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내가 믿는 부활

구원사의 신학에서 본 나의 부활신앙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기독교의 경전(經典)은 그리스인들이 믿는 ‘영혼불멸신앙’과는 구별되는 ‘히브리종교 특유의 신앙전통’을 갖고 있다, 즉 히브리종교의 성서는 ‘영혼의 불멸’은 부인하고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은 믿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히브리 신앙전통을 계승한 기독교의 중심증언은 <①그리스도의 성육(成肉)과 ②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십자가 죽음, 그리고 ③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에 관한 선포>로 요약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신학에서는 ‘케리그마’(κήρυγμα,선포된 복음, 고전 1:21)라고 부른다. 이 신앙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사상과는 대립의 각(角)을 세운 히브리 사상의 특이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의 부활은, 이러한 신(神)의 인간구원역사의 문맥에서 보면, ‘생’의 ‘연장’이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새로운 ‘완성’ 또는 ‘새로운 창조’(갈 6:15)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부활은 우리가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되는 것’(고전 15:52b), 즉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것(사25:8[bĭllă‘]];고전 15:55[νίκος])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사실은 바울의 아테네 아레오바고 법정 설교(행 17:22-31)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반응인, ‘어떤 사람들의 비웃음’이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즉 그리스 사람들은 ‘몸’으로부터 ‘영혼’의 영원한 해방(λυτρώσομαι)을 믿는 반면, 영혼의 죽음과 그것의 새 창조를 통한 ‘변화’(고전 15;52c, ἀλλαγησόμεθαι)는 믿지 않고 비웃었다.
  
그리하여 히브리 신앙전통을 계승한 기독교의 경전자료는 매우 초기부터 즉 구약 창세기의 창조기록 서두에서부터 이미 이러한 ‘생명,’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반전’(反轉)에 관한 믿음(창 2:9b,16-17,J;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두 나무’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심지어 신약의 복음서조차도 “몸(σῶμα)은 죽일지라도 영혼(ψυχή)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모두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 10:28;  cf.눅 12:4-5;  Hebraistic idiom)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 비록 마태와 누가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점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둘 사이에 나타나는 합의점은 ①창조주 하나님의 큰 능력과 그리고 ②흙으로 된 인간의 유한성/무력성사이의 그 근원적 차이(창1:1)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부활>이라는 나의 신앙고백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나의 병약한 일생의 그 “험악한”(창 47:9) 삶은, 거의 전적으로, <히브리 종교> 즉 성서종교가 안고 있는 ‘고난→구원’으로 나아가는 인간구원역사(人間救援歷史)의 그 불연속적 연속의 여정(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의 역사)과 함께 동병상련(同病相憐)하여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제에 관한 논의의 시작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야, <내가 믿는 부활>에 관한 진술과제를, 나의 짧은 지식을 가지고, 이러 저러한 현학적(衒學的)인 ‘농’(弄)과 ‘변’(辨)으로 문제의 본질에서부터 일탈(逸脫)하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형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철학자 모티어 애들러이지만, 이 철학적 물음을 [천문]물리학적 질문에로 본격적으로 옮긴 과학자는 스티븐 호킹(Hawking, S.)으로 보인다.
  
