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심광섭의 미술산책] 랍비 예수(2)

심광섭·감신대 교수(조직신학)

▲샤갈(Marc Chagall), <흰색 십자가>, 1938

최초의 예수는 유다의 문화적 배경과 언어를 통해 이해되고 알려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자명하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아람어 가운데 예수에 대한 칭호(존칭)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다. ①랍비(Rabbi), 즉 교사로서의 예수, ②예언자로서의 예수, ③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그리고 ④마르(Mar), 즉 주(主)로서의 예수가 그것이다. 
 
처음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랍비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시면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랍비처럼 성경을 읽는다(이사야 61:1-2)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
 
예수께서는 여느 랍비처럼 이 본문을 해설한다거나 청중에게 적용하여 이야기 하지 않고 “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 하신다. 예수께서는 랍비의 문답식 전통으로 가르치신다(마 21:23-27) 예수께서는 랍비처럼 비유로 가르치신다.
 
예수는 또한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언자”(마 21:11)로 불리었다. 이 명칭은 아람어로 “아멘이신 분이시오,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계 3:14)이라는 표현이다. 예언자란 밖을 향해서 말하는 사람, 다른 삶을 위해 말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 율법을 외면적으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의도나 마음의 동기라는 측면에서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마 5:21-48)
 
신약성서 시대 이후에도 유다교 전승 중에 명명된 예수의 이름을 보면 유다교가 “랍비”와 “예언자”를 예수에게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다교와의 논쟁에서 예수가 이러한 범주를 능가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예언자라는 칭호는 8세기의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같은 반 이슬람교적 기독교 변증가에 의해 불충분하고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낙인찍히고 만다. 이리하여 성경시대 이후 기독교와 유다교,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예수像이 있었는데도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만다. 참으로 두고두고 애석한 일이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70년) 기독교가 지중해권으로 이동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주’라는 칭호가,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라는 상상 속에 담기게 된다. ‘그리스도’와 ‘주’라는 칭호도 그것이 정착되면서부터 셈어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대부분 소실되었다. 
 
1세기의 기독교 사도들에게 랍비로서의 예수는 자명한 개념이었지만 2세기의 사도들에게는 곤혹스러운 개념이 되더니, 3세기 이후의 사도들에게는 불분명한 말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비유다교화”가 추진되었다. 예수는 유다교적인 의미의 랍비에서 그리스적인 의미의 신적 존재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생’(didaskalos)이고 랍비이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도 랍비라는 호칭이 네 번(9:5, 10:51, 11:21, 14:45) 등장하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는 말은 15번 나온다.
 
샤갈은 <하얀 십자가>(1938년)에서 예수를 랍비로 그린다. 샤갈은 그림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특징 없는 요포(腰布)를 입히지 않고 그 대신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랍비가 몸에 걸치는 탈리트(Talit)를 입혔다.
 
물론 이 그림의 핵심은 20세기에 대대적이며 조직적으로 시작된 유대인 박해이다. 그림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있다. 머리에는 후광이 빛나고 허리는 탈리트가 감싸고 있다. 발치에는 메노라(유다교 예식에 쓰이는 일곱 갈래로 이루어진 촛대)에 불이 켜져 있다. 빛줄기가 창백한 그리스도를 내리비추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끔찍한 일도 이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빼앗을 수 없다. 
 
그리스도 옆에 있는 사다리는 우선 그리스도의 몸에 못을 박을 때 사용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다리를 내적으로 이해할 경우,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 주위에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유다인 박해가 미쳐 날뛰고 있다. 토라를 부둥켜안고 있는 남자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십자가를 향해 뒤돌아보고 있으며, 자루를 짊어진 유다인은 다 빼앗기고 남아 있는 보잘 것 없는 재산을 건지려고 애쓰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고, 기도용 보자기를 두른 수염 난 남자는 넋을 잃고 서 있다. 
 
이 세상에서는 설 자리를 잃은 유다인들을 가득 태운 작은 배가 강에 떠 있다. 마을을 쓸어버리겠다는 듯이 한 무리가 쳐들어오고 있다. 유다교 회당은 이미 훨훨 타고 있다. 하늘에는 애도하는 유다인들이 떠돌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만일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우주의 통치자(Pantokrator)로서만이 아니라 랍비 요슈아 바르 요셉(Rabbi Jeshua bar-Joseph, 요셉의 아들 랍비 요슈아)으로서 나사렛의 랍비 예수, 다윗의 아들로서 숭배했다면, 저 반유다주의와 유다인 학살,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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