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천 기장신학연구소 소장 ⓒ베리타스 DB |
극과 극의 상통함을 종교의 차원에서 실감나게 갈파한 신학자가 라인홀드 니버이다. 니버는 원래 군소교단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독일복음교회 목사였다. 교인의 대부분이 독일계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작은 교단에 속한 목회자였기 때문에, 그는 목회 초기부터 다른 교파, 다른 종파의 목회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데 익숙해졌다.
니버에게서 에큐메니칼 정신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목회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에큐메니칼이란 현실적으로 다른 몸체(a church)에 속해있지만,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활동함으로써 큰 몸(the Church)을 이루는 것이었다. 에큐메니칼 정신에서 서로 하나 됨은 서로 다른 몸체가 충분히 다름을 유지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니버는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구성을 위한 연구 모임에 참석해서, 인간 집단의 속성을 논하면서 아직 본격적으로 출현하지도 않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제도화된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제도화된 기구가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필연적으로 교회 현장으로부터 소원해지게 되고, 점차 뿌리 뽑힌 나무처럼 시들어버릴 위험을 자초하게 될 것을 예견한 것이다.
니버는 목회 경험을 통해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탁월한 현실 분석과 해결방안 모색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회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참여정신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방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잊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니버의 비판은 주로 고위 성직자들의 주장과 관계가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글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오만」이다. 니버는 제이차 세계대전 직전, 스페인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영국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의 발언에 주목한다. 추기경은 전쟁 중에 교회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장차 받아야 할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세계 언론이 표기하는 ‘정부군’을 ‘폭도’로, ‘반군(파시스트 군대)’을 ‘그리스도의 군대’로 바꾸어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버는 성직자의 고난을 십자가의 고난에, 그리고 교회가 지지하는 정치적 변화를 그리스도의 예언과 약속에 일치시키는 추기경의 논지에 대해서 ‘영적 오만의 최악의 형태’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어떻게 스페인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패한 봉건세력과 결탁해온 추악한 관계에 대해서는 한 마디 참회의 언급도 없이, 교회가 지지하는 세력은 ‘그리스도의 군대’요, 반대 세력은 ‘폭도’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니버의 통찰에 의하면 역설적이게도 ‘교만(pride)의 극한적인 형태는 언제나 종교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때로 교회는 ‘인간의 목적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목적과 일치시키는 영적 오만(arrogance)의 죄’를 범하는 실체가 되곤 한다. 니버는 스페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행태를 관찰해보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적인 행위에 주저함 없이 참여하면서도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규정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교회로 하여금 상대적 가치를 절대적 가치와 혼동하는 유혹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의로움’으로 포장된 교회는 인간의 자기기만과 위선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의 위선을 극복하려는 마지막 시도가 종교인 것처럼, 가장 악한 위선의 모습 또한 항상 종교적으로 표현된다. 니버는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 땅에 이루는 일은 교회가 겪어야만 하는 영원한 전쟁이다. 만일 누군가(교회)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다면, 그 오만한 확신은 그가 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뿐이다.
니버가 주목하는 교회의 또 다른 오만은 ‘자기중심성’이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교황의 사도권 문제를 지적한다. 교황은 베드로로부터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이어 받는다. 그리스도와 베드로 사이에는 신비롭고 분명한 실제 결속이 맺어졌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졌다고 본다. 베드로는 로마 교회의 첫 주교(교황)가 되고, 첫 주교와 지금의 주교 사이에는 신비하고 초월적인 유대가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니버는 만일 이러한 로마 교회의 자기중심적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는 가능하지 않음을 직시한다.
니버는 교회의 정당성의 우선적인 근거는 전통이 아니라 복음에 있다고 한다. 복음의 진리성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의 심오한 깊이에 있다. 복음의 진리성이 어떤 특정 권위에 의해 해석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파괴하고 만다. 복음의 단편적인 증거들은 전체적인 말씀의 틀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복음 전체를 단편적인 내용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적 권위의 오만일 뿐이다.
1992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가 출간되었다. 이 『교리 문답서』의 준비 위원회는 교황(요한 바오로 2세)이 임명한 열 두 명의 추기경과 주교로 이루어졌는데, 그 책임자는 1981년부터 교리청 장관으로 있던 라칭거(Joseph Ratzinger) 추기경이었다. 라칭거는 현재 교황 베네딕트 16세이다. 미국에서는 이 『교리 문답서』를 기초로 삼아서, 1994년에 신판 『가톨릭 교리서』가 출간되었다. 이 교리서에서 ‘교회’ 부분을 보면, ‘교회에 대한 정의’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그리고 동방 교회 등, 모든 기독교를 포괄한다. 비록 명사로 쓰면 ‘교회’는 단수이지만, 동시에 항상 복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나의 ‘보편 교회(the Church)'가 있고, 여러 '지역교회(the churches)'가 있다. 그렇지만 모든 교회가 다 위에서 언급한 교회에 대한 정의에서 제시된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교리서는 교회를 이루는 신학적, 목회적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중에 첫째는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례/성사(sacraments)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교리서에서 성사에 관한 해설을 찾아보면, 성사는 교회가 규정한 일곱 성사를 말하며, 교회의 본래성과 사명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여기서 교리서가 언급하는 ‘모든 교회가 다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는 표현을 ‘성사론’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교회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두 참된 교회인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됨의 기준으로 정한 성사(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다섯 성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참된 교회일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일곱 성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만찬, 세례, 그리고 참회(근본 의미는 세례와 같다고 봄)에 대해 언급한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대한 대안」에서, 공의회가 결정한 일곱 성사는 성서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추기경 사돌레의 편지에 답하는 글」에서는 성례의 개혁에 대해 설명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시도했던 모든 일은 결국 ‘더럽혀진 상태로부터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성례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사론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의 초점은 교회의 전통이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앞설 수 없다는데 있다. 교권이 아무리 주장한다 하더라도, 참된 교회는 전통에 기초한 교회가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라는 것이다.
전통의 오만이 오만의 전통을 낳는다. 권력은 오만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닌다. 말씀의 빛에서 전통을 해석하기보다, 전통의 관점에서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전통이 고착되면 말씀의 능력이 사라지고 만다. 교회는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이 살아 꿈틀대는 세상적인 기구가 되고 만다.
자랑스러운 전통을 지닌 집단일수록 그 전통이 부끄러운 전통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세상에서 극과 극은 너무 쉽게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