호킹 박사는 아인스타인(Einstein, A. 1879-1955) 이래(以來) 21세기 세계 최고의 천문 물리학자로서 널리 알려진 과학자인데, 그의 잘 알려진 책, 『시간의 역사』라는 책(1988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가 있다. “…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what)인가?’를 기술(記述)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주가 왜(why)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제기할 수 없었다. 반면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들의 직업인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과학이론의 진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 그러나 … 우리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신(神)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한 나의 오해로 인하여, 이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호킹을 나는 ‘유신론자’라고 잘못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시간의 역사』(1988) 이후 22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아주 최근(2010), 이 호킹 박사는 22년 전에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하여 대답이라도 하듯이, 『위대한 설계』(2010년)라는 야심에 찬 책을 출판하고는, 뜻밖에도, 그는 여기서 자신을 무신론자로 선포한 이후, 감히, “신(神)이 우주를 창조하지는 않았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즉 <이 우주는 신(神)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뇌(腦)가 스스로 창조한 그 생명모형이 ‘모형의존 법칙’ (rule of model-dependent)에 따라, 영원히! 새로운 모형을 만들면서, 빅뱅(Big Bang) 이래 지금까지 137억년이라는 세월을, 진화해온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인간 뇌’가 무(無)로부터 자신과 이 우주를 자발적으로 창조해 온 바로 이 우주의 일부인 창조자 자신이었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주 물리학적 무신론 이론은 <무신론 복음의 전도사>로 자처하는 리처드 도킨스(Dawkins, R.)나 데이비드 밀스(Mills, D.) 및 그들의 이론을 따르는 현대 지식인들에게는 <종교 없는 세상이 주는 해방감>을 고무, 격려해주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볼 때, 철학이나 이론신학 분야에서도 물론 문외한이지만, 더욱이, 첨단 천문 물리학 분야에서야말로 더욱 전적으로 문외한인 한 구약학도에 불과한 나로서는 이 엄청난 주제인 <내가 믿는 부활> 문제를 그것도 호킹과 같은 우리시대 최고의 천문물리학자의 야심찬 이론과 연계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무모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감히 이러한 시도를 해본 것은 1987년 2월 23일 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아이언 쉘톤>이라는 한 천문학자가 발견하였었던 바,  <별의 죽음과 새로운 별[超新星]의 생성>에 관한 보도가 준 그 충격과 그 충격을 통한 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즉 저 <별의 대폭발과 자기 해체에 의한 별의 그 죽음>을 통하여! 또한 동시에! 새로운 별 <초신성(超新星)>이 탄생되었다는 그 보도는, 실로, 과학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종교적인 언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태어나야만 죽는 일이 있고, 죽어야만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다는 이 놀라운 물리학적인 현상이 하나의 깨뜨리기 힘든 새로운 교조(敎條)처럼 피부로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나고(출생)-죽고(사멸)-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의 세계요 우리의 역사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던지고 있는 질문, 즉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하여 던진 <왜? Why?>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천문학에서가 아니라, 성서신학의 맥락에서 히브리 성서(구약과 신약)를 통하여 살펴본다면, 아마도,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한 성서신학적인 해명에 의하여 우리의 이슈를 어느 정도는 발전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1. 첫째로 <삶>(태어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 2:7이, 우선, 히브리 경전의 그 고전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야ㅎ웨)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기운(nĭšmăṯ ḥăyyîm/ πνοὴνζωῇς)            을 그의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něpěš ḥăyyāh ‘생명을 가진 존재’/ Ψυχὴν ζῶσαν)        이 되었다.”(창 2:7)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어휘는 ‘사람’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결정적인 정의(定義)인 ‘네페쉬’(BH; něpěš/LXX; ψυχή)라는 단어이다. 히브리어 ‘네페쉬’(BH)와 이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인 ‘푸쉬케’(LXX)는 둘 다 모두 ‘숨’(breath), ‘생명’ (life)을 의미하여, 흔히 사용되는, 신화시적 은유(mytho-poetic metaphor)로서는 ‘영혼’(soul)이라는 말로 흔히 번역되곤 하였으나(시 6:4[5], năpšȋ]), 그러나, 그것을 영혼(soul)이라고 할 때의 그 영혼은 전혀 소크라테스적-플라톤적 불멸의 영혼(靈魂, immortal soul)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언어가 즉, 전적으로 ‘인간 생명체’(physical life)만을 의미하는 그 ‘네페쉬’/‘푸쉬케’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의 플라톤적인 ’불멸의 영[혼]’이라는 개념(cf. Phaedo)으로 동서양을 막론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교리’(doctrine)처럼 굳게 믿어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즉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도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고통스러워하신 죽음>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영혼 해방을 기뻐하는 희열의 죽음>을 더 소원하고 더 존경하면서 예수의 죽음을 비하(卑下)한다는 데에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라면, 물리학적 관점은 그리스적 사유보다는 히브리적인 사유(思惟)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인간 출생의 그 근본 근원을 전적으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에게만 두었다!(야ㅎ웨 하나님=하나님[who]creates, 즉 야ㅎ웨=creator 참조) 이른 바, 구약성서는 창조주와 창조된 피조물 사이를 그 처음부터 끝까지 엄격하게 ‘구별!’하여 왔다(창 1:1). 기이하게도 히브리인들은 아마도 그들 역사의 아주 초기부터 자기들이 믿어 온 조상신,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고난의 용광로’와 같은 이집트 노예살이와 광야유랑 시기만큼 초기부터 이미 ‘야ㅎ웨’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매우 특유한 ‘무리’였다(출 3:14; 6:3; 33:19; 34:6, 등등). 그리하여 이 ‘야ㅎ웨’는, 고대 중동과 그리스의 세계와는 달리, 그 신명(神名)을 고대 중동 제국들의 그 어떠한 종교의식상의 신명(神名) 목록(目錄)에서부터도 끌어오지 않은!, 이른 바, ‘이름 없는 신’(nameless God, 즉 고대 중동의 다른 세계는 전혀 알지 못하는 신[神], cf. 출 5:2; 행 17:23)으로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즉 ‘야ㅎ웨’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구문론(構文論)에서는, 명사가 아니고 사역형(使役形)의 ‘짧은 동사문장’(=He causes to be=He creates)이기 때문이다. 즉 ‘야ㅎ웨’(yăhwĕh)는 본래는 신(神)의 제의신명(祭儀神名)이 아니라! 단지 신(神)의 속성(屬性)을 서술하는 ‘한 단어’로 된 짧은 동사 문장(‘[Dingir] who creates…’)이었던 것이다. 고고학 자료들에 의하면, 그 대표적인 아모리어 서술(敍述)문으로서는 <~을 있게 하시는 [神,엘]>(yahwī-[Il])과 같은 것들이 흔히 발견되었었다. 즉 ‘야훼’는, 본래, ‘그가 ~을 있게 하신다!’라는 ‘부르짖음’이었거나, 아니면, ‘오, 그분!’(O, He!/yā-hû)이라는 짧은 환성(歡聲)이나 신 현현경험(theophany의 체험) 때나 외치는 열광적인 외침(ekstatische Urlaut)과 같은 ‘부르짖음’이었을 것으로도 추론한다. 이러한 ’야ㅎ웨‘라는 이름의 그 범 우주적인(universal) 의미는, 신학적으로(종교사적으로) 볼 때는, 참으로 하나의 큰 놀라움이다! (Nomina sunt realia!) 고대 중동의 저토록 다신론적인 분위기의 세계 속에서도 유독하게 고유명사[祭儀 呼稱]로서의 신명(神名)을 전혀 갖지 않은 신(神) 신앙으로 출발한 그런 민족(출 3:14)이 과연 이스라엘 말고 그 어디에 또 있었던가?(※이것은 타종교 비하[卑下]나 히브리종교의 우월성[優越性]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스라엘의 조상 신(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의 그 하나님)이 곧 다름 아닌 바로 그 ‘야ㅎ웨’라고 하는, 히브리종교의 토착화신학(창 14:22b; 16:13; 출 3:6,13-15; 6:3 등등)의 문맥에서 볼 때, 야ㅎ웨는‘이름 없는 신(神)’이셨고 그리고 이 ‘이름 없는 신’은 곧 형상 없는 신(神) 신앙세계[=제국주의적으로 정치권력을 우상종교화하지는 결단코 않는! 순수 신앙세계]에 대한 하나의 유비(類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야ㅎ웨’는 예배의식(祭儀)에서 이스라엘 신(神)의 고유명사로서 공식적인 신명(神名, cf. YHWH tsǝḇā’ôṯ :He causes His armies to be.)으로 고정되기 이전(以前)에는 그 의미가 단지 ‘그가 [긍휼]을 있게 하신다.’/‘그가 [긍휼]을 창조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문장의 이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지, 창조자라는 개념만을 가졌다고 할 때, 또 이 이름이 구약에서는 오직 창 2:4b-3:24의 창조와 타락 기사에서만! <야ㅎ웨-하나님>(Elohim[who]yahweh)이라는 ‘기이한 두 신명(神名)의 조합(組合)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이름은 <창조하시는 신(神)>(dingir[who]creates)이라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추측 된다. 그 경우, 창 2:4 -3:24의 창조와 타락 기사는 우리의 주제인 <출생-죽음-부활>이라는 주제가 갖고 있는 그 신학적 의미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그 특유의 히브리적인 사유방식으로, 인간과 만유의 <출생>은 전적으로 <창조신>(El who creates)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대답을 해준다고 하겠고, 동시에 구약신학의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인 제2이사야(사 40-55장 기자)와 바벨론 포로기 말의 사제 신학자(P)가 분명하게 증언하였듯이, <창조자 야ㅎ웨는 곧 다름 아닌 구원자 야ㅎ웨이시다>라는 흔들릴 수 없는 신학적 확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창세기 기자들(J&P)의 인간학에 따르면, 창조주 야훼께서 창조하신 ‘인간’ (’āḏām)은 흙(‘āpār mĭn-hā‘āḏāmāh: 땅의 먼지)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네페쉬’/‘푸쉬케’)일 뿐이라는 것, 즉, 불멸의 영혼(immortal soul)이 아닌, 단순한 하나의 ‘생명체’(living creature)라는 것,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주어진 일생을 다 산 후에는 단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유한한 사멸적 생명체>로서 창조되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됨을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운명은 이미 ‘땅의 먼지인 흙’(창 2:7)으로 돌아가는 것(창 3:19)으로서 창조 때부터(창 2:7)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멸적인 그 흙의 조형물(造形物)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生氣: nĭšmăṯ ḥăyyîm)을 불어넣으시니까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nĕpĕš ḥăyyāh)가 되었으니까, 인간 피조물의 생사(生死)란 전적으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신 창조자에게만 달려있다는 성서의 증언(신 32:39; 삼상 2:6; 사 45:6-7!!)을 겸허하게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즉 히브리적인 사유(思惟)는 근본적으로 인간존재를 가리켜 <신적(神的)인 불멸의 영혼을 자신 속에 품고 사는 존재>라고 하는 저 그리스적인 이원론적 인간이해(‘人間=몸+神/靈’이라는 이원론적인 이해)로부터는 벗어나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사유(思惟)라고 하겠다. 주목할 만 하게도 구약종교는 그 처음부터 비(非)전투적이고 평화적인 ‘엘’(하늘님?)과는 지속적인 일치를 이루어왔으나, 그러나, ‘바알’(제국주의적 fertility cult와 반윤리적인 sex-cult의 神)과는 언제나 투쟁적이었다. 왜냐하면 히브리적인 사유(思惟)에서는 신(神)과 인간은 결코 혼동되지 않고 엄격히 차별되기 때문이다(창 1:1). 특히 왕국 분열 후 초기, 기원 전 9세기의 엘리야의 예언운동에서는 야훼 신의 가시화(可視化/形象化)는 매우 투쟁적으로!! 거부되었다(cf. 왕상 18:21-40). 그리하여 야훼 신(神)은 본질상 철저히 ‘자신을 감추시는 신’(Deus absconditus)이셨다.(사 45:15. cf. 출 33:18-23) 그럼에도 히브리적인 신앙세계에서는 신(神)은 ①역사를 통하여(출 33:20,22-23에 나타난 하나님의 ‘등’[back=history!!] 은유[metaphor]를 통하여), ②자연을 통하여(시 19A) 그리고 ③마침내는 말씀을 통하여(시 19B; 신 4; 요 1: 14)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희망은 오직 단지! 전혀 전적으로! 오직 ‘야훼’일 뿐!!(cf. 시 130:5-6; 사 49:15)이라고 하겠다.

