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창조주는 우리의 영원한 ‘거처’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시 90:1-4; 요 14:1-6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 well-being과 well-dying, 이것은 인생최대의 목표요 희망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 사는 것이고 또 어떤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인지는 그렇게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우리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매우 잘못된 오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웰빙과 웰다잉에 대해 섣부른, 잘못된 定義를 내린다는 그 점입니다. 즉 무탈, 무병, 장수하면 그것은 神의 축복을 받은 웰빙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신의 미움을 받은 불운의 삶이라고 단정한다든지, 죽음의 경우에서도, 가령,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죽거나, 불의의 事故死를 당하면, 그것은 신의 미움을 받은 죽음이라고 보고, 그 반대로, 고통 없이 평화스럽게 환한 얼굴로 죽으면 그것은 낙원이나 천국으로 간 웰다잉의 징후라고 말하는 그런 매우 잘못된 판단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잘 산다는 것과 잘 죽는다는 것,> <웰빙과 웰다잉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손쉽게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7월 15일의 어느 일간신문에는 “시각장애인인 나의 남편, 이 점자판으로 모든 것 기록했죠.”라는 제목의 기사, 즉 71세 할머니인 한 여인, ‘석은옥’씨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관한 記事가 한 면 가득 보도되고 있었는데, 그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즉 남달리 高尙한 뜻을 가진 한 여대생이었었던 이 석은옥 씨가 서울의 한 盲啞학교에 자원봉사활동을 나갔다가, 중학교 시절에 축구공에 맞아 失明해서 갑자기 원하지도 않는 맹아학교를 다니게 된 매우 불우한 ‘강영우’라는 두 살 아래의 젊은 視覺장애 남자 대학생을 돌보는 자원봉사활동을 맡게 되었는데, 주로, 그녀가 참여한 봉사 활동은, 이 시각장애자의 리포트 작성이나 논문저술 때, 점자(點字) 타자기로 타자한 글의 내용을 읽어주고 또 誤字가 나오면 고쳐주는 일을 하는 일, 그리고 登/下校길에 시각장애자의 지팡이인 흰색 지팡이를 건네주는 일을 하는 것, 등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 봉사활동을 계속하다가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첫 1년은 단순히 시각 장애자와 자원 봉사자 사이의 관계로, 그 다음 6년은 동생과 누나 사이의 관계로, 그리고 그 다음 3년은 약혼자 사이의 관계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10여년 만에 부부가 된 그런 관계였는데, 50여년 결혼생활을 통하여 슬하에 아들도 둘이나 두기까지는 하였지만, 최근 그녀의 남편은 70세를 채 못 넘기고 갑자기 췌장암에 걸려서 운명하였는데, 죽기 전 마지막 6개월간은 자기와 같은 이런 불우한 시각장애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줄 자신의 <자서전>을 힘들게 하나 써놓고는 죽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 석은옥 씨의 생애가 과연 웰빙의 삶이었느냐? 아니면, 그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불행한 생/일빙의 삶이었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정반대의 대답들이 나와 서로 충돌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순수하고 좋은 마음을 가졌던 한 젊은 여대생이 그의 全 일생을 오직 시각장애인의 오른 팔 노력만 해 온 그 안쓰러운 생애는 나 같은 사람은 열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도하기 지겨운 불행한 생이야!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다른 사람은, 이와는 달리, 이 여인의 생애를 가리켜, 자신의 일평생을 한 시각장애자의 영원한 사랑과 희망이 되어주게 하고, 뿐만 아니라, 원인모를 시각장애의 불운에 매여 살아가는 미래의 많은 불우한 시각장애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사람이 된 위대한 삶이기 때문에, 그 삶은 진정한 의미의 웰빙의 삶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격찬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웰빙의 삶에 대한 정의는 어떤 해석의 관점과 잣대를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평가가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잘 죽는 것’에 대해서도 바른 정의를 내리는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척스럽고도 끈질기게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잘 죽는 것이냐?> 즉 <무엇이 ‘웰다잉’이냐?>라는 문제에 대한 판단에서는 매우 잘못된 판단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즉 죽을 때 <괴로워하며 죽거나> 또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비명의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그것을 웰다잉이 아닌! 죽음, 즉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받은 ‘불행한 죽음’이라고들 말하며 서로들 입을 비죽이고 수군거리는 그런 결정적인 잘못들을 기독교인들도 자주 저지르곤 합니다.
