그리스도를 우리 인간들 사이의 평화라고 정의한다. 특히 그의 십자가의 희생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은 담을 헐고 서로 화해하여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것에서 본다. 그는 이러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여러 가지 법조문, 사람들 사이에서 원수가 되게 하는 법조문, 예를 들면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것을 친히 몸으로 폐지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분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북한의 동포들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원수로 만드는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래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회는 수구적인 정치세력과 더불어 이 국가보안법, 즉 남과 북을 갈라놓고 국민들을 서로 운수되게 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반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의 정신은 물론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에도 반하는 반기독교적 행태라고 할 것이다. 평화와 해해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원수 되게 하는 국가보안법을 지지하고 수호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원수 사랑의 실천은 용이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요한문서들과 바울은 그 구체적 실례들을 들어서 원수 사랑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첫째 요한서신에 보면 사랑은 철저한 자기희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 없이는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요한 1서 4:9-10).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비와 희생의 마음을 갖고 죄로 원수 된 인간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를 희생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과 화해를 이룸으로써 그의 사랑을 실천해 보여주었다는 것이 요한서신의 증언이다.
둘째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에 대한 서신인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4-7).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참고, 견디며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어떤 잘못을 하거나 요구를 하드라도 참고 견뎌야 하며 진심을 가지고 대하고 불의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는 그 구체적 실천을 위해서는 자기희생의 정신과 끝까지 참고 견대는 인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남북한이 서로 원수가 되어 대결하고 증오하는 현실에서 서로가 화해하고 용서하고 나아가서 통일된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는 자기희생과 함께 끝까지 인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임할 때만 분단된 우리 민족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고 도발을 해도 우리가 진정 평화를 위한다면 그들을 끌어안고 자기희생과 인내를 가지고 선의로 대할 때 거기에는 해결의 실마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대북정책 즉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대하겠다는 생각(마태 5:38)이나,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인 “상호주의”를 갖고는 문제해결은 되지 않고 오히려 대결과 적대감만 키워왔다.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시절의 “햇빛정책”, 새누리당이나 보수적 논객들이 비판하던 “퍼주기 정책”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책이 아니었는가?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주민들과 어린이들이 굶주려서 죽어가는 것을 비난한 하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한국정부는 북한군의 탱크부대와 맞서기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1조8천억 원을 주고 36대의 최신 아파치 헬기를 사오기로 최근 했다. 만일 1조 8천억 원을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식량을 지원하고 미국으로부터 아파치 헬기를 사들이지 않는다면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과 아파치헬기의 위협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국가안보도 더 튼튼해 질 것이다. 이러한 남한 정부의 ‘눈에는 눈’이라는 대결적 자세와 수단들의 강화는 결국 남북한 사이의 긴장만을 고조시키고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경제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미국이 합동군사훈련을 통해서 남북한의 긴장을 고조시킨 것은 자기들의 최신무기를 한국에 팔아먹으려는 수단이 아닌가?(조선TV논평).
결 론
스위스의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말년인 1946년에 출판한 책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들의 공동체”에서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를 유비들을 통해서 해명하면서 국가라고 하는 세속적 집단도 산상설교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불가능의 가능성”에 상응하는 방향에서 통치할 때 이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치적 존재인 국가는 교회를 따라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선취할 수 없다. 정치적 존재는 교화와의 관계에서 독자적 존재며,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인간적 존재로서 자체 안에 일종의 유한한 세계를 감당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구별, 판단, 선택, 의지, 참여의 방향과 노선은 정치적 존재(국가)와의 유비의 능력과 유비의 필요성과 관계된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정치적 존재인 국가와 교회는 서로 독자적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세계 통치라는 차원에서 보면 상호간에는 유비(analogia)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비는 중세신학자 아퀴나스의 토마스(Thomas von Aquin)가 주창했던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로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의 삼위일체론은 정치에서의 삼권분립(삼두정치)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인 것처럼, 삼권분립에서 입법, 행정, 사법도 독립적이면서 상호적이다. 이들 중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거나 거기에 굴복된다면 거기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삼권분립의 잘못 적용된 예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 국회가 행정부의 거수기가 되거나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가 된 것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이었지만 이명박 정부시절에도 그러한 삼권분립 정신의 파괴의 예들이 국회와 사법부와의 관계에서 적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입법부의 독립이니 사법부의 개혁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고 또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통제하기 위한 헌법의 개정을 통한 권력구조의 개혁의 논의가 진행 중인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러한 유비를 통해서 그의 평화정책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잠시 동안이지만 그의 은총과 자비는 영원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고 심판하시지만 그는 본성적으로 은총과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대결과 갈등의 궁극적 해결책은 하나님의 본성에 따른 “원수사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공동체는 무력적 갈등해결을 단지 최후의 수단(ultima ratio)로서, 즉 다른 어떤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들도 존재하지 않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합법적 국가의 전복이나 파괴가 이루어져 실제로는 하나님의 질서가 부정되는 한에서만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사용이 허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평화유지를 위해서 어떤 무력사용도 허용하지 말고 희생하자는 절대 평화주의의 입장을 바르트는 반대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싸 안고 있다는 유비를 통해서 국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교회공동체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적 갈등해결(전쟁)을 수반하는 평화정책을 지지하며 무력을 배제하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반대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길고도 지루하게 무수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진행되어온 남북한 사이의 대결과 갈등을 진노와 심판이라는 도식 즉 로마식 평화인 “안보”(securitas)로서는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성서 산상설교에 나타난 화해와 사랑(은총과 자비)라고 하는 희브리적 도식인 화해와 “평화”(eirene)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토론해 왔다. 남한 내에서는 지난 60여 년 동안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으로 일관하려는 대결세력과 북한에 대한 대화와 화해협력을 지향하는 평화세력으로 갈라져서 대립투쟁하고 있다. 전자는 미국과 일본과의 삼각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최신의 무기로 무장함으로써 물샐틈없는 준비태세를 유자함으로써만 나라의 안보가 보장된다고 주장하고 있고 후자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상호간 군축을 단행하고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함으로써 평화체제를 유지하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자는 반통일 안보세력으로 주로 친미적이고 친일적인 보수 정치세력이고 후자는 통일평화세력으로 주로 민족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는 진보적 정치세력이다.
이들 중 한국정치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이후 주로 보수적 세력, 즉 안보세력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으며 김대중, 노무현 등 (의사)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남북한 사이의 대결과 갈등은 감소했고 화해와 협력의 장들이 마련되기도 했다. 따라서 남한 대에서는 이러한 안보세력과 평화세력이 지역적으로, 세대적으로 그리고 계층적으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그동안 안보세력에 의해서 정치적 보도처럼 사용되어 온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으며 지금도 정치적 억압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들 두 세력 간의 견해 차이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으나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에만 몰두하고 노동정책은 실종되어서 결국은 노사갈등은 항상 극을 달리고 결과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건전한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남북 갈등과 남남갈등이라는 중첩된 우리나라의 갈등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견실한 발전을 가로막고 나아가서 국민들의 삶을 도탄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서로 뒤얽힌 남북관계, 남남관계를 해결하는 길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우리 모두들의 사고의 전환이 요청된다. 그것은 남한 내에서나 남북한 사이에서 서로 원수 된 적대관계들을 청산하고 화해관계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따라서 원수 사랑이라는 계명은 우리의 평화를 위한 삶의 계명인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