2. 그러므로 두 번째 주제로서는, ‘죽음’의 본질(本質) 문제를 우리는 불가피하게 다룰 수밖에 없게 된다. <죽음>은 무엇이고 <왜 인간은 반드시 누구든 죽어야만 하는가?> <왜 피조물은 창조주의 품 안인데도 죽는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절대적 신비의 보자기에 싸여 있는 이 절대적 세력인 ‘죽음’이라는 것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죽음은 과연! 단지 인간 최초의 타락(原罪) 때문에, 바로 그 한순간에!?, 사멸적 존재로 떨어진 그런 성격의 것인가? 즉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유전성을 지닌 원죄(原罪:)의 절대적 위력 때문에 ‘갑자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멸(死滅)의 운명적인 존재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그런 것인가?>라고 우리는 묻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본래 창조될 때는, 불사불멸(不死不滅)의 결코 죽지 않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첫 인간의 그 첫 범죄(타락/원죄) 때문에 그 순간! 누구나 반드시 죽어야 하는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갖게 된 것이라는 그런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 경우, 아인슈타인이 한 말, “나는 자신이 창조한 대상에게 보응하고 벌주는 신(神)은 상상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은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하기를, <그게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히브리 종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는 인간창조 기사(창 2-3장)를 통하여 원죄교리(原罪敎理), 즉 죄의 기원(起源) 문제를 제기하거나 또는 ‘죽음’을 ‘원죄’(아담의 타락) 때문에 모든 인류가 즉각 거역할 수 없는 숙명으로 그리고 ‘생물학적 유전’으로 ‘죽음’을 물려받게 되었다고는 결코, 결단코 말하지 않는다. 즉 현대 성서주석들은 인간원죄이론은 명백한<성서해석학적 오류>로 본다.
  