   
이를 말해주는 가장 손쉬운 예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 사이의 비교에서 손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생각할 때, 허무하고 유한한 ‘몸’ 속에갇혀 있는 영원불멸의 ‘영혼’이 인간이라고 하는 원인불명의 이원론적 인간이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일생의 마지막을 맞을 때에, 독배를 받아 마시며 죽을 때에도, 이 고통스러운 ‘몸’의 장막을 벗어나 ‘靈魂’이 영원한 해방을 누리게 된다는 그런 잘못된 믿음에 의지하여, 정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죽음이 가까웠을 때는, 즉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그는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마 26:38) 또는 “나의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마 26:39)라고 하시며 심히 괴로워하셨으며, 막상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특히, 어둠이 세 시간 동안이나 온 땅을 뒤덮었을 그때는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라고 부르짖으시다가 운명하셨다고 공관 복음서는 공통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막 14:32-42; 15:33-41; 눅 22:39-46; 23:44-49) 이렇게 하여 흔히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예수의 죽음을 비하해서 잘못 말하는 경우들이 가끔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같은 그런 극심한 고통과 고독을 겪으면서 죽는 경우를 가리켜 저주받은 죽음, 즉 웰다잉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내려가는 죽음이라고 쉽게들 잘못 말하곤 합니다. 이와 동시에,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받아 마시면서도, 만면에 밝은 웃음을 지으며, 여하튼, 평화스럽게만 죽으면, 그런 죽음은 천당으로 가는 죽음, 즉 웰다잉이라고들, 또한 역시, 매우 잘못 말하곤 합니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매우 높은 존경을 받았던 성철 스님이 죽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평생을 두고 얄팍한 법어 따위를 구사하면서 뭇 중생을 속여 왔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죽어 천길만길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남겨놓고 입적하였다는데, 그러나, 한국의 어느 불교도(佛敎徒)도 성철 스님이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 아니, 전 세계의 어느 기독교 신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극적 운명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졌고 소크라테스는 천국으로 갔다고 믿는 사람 역시 또한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무엇이 ‘잘 죽는 것이냐?’라는 것 즉 무엇이 웰다잉이냐? 라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무지가 이토록 많은 무고한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으로 매도하여 많은 순수 신앙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잔인한 잘못을 자주 저질러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웰빙이고 또 무엇이 과연 웰다잉입니까?
   
그리하여 모든 학문 분야들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인간은 과연 어디로부터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를 집중적으로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우리 인간들 모두는, 비록, 많은 우리의 이웃들과 더불어 부단히 서로 부딪히고 접촉하며 이렇게 실제로 눈이 시퍼렇게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우리 인간이 무엇이고 또 이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다.>라는 답변만 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의 생명력을 가진 생명체로서 여기 이곳까지 살아오게 된 (1)우리의 그 근원지는 단지 우리의 부모와 선조라는 사실과 그리고 (2)우리가 장차 모두들 반드시 돌아가게 될 그곳은 단지 ‘흙’일 뿐이라는 것, 이 두 가지 사실 이외에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진정으로 아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간에 대한 ‘종교적 물음’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진지하게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지만, 그러나, 동양 최대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와 유교는 일찍부터 자신들이 의학이나 천문 물리학 이론을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인간이란 단지 ‘이 세상에 내어던져진 존재’라고 보는 철학적 판단 이상은 할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는, 마침내, 인간이란 生老病死의 사슬에 매여 있기 때문에 因果應報라는 번뇌의 고리를 벗어나는 것이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因果의 고리를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골몰한 나머지, 드디어는, 解脫의 경지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이릅니다. 말하자면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불교는 비로소 희열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깨달음이고 인간지성의 최고경지에까지 도달한 깨달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無에 대한 깨달음’과 ‘죽음에 대한 찬양’이라는 것은 우리의 물음에 대한 정답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無소유’와 철저한 ‘無로 돌아가는 죽음’에 대한 추구는, 그것을 아무리 철학적으로 미화한다고 하더라도, <죽음과 無>가 인간 삶의 실질적인 궁극목표가 될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는 분명 그 본질이 철저한 인본주의라고 하는 점에서 볼 때, 불교보다는 더 인간 중심적 휴머니즘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조상신’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해도, 그러한 유교의 고매한 윤리적 이념은 어디까지나 더욱 철저한 인본주의에로 다가가게 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단지 살아있는 동안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 몸을 다스려 사회질서를 정립하는 일이나 또는 ‘인’(仁)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것, 즉 어질 ‘인’(仁)자 하나로 인간사회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을 추구하기는 하나,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많은 德을 쌓아도 죽은 다음은, 겨우 후손들로부터 神 아닌 神으로 섬김을 받는 허례허식이라는 허울만 있는 윤리전통을 남길 뿐임을 봅니다. 