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첫째 트뢸치에 의하면 교회형 교회는 오랜 전통과 확고한 교리적 체계와 성직 계급적 제도를 갖고 있다. 이 형태의 교회들은 대체로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세계 긍정적이며, 대중을 교화하려는 보편적 이상을 갖고 세상과 문화를 지배하려고 한다. 따라서 교회형은 개방적이며 공공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국가를 신이 제정한 신적 질서로 간주하여 자신들과 협력할 파트너로 인정한다. 예를 들면 독일의 경우 공교회로서 가톨릭교회와 더불어 개신교회들 가운데 소위 지방교회들(Landeskirche)을 구성하는 루터교회나 개혁(장로)교회 등이 교회형 교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 이후 각 지역을 통치하던 영주에 의해서 공인된 교회들로서 영주를 교회의 수장으로 하여 발전된 교회들이다. 이들 지방교회들은 1918년 지방영주들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이 만든 헌법(제도)에 의해서 운영되는데 이들 지방교회는 국가교회는 아니지만 국가에 의해서 공적으로 거둔 종교세를 통해서 운영되며 공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한다.
둘째 종파형 교회들은 개개인의 자발적이고 인격적 연대관계에서 구성되는 적은 소집단들로서 신자들의 재정적 지원을 통해서 운영된다. 이들 종파적 집단들은 대체로 특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그에게 충성과 헌신을 바친다. 따라서 이들은 소수의 선택된 개인들의 은밀한 조직으로서 대체로 세계 부정적이며 반문화적이고 타계적 신앙을 갖는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교회를 부정하고 피안적 세계를 대망한다. 그런데 유럽의 경우 종파적 교회들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은 종교개혁 전후 등장했던 이른바 종교개혁 좌파교회들, 예를 들면 보헤미아에서 시작된 모라비안들, 영국에서 생긴 퀘이커, 스위스에서 시작된 재세례파,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메노나이트, 프랑스 개신교인 위그노파, 이탈리아에서 생긴 왈도파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에 출현한 감리교회나 침례교회 등을 종파적 교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종교세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개인들의 헌금으로 운영되며 공립학교들에서 종교교육을 할 수도 없다. 따라서 종파형은 세계(국가)에 대해서 다소간 부정적 배타적 성격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다수는 종파성을 벗어나 교회형 교회들로 발전하고 있기도 하다.
셋째 신비주의 형은 종파형 교회와 대동소이하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교회형 교회가 전통, 제의, 교리체계, 위계적 제도를 중시하고 종파형은 개인들의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와 개인들 간의 직접적 관계를 중시하는 반면에 신비주의 형 교회는 신자들 개개인과 신과의 일치의 경험, 직접적 신비체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종파형 교회와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선교초기에 들어온 가톨릭교회나 성공회 등 교회형 교회들과 미국에서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교회형으로 발전한 개신교회들에 의해서 선교되었기 때문에 다분히 교회형의 교회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한국에 선교된 개신교회들은 대부분 교회형 교회들로서 확고한 전통과 교리체계 그리고 성직의 계급적 제도를 갖고 세계 긍정적이며, 대중을 교화하려는 보편적 이상을 갖고 세계와 문화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이러한 교회형 교회들은 치유적 선교사업(Healing Ministry)으로서 교육사업, 의료사업 그리고 사회복지사업 등을 설립하여 대중을 교화하고 질병을 치료하며 나아가서 고통 받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 즉 공공성을 띤 일에 집중하게 된다. 동시에 일부 의식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서 역동적 선교 사업(Dynamic Ministry)으로서 민족의 독립운동과 근대적 민족국가형성에 기여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에서 새로 태어나거나 우후죽순처럼 마구 도입된 교파들 예를 들면 박태선교나 문선명의 통일교회 그리고 순복음교회 등 전형적인 종파형의 교회들이 한국 개신교의 지형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 가운데 박태선교는 교회로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소멸상태에 있고 문선명의 통일교는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그리고 종교보다는 기업확장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론과 다단계판매회사의 제자훈련 방법 통해서 등장한 순복음교회는 그 종파성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생태적으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종파형 개신교회들은 1950년대 한국전쟁이후 거듭되는 분열을 통해서 종파적 색채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51년도의 기장과 예장의 성서해석상의 차이에 의한 분열을, 1956년 예장통합과 예장합동 사이의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을 둘러싼 분열을 필두로 해서 장로교회는 현재 그 계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100여개로 분열되었다. 해방 후 50년대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는 달리 호헌파, 성화파, 정동파 등으로 갈라져서 순전히 교회권력 투쟁을 했고 70년대에는 교회 갱신의 기치를 든 갱신파 등이 등장해서 세력 다툼을 벌렸었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교회형 교회들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분열과 세력 다툼을 하면서 그들의 도덕적 사회적 신뢰성은 땅에 떨어지고 따라서 복음전도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1970년대 산업화와 더불어 시작된 도시화(Urbanization)와 더불어 급성장하기 시작한 종파형 교회들, 특히 순복음 교회 등의 도전을 받은 전통적 교회형 교회들이 그들의 선교방식과 전략을 모방하면서 점차 종파형 교회들로 변용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때 교회형 교회들은 각기 ·1만 교회운동 등 목표 지향적이고 공격적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종파형교회들의 도전과 산업화로 생기는 세속화의 도전에 응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응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교회형 교회들은 점차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보수화되고 배타적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계화 혹은 샤머니즘으로 되면서 그 세계성과 개방성 혹은 공공성을 상실함으로써 교회형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항하는 단체로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다. 