이러한 원죄의 유전성과 그 원죄의 숙명적 결과로 보는 재래(在來)의 죽음이론을 (=‘죽음’에 대한 성서해석학적 오류를) 유발케 한 성서 기록들 중 그 대표적인 본문을 든다면 다음 두 곳의 본문을 들겠는데, 그 하나는① 구약 창 2:17과 3:19이고 그 다른 하나는② 신약 롬 5:12이다.
  
(1)구약 창 2:17과 3:19가 언급한 ‘죽음’은 둘 다 모두, 분명, ‘신의 뜻’(神意)에 대한 반역을 막으려는 하나의 ‘예언자적 경고’로 주신 말씀일 뿐, 그 무슨, 인간 본질이 본래는 ‘불사’(不死)의 존재로 창조되었었는데, 타락의 그 순간에 즉각 ‘숙명적 유전요소’가 인간에게 들어왔다고 해석하는 그런 비평학적 구약학자는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죽음’의 본질은, 성서기자에게 있어서는(J+P) 본질상,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은 아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오해를 불러온 진원지(震源地)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의 성구인 창세기 3:19에 대한 주석은 이 경우 더욱 분명하게 주석)되어야할 것이다. 그 본문은 다음과 같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ăḏ),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낱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까(kȋ),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새번역)
               
