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직신학회(회장 김흡영)가 주최한 한국조직신학자전국대회가 지난 20일(토) 오전 10시 서울 서초교회에서 ‘한국신학은 무엇인가’란 주제로 개최됐다. 다음은 개회예배시 한국적 신학으로서 ‘도의 신학’을 제안한 김흡영 교수(강남대 신학과)의 설교문 전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김흡영 강남대 신학과 교수(한국조직신학회 회장) ⓒ베리타스 DB |
오늘의 성경 본문(요 14:6)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나 외에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는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길이라는 말의 원어는 호도스(hodos)입니다. 희랍어 호도스는 길, 여행, 방법 등 여러 가지 뜻을 가진 것으로 동양의 도(道)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자신을 ‘호도스’라고 하였지 ‘로고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호도스는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최초의 그리스도교를 예수의 도(호도스)라고 했지,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행9:2; 19:9; 22:4; 24:14,22).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 속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희랍적 사유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규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희랍 철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로고스로 설명하는 담론, 하나님(Theos)과 로고스(logos)를 합친 데오-로고스(Theo-logos) 또는 데올로기아(Theologia), 즉 신학(Theology)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구 신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데오스를 로고스로 이해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애당초 로고스는 좋은 의미였습니다. 오늘날 계몽주의 이후, 하나의 기술 이성으로서 환원되기 이전의 로고스는 실천과 영성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었고, 지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만이 아닌 소피아(sophia)라는 개념처럼 보다 넓고 통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적 사유와 신학은 로고스를 남성적이고, 계층적이고, 그리고 특히 계몽혁명 이후 모더니즘은 그것을 더욱 이원론적이고 실천과 분리된 기술 이성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기술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는 현대문명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으나, 대신 로고스가 본래 가졌던 좋은 의미들을 상당부분 상실하여 버렸습니다.
오늘날 Theologos로부터 출발한 서구신학이 그야말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은 바로 로고스라는 개념이 이렇게 환원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그러한 서구신학의 문제점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경제정의가 성립되지 않은 채,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있는 남미의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해방신학의 도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로고스를 중심으로 정통교리 (Orthodoxy)를 추구하며 이루어진 신학체계는 균형을 잃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Orthodoxy(정론)를 주장하면서도 복음서에서 예수가 선포한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보다는 부자 나라의 잘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해주는 기복신앙에 가까운 사역에 치중해왔습니다. 해방신학은 교회와 신학이 진정으로 해야 할 임무는 그런 제1세계에서 잘 사는 사람들만을 축복하는 것보다는, 갈릴리의 예수가 보여준 것처럼 제3세계와 같은 곳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데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학은 정통교리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따른 올바른 실천, 곧 Orthopraxis(정행)을 중심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하고 이론보다는 실천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해방신학은 20세기 최고의 혁명적인 신학 운동으로서 그와 유사하게 억압적인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에 있는 여성, 흑인, 제3세계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리하여 각종 해방운동의 물꼬를 트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 신학에서 전통적인 Theologos를 비판하는 Theopraxis의 바람을 일으키며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혁명을 몰고 왔습니다. 그 결과 세계 최대 그리스도교단인 로만 가톨릭이 해방신학에 승복하게 되었고, 그 증표로 최근 남미 해방신학 출신의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증시켜 주었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즉위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세계적인 지평은 이제 해방신학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명실상부한 전통으로 품고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개발하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오늘날 세계 신학의 문제는 희랍적 사유 그리고 모더니즘에 의하여 강화된 로고스와 프랙시스의 이원화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러한 이원화는 비단 서양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신학 그리고 한국 신학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 서구신학이 들어오면서 로고스 신학은 보수신학에서는 보다 근본주의화 되었고, 진취적인 계열에 있어서도 토착적인 종교의 로고스, 즉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화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반면에 해방적 프랙시스 신학은 한반도의 독특한 억압적 상황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저항하는 민중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토착화신학과 민중신학의 분리처럼 한국신학에서도 로고스신학과 프랙시스신학의 이원화가 극명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을 극복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적 신학패러다임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즉, 그것은 이원론이 고질화된 서양의 사유에서는 그 해법이 나오기 어렵고, 그러한 이원론을 극복한 지혜적 패러다임을 보여준 동아시아의 유교와 도교사상에서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시한 것이 바로 ‘도(道)의 신학’인 것입니다. 도의 신학이 증산도와 무엇이 다르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상에 있어서 도라는 개념은 서양 사상의 로고스처럼 우리 사유체계에 기본적인 것으로서, 모든 종교사상이 그 방향을 향하여 수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도를 한자로 따져보면 머리 수(首) 자와 움직일 착(辶) 자로 이루어져서 ‘머리 수’ 자는 생각하는 로고스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움직일 착’ 자는 프랙시스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는 로고스와 프랙시스의 일치, 곧 지식과 행위의 합일을 함의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사상에서 왕양명(王陽明) 같은 이는 이것을 지행합일(知行合一), 곧 앎과 행함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와 프랙시스가 합일을 이루는 신학을 저는 도의 신학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이상 도의 신학을 주장해왔는데 아시아 및 해외 신학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고, 최근에 와서는 Andrew Park 같은 Korean-American 신학자도 Theology of the Way (Tao)를 주장하고 나선 것 같습니다.