이 단체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요소들과 타계적이고 샤머니즘적 요소들을 가진 이른바 공교회의 연합체인 KNCC를 반대하는 인사들이 모여서 형성한 집단이어서 교단들로부터나 사회로부터 공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단체는 처음부터 매우 이질적 요소를 지닌 인사들의 집단이다 보니 그 안에서 끊임없는 세력다툼과 분열이 일어나고 일부인사들을 중심으로 마침내 교회연합이라는 집단으로 갈라져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교단이나 교회단체들 안에서의 분열과 권력다툼은 더욱더 개신교회들의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특히 1913년도 가을에 부산에서 열릴 예정인 교회형 교회들의 모임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앞두고 개신교회들 안에서 극단적 대립과 갈등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기총을 비롯한 극단적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 노선들, 특히 종교다원주의 수용과 타종교에 대한 막무가내 개종선교반대와 동성애문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총회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에 소극적으로 참여해온 KNCC 회원교단 가운데서 에장 통합측은 신학노선에서 우유부단함으로 들어냄으로써 사태를 더욱더 혼란 가운데 빠뜨리고 있다. 특히 재정적 이유로 종파적 교단인 순복음교회를 회원으로 영입함으로써 KNCC는 세계교회협의회가 걸어온 전통과 신학적 노선을 크게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한국의 개신교회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진영이 그동안 확고한 신학적 기반을 견지하지 못하고 회원교단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던 결과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무조건적 일치운동만을 앞장세우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 노선에 서서 교파간의 무원칙한 타협으로 일관하다 보니까 결국은 “마귀와도 타협하는 운동”(칼 바르트)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무원칙적으로 갈라진 교파들 사이의 일치운동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예수와의 일치운동”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오는 귀결이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회들의 종파화 현상을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의 개신교회들의 종파화 현상은 개신교회가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체제에 사로잡힘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일탈하여 맘몬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예가 미국에서 수입된 자본주의적 교회성장이론에 의해서 한국개신교회가 맘몬주의로 오염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한국개신교회들 사이에 일어났던 교회성장 추동운동으로서 특정한 목표치를 세운 교회성장운동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시장 확장운동을 모방한 것이며 거기에 부가한 신자훈련 프로그램은 자본주의적 판매 전략으로 개발된 다단계 판매 전략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운동을 최초로 도입한 것은 순복음 교회이며 여타의 교회형 교회들도 이 운동을 모방 내지 동조함으로써 교회의 본래적 사명을 망각한 채 무한경쟁, 맘몬주의에 노예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둘째 한국 개신교회들은 아직도 동서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일방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서냉전체제에서 이데올로기적 대결과 그리스도교라는 신학적 주제는 유럽에서는 1970년대에 해결된 낡은 주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답은 체코의 신학자 로마드카와 스위스의 바르트에 의해서 주어졌다. 말하자면 당시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은 각기 인류구원의 프로그램이라고 내세웠지만 거대정치세력간의 “권력투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나 소련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 인류를 구해낸다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그 어떤 세상의 이데올로기 특히 미국의 자본주의와 자기를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악마적 음모를 폭로하여 정체를 밝히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인류를 참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 개신교회들이 점차 보수화되고 배타적이 되어 종파적 교회의 특징인 세상 부정적이고 타계적이며 샤머니즘적 성격을 띠어가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언제부터인가 강단에서 외치는 목사의 설교에서 “축복주의”라는 샤머니즘적 주술신앙에 오염되어 있어서, 신자들의 건전한 이성과 상식이 마비되어 신자들이 비정상적 인간군으로 소외되어 가고 있다.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들이나 문화들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악마시하며 자기들만의 왜곡된 신념에서만 농성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누에고치와 같은 신자들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회들의 제반 현상은 공교회성에서 이탈하여 교회들이 종파형(sects)으로 나아가고 마침내는 이단화 되어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