이 본문은, 흔히 말하는, 인류의 타락기사로서 잘 알려진 창세기 3장 기사의 절정(絶頂)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타락한 인류를 향하여 신(神)이 신문(訊問) 끝에 최종적으로 내린 그 심판의 말씀은 과연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알기 쉽게, 여기서 말하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란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懲罰)이고, 이 징벌의 순간, 즉 불멸(不滅)의 신적(神的)인 인간(immortal soul)에 대한 신의 징벌의 그 순간, 곧! 인간은 숙명적인 성격의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사멸적 존재(mortal soul)가 되었다고 흔히들 믿어왔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사자(死者)의 혼(魂)의 구원(救援)>이라는 민간신앙과의 사이에서 대단한 혼선이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 기독교 교회들의 영결예배(永訣禮拜) 설교와 부활절 예배 설교에서는, 예외 없이, 부활신앙이 그 근간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플라톤적 영혼불멸신앙이나 그와 유사한 ‘신영지주의적인 [이원론]신앙(新靈知主義的 [二元論]信仰)이 그 근간을 이루는 반(反)부활신앙을 전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우선 먼저 풀어야 할 문제는, 적어도 성서신학에서는, 창세기 3:19절에 나타난 그 ‘죽음’의 선포를 인간타락(=원죄)에 대한 숙명적/유전적 징벌선포로 보느냐? 라고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성서 해석자들은, 교리신학자들과는 다르게!, 그러한 ‘죽음’해석논리에 대하여는 여전히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그 이후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줄곧 말해 온 그 ‘원죄→죽음의 유전’이라는 이론들은 여전히 그 교리논리의 틀에서는 별로 벗어나지 못하여왔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래의 비평학적 성서해석학이론과 자연과학이론은 이러한 기독교 전래의 ‘원죄의 유전’이라는 입장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니다!!”라고 일관된 응답을 보여 왔다. 그렇다. 창세기 3:19에 의하면, 인간의 반역에 대한 신의 징벌은 <흙에서 와서 흙에로 돌아갈 그 때까지(until, ‘ăd)만!, 시간상 그 때까지만, 그 축복받았었던 인간의 ‘노동’(勞動)이 땅에 대한 신(神)의 저주(창 3:17b)로 인하여 인간은 코에 땀을 흘리는 수고의 고통을 필연적으로 겪게 된 것>이라는 것, 그것일 뿐! 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히브리어 전치사 “‘ăḏ(까지)”와 접속사 “kȋ(때문에)”가 지닌 주석상의(rhetoric usage의) 주요기능을 전통적 교리주의자들이 무시하고 놓쳤다는 데 그 문제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신의 형벌은 단지 흙으로 된 인간이 그 주어진 ‘한평생을 사는 동안’까지만! 받아야 할 인간노동의 고통이고 그리고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죽음)의 그 이유(kȋ)는 인간의 구성본질이 단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을 명확히 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특히 시편 90:1-3의 시인이 말하기를 “[태초에]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직접적인 이유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 그것들 중 신학적으로 중요한 점 몇 가지만 제시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사적(救援史的) 활동 면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해낼 수 있을 것이다.     
              
①우선 문자적 논리로 보면, 창 2:17에서 하나님께서는 강한 어조로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즉시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자녀들을 낳으며 무려 800년을 더 살았고 총 향년 930세를 다 누리고 죽었다고 성서가 기록하였으니 창 2:17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이 경고는 본래부터 결정론적인 것이기 보다는 예언문학적인 경고 성격의 것임이 분명하다.
 
②그 다음으로는 타락한 아담과 그의 아내에 대한 징벌선포 후, 그들을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하실 때의 야훼 하나님이 취하신 인간에 대한 후속 조치들은, 놀랍게도!, <증오의 심판>이라고 보기에는 일반 상식으로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창조주의 ‘모성적인’ 모습!, 이른 바, 구원사적인 자애(慈愛/矜恤)의 모습만! 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뱀’에게는 즉각 저주를 내리신 것(창 3:14)과는 전혀 다르게 ⓐ타락의 책임이 남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 그 ‘아담의 아내’에게는 너무나 큰 영광스런 이름인 ‘하와’ (ḥăwwāh=生命)라는 이름을 [그녀의 남편을 통해서] 부여하신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창 3:20b에서 성서기자(J)가 “그녀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창 3:20)라고 한 말씀을 또한 그 예(例)로서 지적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20세기 세계 성서고고학계와 고대 중동 언어학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올브라이트(Albright, W.F.) 교수가 ‘하와’(ḥāwwāh=생명)라는 이름이 ‘야ㅎ웨’라는 신명(神名)의 어근(語根, an archaic root of YHWH)일 가능성까지 말할 정도의 그런 ‘광영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성서 문맥상 무엇을 말하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자가 갖는 그 본래의 본질상, 그가 지으신 자녀들인 인간이 죄로 떨어지고 또 그 죄 속에서 멸망하기를 결코(never, never, never!)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잉태와 해산을 통하여 이 세상에 ‘있게 하신’(who caused to be) 창조자[母性]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본질’로의 회복)만을 정말, 진실로 정말, 바라신다는 것, 그것은, 실로, 창조자 하나님의 ‘구원사적 긍휼의지’가 어떤 것인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은 낙원에서부터 축출을 당하는 아담과 하와에게는, 뱀에 대한 저주와는 구별되게, 오히려 가죽옷을 친히 지어 입혀 주셨다는 것(창 3:21)도 또한 바로 그 창조신[母性 神]의 <구원사적 의지의 문맥>에서 읽을 수 있으며, ⓒ더욱 역설적(逆說的)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에서 축출하신 후에도,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빙빙 도는 불 칼로서 지키게 하셨다(창 3:24)는 것도 또한 역설적으로는 창조주께서 아직은 이 타락한 인간과 영원히 결별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 즉 회개하고 돌아 올 것에 대한 기대와 연민을 증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창조주의 구원사적 의지의 절정(絶頂)을, 성서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 메시아의 대속(代贖)적인 죽음>(이사야 53:4-12→사도행전 8:34-35)에서 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成肉)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그 그리스도 사건>은 태초의 알파로부터 구원사적 완성으로서의 오메가에 이르는 구원역사의 그 ‘중간점’(the mid-point)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서 전체의 구원사적 맥락에서 볼 때,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원죄의 불가역적인 생물학적 유전으로 부여된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겠다.
  