도의 신학은 이러한 세계 신학사적 그리고 새로운 동아시아 또는 한국 신학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도의 신학은 동아시아 및 한국의 구성신학으로서 맥락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도의 신학화’는 그리스도교가 우리의 진정한 그리스도교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신학적인 세례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라는 우리의 기본적인 사유체계를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우리 것 보다 어디까지나 서양 것인 로고스라는 개념에 뿌리를 두는 신학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의 신학이라는 중요한 관문을 통과해야 그리스도교가 단지, 서구 로고스신학의 화분을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린 한국의 그리스도교, 한국의 종교, 동아시아의 종교로 정착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한국에 토착화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인도의 신학자 Preman Niles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아시아와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온 화분 속의 화초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화분을 과감히 깨고 복음의 씨를 우리 땅에 심고, 우리의 맨땅에서 자란, 우리의 나무로 길러져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로고스라는 서양 화분 속에서 길러져서 우리의 도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화분 속 화초 수준을 넘지 못하는 신학이 아니라, 척박할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땅 속에 심겨져 자라난 우리의 그리스도교 나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신학이 되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신학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금년 10월 말에 개최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는 이러한 화두에 대한 시대적 요청의 긴박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한국의 신학인 여러분, 나는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신학공부를 해서 30여 년간 한국인으로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고민해 온 사람입니다. 이런 내게 이렇게 회장으로서 설교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면, 로고스신학과 프랙시스신학, 고전신학과 해방신학, 또는 토착화신학과 민중신학 모두 다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신학적 사명은 진일보하여 그들의 분리에 따른 한계를 극복하고 그들을 통전하여, 그보다 더욱 성서적인 도(hodos)라는 메타포의 해석학적 지평에서 새로운 신학나무를 자라게 해서 꽃을 피워야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로고스나 프랙시스의 신학을 번역하고 번안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좀 틀려도 좋으니까 우리식의 신학을 멋들어지게 하고, 선배들은 후배들이 끼 있는 신학을 하는 것을 밀어주고 기뻐해주고 칭찬해주는 그런 신학이 나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년퇴임을 곧 앞둔 사람으로서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들께 솔직한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한국신학이 서구신학의 아류에 불과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서구신학에 주눅이 들지 말고 그로부터 독립하십시오. 그들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신학을 흉내 내는데 그치거나, 이름 있는 명품 서구 브랜드신학들에 여러분의 신학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조금 부족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의 신학을 자신있게 하십시오. 하루빨리 신학유학생 멘탈리티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서양 신학자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우리의 끼 있는 신학을 끄집어내서 한판 벌려 보십시오. 그래서 신명나고 흥이 나는 신학의 한류를 마음껏 창조하십시오. 삼천년대 그리스도교를 조성하는 신학의 구성은 우리들에 손에 달려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 특별한 사역을 위한 주님의 놀라운 축복과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항상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