(2)이러한 성서해석학적 오해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른 바, 저 유명한 신약의 사도 바울의 글인 로마서 5:12와 그 이하의 말씀(Cf. 롬 5:12-21; 고전 15:35-58, 등등)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를 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본문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罪)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死亡]이 들어 온 것(εἰσῆλθεν, came into)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διῆλθεν, spread to).”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사용된 ‘퍼지게 되었다’(διῆλθεν)라는 말에서 볼 때, ‘유전(遺傳) 보다는 오히려 전염(傳染)!!’ [εἰσῆλΘεν 보다는 διῆλΘεν]이라는 개념 적용이 더 올바른 해석이라고 하겠다. 구약성서의 문맥에서도(J) 이 해석이 옳아 보인다. 예컨대, 창 4:7b(J문서)에서 야훼께서는 인류사 최초의 형제 살인자 가인을 향하여 “죄가 너의 [양심의] 문(門) 앞에서 [맹수처럼]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tĭmŝŏl-bȏ).”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좋은 예다. 죄는 처음부터 ‘유전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전염성’을 지닌 것으로서,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와 관련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신학적 ‘역설’(逆說)을 인지하게 된다. 즉 <죄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전염적인 것이고, 이와 역(逆)으로, 또 ‘죽음’은 인간의 자유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의 명령’에 속한 운명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문제의 성서본문, 창세기 3:19a,c에 나타나는 수사 접속사kȋ(‘왜냐하면’을 의미하는 kȋ)가 해석학적 기능의 중요성을 밝혀주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비록 ‘죽음’은 죄를 통하여 온 것, 즉 비록 ‘죽음’은 인간의 범죄에 대한 신의 진노의 사인(sign)으로서의 ‘신의 명령’(divine command)이라고는 말하지만, 그래서 창세기 3:19의 문맥은 비록 인간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진노의] 반응이라고는 해도, 창세기 2-3장 전체의 문맥과 창 3:19의 히브리어 구문론(構文論)에서는, 여기서의 신의 징계는, 분명, 신(神)의 구원사적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하고 또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계는, 어디까지나,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까지의(히브리어 ‘ǎḏ의 주요 기능 참조) 그 ‘노동의 고통’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죽음’은 타락 이전의 ‘불멸’에서부터 원죄 직후의 ‘유전적 사멸에로의 급전(急轉)현상’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흙으로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흙의 유한한 본질’로서 정하여주신 바, 신의 명령에 따른 것, 그것일 뿐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시고 죽이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이렇게 하여, 창세기 3:19에 대하여 내가 내린 본문 주석적 결론은 그러므로 이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신의 명령이며, 그러므로 흙에서 온 인간에겐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신의 아들’조차도 사람으로 오시면 ‘죽게’ 되어 있다(고전 15:28). 몸을 가진 인간은, 그러므로, 교조적 위선이 아니고서는, 소크라테스처럼 죽을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고전 15:19)? 로마서 5:12-21이 던진 문제는, 그러므로, 아담-예수 동형[同型] 이론적 해석방법(typology)으로서 해석하는 것이, 성서의 문맥에서는, 최선으로 보인다. 즉 고린도 전서 15:22에서 말한 것처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만 우리로서는 말할 수밖에 없다.

3. 따라서 우리의 세 번째 주제 즉 우리 주제의 결론은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한 해결만 남게 된다. 즉 <부활>의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위의 논지를 근거로 하면, 결코 모호하지 않고 매우 명료하다. 즉 창세기 2-3장을 [더 나아가 성서 전체를] ‘구원사적으로’ 읽는다면!!, ‘부활’은 잃어버린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물론, 그 부활 역시! 결코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영혼의 해방’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몸의] 변화’(고전 15:3,13,14,15,16,20,)를 가리킨다(갈 6:15). 사도 바울이 말한 ‘신령한 몸’(고전 15:44)도 또한, <바울의 소명설화>(행 9;1-19a)가 가진 표현이 시사(示唆)하듯이,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헬레니즘의 사유(思惟)로가 아니라 헤브라이즘의 사유(思惟)로 풀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아담-예수 동형 이론(고전 15;20-26)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든 인간의 부활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최상의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ἀπαρχή; 고전 15:20,23; cf. πρωτότοκος; 골 1:18; 계 1:5)!!라고 증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객관적 또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이냐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가의 ‘빈 무덤 기사’(막 16:1=8; cf. 마 28:1-10; 눅 24:1-12; 요 20:1-10) 때문인가? 물론, 네 복음서들은 모두 마가복음 16:6(에겔데 [ἠγερθη]←에게이로[ἐγείρω])을 출발점으로 하여 마태 28:6,7(ἠγερθη) 눅 24:7(아나스테나이[ἀναστῆναι]); 요 20:9(ἀναστῆναι) 등에서 분명히 이 빈 무덤 기사를 통한 예수의 부활을, 다소 상이하게나마, 한 목소리로 증언하고 있다. 특히, 거기에서 매우 주목해보아야 할 신학적인 공통된 관점인, 이른 바, 히브리 경전의 ‘특유한’ 부활신앙을 여기서도 또한 발견할 수 있다는 그 점이 중요하다! 즉 신약성서의 초기 부활 증언, 즉 바울의 고린도 전서 15장 3-4, 14-15와 그것을 뒤이은 것으로 보이는 사 복음서(四 福音書)의 부활 증언이 모두!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일어나셨다!’(Jesus has [a]risen!) 즉 예수를 주어로 하고 그리고 동사는 자동사(自動詞)로는 되어있지 않고! 모든 부활기술이 (코이네)그리스어로는, 한국어 번역[영어번역 및 기타 대부분의 번역본들]과는 전혀 달리!, ‘예수’라는 고유명사 주어(主語)가 빠진 불특정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고 그리고 ‘일어난다.’는 동사는 자동사(自動詞)가 아닌 타동사(他動詞) 과거형(aorist) 또는 과거형 타동사(他動詞)의 수동형(受動形) 동사문장을 사용하여, ‘그가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으셨다’(He has been raised!) 또는 ‘그 어떤 분이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 라고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놀랍다!!! 분명코, 여기서 성서기자들(바울과 복음서 기자들)은 <인류 구원의 주(主)요 세계 창조의 주(主)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아담 안에서) 모든 죽은 자들(잠자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라고 하는 신앙, 즉 아테네인들과는 매우 ‘다른’! 히브리 신학적 확신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 바, 홀로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시는 그분께서! 또한 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수 있으셨고 모든 인류도 또한 죽음에서 일으키실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라 하겠다. 즉 바울과 그리고 그의 신앙전통을 이은 복음서 기자들의 부활신앙이 바로 이러한 히브리적인 구원사신학적 신앙전통에 서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성서가 말하는 바,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부활)>에 관한 이상의 증언은, 드디어는, <왜 우리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라는 우리 존재에 대한 그 근본적 물음에 대하여 하나의 진솔한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이런 주장이 비록 ‘무신론 선교사들’로부터는 신랄한 비판에 직면케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창조자 하나님’(=야훼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우선적으로 고집한다. 물론, 나는 여기서 창조자 하나님의 실재를 그가 이 우주법칙의 ‘지적 설계자’(Intelligent Designer)라는 입장에서 논증하려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 섭리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신앙을 증언하고 있고 그 증언에 의거하여 우리에게 신의 뜻에 복종하며 살기를 요구하는 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신(호 데오스 호스 에게이렌 톤 크리스톤,ὁ θεός ὅς ἤγειρεν τὸν Χριστόν 고전 15:15c),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주신(ἤγειρεν) 것처럼, 우리도 또한 죽음에서 일으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사도신경 마지막 두 항목 믿음)을 고백하면서 나는 나의 부활신앙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소개함으로 나의 신앙고백을 마칠까 한다.
  
⑴우선,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확실한 과학적 증거로는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동시에,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어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도 또한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불확실한 기억으로나마 나의 어린 시절과 그 험악한(창 47:9) 과거의 삶이 불연속적 연속성을 띄며 구체적으로 내 뇌리 안에서 떠오르고 있음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구약성서 오경 기사 도처에서(passim)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야훼]”(출 3:6→출 4:5)이라는 공식어투들(formulae)이 보여주고 있듯이, 그렇게, 나 역시 인류 구원사의 흐름(불연속적 연속) 속에 역사의 주’께서 실재하셨음을 늘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의 하나님, 루터나 칼빈의 하나님, 김이곤의 하나님, 등등의 지속적이고도 역사의 주에 대한 신앙체험과 그 고백 속에 나타나는 구원사적 ‘역사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①낳으시고! 우리를 ②죽이시고!! 그리고 또 우리를 ③다시 창조하실! 그분, 그가 부활의 주 야훼 하나님>(마 22:32; 막 12:26; 눅 20:38)이시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이러한 ‘그분’의 본질에 대한 풀 수 없는 최대의 비밀이 하나 남게 되는데, 그것은 그분은 언제나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시라는 사실(Deus absconditus)이다. 무신론자들의 결정적인 약점도 또한, 바로 여기, 신(神)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그 전 운명을 건다는 그 점이다. 놀라운 것은, 중동세계의 그 어떤 나라들과 그 어떤 종교들도 말하지 못하였던 사실, 즉 ‘야훼 하나님(=창조자 하나님)의 본질은 불 가시(不 可視)하고 스스로 자신을 감추시는 신(Deus absconditus)으로서, <이름[祭儀名]이 없는 신[nameless God]>이시라는 사실’을 구약과 신약의 히브리 종교가 고유하게 말하여왔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의 출향 이래 거의 천여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무릎을 크게 치면서 뒤늦게 신학적으로 깨닫고 정립한 저 성서 최대의 신학자들은 다름 아닌 기원전 6세기의 익명의 예언자 ①제2이사야와 ②사제 신학자(P)였다. 그들은 결코 모호하지 않게 “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5:15)라고 그리고 <하나님 그분은 결코 그 본체는 볼 수 없는 분이시고 그 ‘등’(back)만 보이신다.>(출 33:23, P)라고 증언하였다. 실로, 이 각성은 이스라엘 신학의 위대한 신학적 승리를 보여준 각성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각성을 세계주의적으로 이론화하고 집대성한 익명의 예언자인 저 제2이사야(사 40-55장을 기록하여 남긴 익명의 예언자)를 가리켜, 마르틴 부버(M. Buber)는 ‘세계사 신학의 창시자’ 또는 ‘이스라엘의 가장 깊이 있는 사상가’라고 높이 평가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야훼 하나님은 본질상 ‘등’(back=God’s self-revelation: ⓐ자연, ⓑ역사 그리고 ⓒ말씀을 통한 자기계시)만 보이시고(출 33:23; 34:6), 지식인들로 하여금 ‘무신론의 덫’에 쉽게 걸리도록, 철저히 ‘자신을 숨기기만 하시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그들(제2이사야와 P기자)의 모범적인 대답은 이사야 44:24; 45:7,15와 창세기 1:1에서 들을 수 있다. 즉 구원역사는 창조역사요 그리고 구원자는 또한 창조자라는 그것이다. 무신론 선교사들(atheist propagandists)은 바로 이 중요한 사실의 의미를 놓친 자들이고 또한 신앙적으로 체험치 못한 자들이라고 하겠다.
  
⑵그 다음으로 히브리 경전에 대한 비평적 주석을 통해서 또 하나 새롭게 각성한 점은 ‘죽음’(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죄의 유전적 인과(因果)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단지 ‘신의 명령’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창조법칙이며 그 창조역사는 곧 또한 인간 구원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찬양할 것도 아니고 죄의 인과(因果)라고 탄식하며 정죄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결코 찬양할 것도 아니고 동경[憧憬]할 것도 아니다. ‘죽음’은,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만 있다면(갈 6:15), 그것은 단지 불연속의 연속이라는 야ㅎ웨 하나님의 구원사적 시간의 선상에 있는 한 ‘중간점’일 뿐이다.
  
⑶따라서 마지막 나머지의 문제는 <죽음 이후=부활 세계>에 대한 성서의 증언을 해석학적으로 밝히는 문제라고 하겠다. 즉 예수의 <빈 무덤 전승>과 그리고 모세나 예언자 엘리야의 경우처럼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다! 는 전승>, 그리고 에녹의 경우처럼 <죽음을 경험치 않고 ‘죽음 너머’(beyond)로 옮겨진(lāqăḥ ‘ōṯȏ ’ĕlōhȋm) 자에 대한 전승>을 해석하는 일이다. 이러한 세 가지 전승에도 또한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모든 전승들 속에 나타난 사건들의 주체(=主語)가 모두 ‘야훼’(神)!! 이시라는 사실이다. 성육(成肉)한 인자(人子) 예수/모세/엘리야/에녹은 신(神)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분들이 아니고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 보내신 분(Sender)께서 일으키셔서!!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셨으므로 그분들도 그분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셨을 뿐이다. 우리 역시도 모두 그럴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성육(成肉)하신 예수님만이, 메시아 비밀을 열어 보이신 후부터는(마 16:21f.; 막 8:30f.; 눅 9:21f.; 요한복음은 그 처음부터!)!, 자기를 보내신 그분에게로 돌아가실 준비를 지속적으로 하셨고, 동시에, 분명한 유언(遺言, testament)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마 28:16-20; 막 16:15-18; 눅: 24:26-27; 요 14장). 즉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요 14장에서 발췌) 라고 하셨고 또 시편 90편 시인도 “주님,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居處; mā‘ôn, 우[집宇]주[집宙])이십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우주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만이 신[神:’ēl]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죽을 인생들아, [나의 거처로: 나의 宇宙로] 돌아오너라![돌아가거라].’ 하셨다.”(시 90:1-3)라고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으신 그분은, 확신하건데, 우리의 아버지/어머니로서, “[아직도]먼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 탕자 같은 우리를 측은히 여기셔서(엘 라훔[긍휼의 神] 께서 가슴이 저리셔서, 출 34:6) [벗은 발로] 달려와 우리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어주실 것이다.”(눅 15:20)

※이 글은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 4월 25일 경동교회에서 열린 제1회 경동여해강좌에서 ‘내가 믿는 부활’이란 주제로 행한 부활절 특강 전문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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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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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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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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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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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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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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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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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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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