그러므로 유교에도 우리의 물음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성서종교는, 저들과는 달리, 인간의 근본과 그리고 인간의 출발과 종착지를 ‘창조신’(創造神)이라고 명료하게 고백함으로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으로부터 이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러한 대답을 확고하게 갖고서 출발하여 아브라함을 인류역사의 ‘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신앙 고백한 경전(經典)인 구약성서 전통을 ‘함께’ 이어받은  유일신 종교를 우리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라고 부릅니다. 비록 지구상의 이 3대 유일신 종교는 다들 지금까지 각각 자기의 길만을 고집해 오기는 하였지만, 그 나마 다행스럽게도!, 이 3대 유일신 종교가 모두 다!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동일한 목소리로 ‘창조신의 창조물’일 뿐이라고 보고 있고 또 <창조신에서부터 왔다가 창조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이 신앙만은 확고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세 종교는 또한 모두가 ‘샬롬’ 즉 흔히들 ‘평화’라고 번역되는 이 히브리말,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시작 때마다 함께 외치는 그 ‘샬롬’, 바로 그 ‘샬롬’을 우리의 신앙적 삶의 궁극목표로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샬롬’이라는 말은 그 원 출처인 구약성서에서는, 본래, 그저 단순하게 ‘전쟁이 정지된 상태’를 표현하는 ‘부분적 평화’를 가리키는 말이 결코 아니라, 철저히 그것은 웰빙과 웰다잉을 ‘모두 다 하나로 통합하는 말’이라고 보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인간을 구성하는 지체들 중 어느 작은 한 부분이라도 웰빙이 아닌 경우에는 그것을 가리켜 ‘샬롬’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神의 救援이 이루어지는 때에만 그것을 가리켜 비로소 ‘샬롬’이라고 불렀었습니다. 즉 구약의 ‘샬롬,’ 신약의 ‘에이레네,’ 그리고 이슬람의 ‘샬렘’이 모두 이러한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는 이 모든 만유를 창조하시고 이 창조된 만물의 유구한 역사를 시작하신 이후, 무려 137억여년이 넘는 억겁을 헤아리는 이 우주역사를 지금까지 조금도 뒤틀림 없이 끝없이 팽창시키기만 하며 이끌어오고 지켜 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그 창조질서의 뜻에 잘 순종하고 잘 순응하며 사는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웰빙’과 ‘웰다잉’을 모두 아우르는 유대교의 ‘샬롬’이요 기독교의 ‘에이레네’요 이슬람의 ‘샬렘’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하나님 어머니께서 그가 만드신 그의 창조물인 우리 인간을 <이 땅에 태어나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고 또 죽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신다는 그것입니다. 신명기 32:39와 사무엘 상 2:6은 아주 분명한 어투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고하게 증언합니다. 즉 “이제는 알아라. <나, 오직 나만이 창조주 ‘그이’>라는 것을 알아라. 나 외에는 창조자란 없다. [창조자인] 나만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 아무도 내가 하는 이 일을 막지 못한다.”라고 증언합니다. 동시에 이 증언을 이어받은 시편 121편 시인도 확신에 찬 노래를 지어서, 그것도, unison으로 동일한 주제를 계속 복창하면서 말하기를,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늘 우리를 ‘지키시는’ 그분”이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낳으시고 양육하시고 지키시는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어머니시라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성서의 이러한 신앙고백이 가진 그 본 의미를 가장 명료하게 요약하여 표현한 말씀이 바로 다음과 같은 구약본문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이신]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영원한] 거처(居處)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 그리고 땅과 세계가 생기기도 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창조주 이신] 주님만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후] 그 사람을 향해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며 이르 시기를,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제기해왔던 그 중대한 물음인 “인간은 무엇이며, 또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遺言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참으로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꾸란)도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꾸란 경(經) 10장 4절(x.4)은 말하기를, “너 나 할 것 없이 너희 모두는, 그분, 알라 신   [神]에게로 돌아가거라.”라고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 3대 유일신 종교가 모두 한 목소리로 <인간이 돌아갈 영원한 본향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만 합창하고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욱 놀랍게도!, 천문물리과학 역시 <우주의 무한 팽창>을 합창하여 말하면서 이 우주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지상의 3대 유일신 종교와 우주 물리과학이 모두 합창하여 한 목소리로 우리 인간의 영원한 본향, 영원한 거주지, 영원한 집을 즉 우리의 영원한 居處를 가리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의미상으로는, 하나님 어머니!”라는 신앙고백만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실로, 저 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우리가 능히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감히 우리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 고백은 또한 그 옛날, 의인 욥이 그토록 고집하였던 자기의 주의/주장을 모두 다 내어버리고 다음과 같이 항복한 그것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니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창조주의 창조]이치(理致)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깨닫지도 못한     말을 떠들어대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말을 지껄였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이제는 스스로 [내 주장을] 거둬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욥기 42:1-6에서 욥은 철저한 항복을 선언하며 참회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국의 어느 수상도 이 지구상의 인류사회가 갖고 있는 저 끝없는 부조리와 혼돈을 보다 못해 말하기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이 지구상의 3대 유일신 종교가 만일 서로들 자기 교세만을 확장하려는 그런 제국주의적이고도 근본주의적인 치명적 종교전쟁을 중단하고 다 함께 진정한 ‘샬롬’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세계평화의 절반은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吐露처럼, 이 3대 유일신 종교와 그리고 천문 물리학과 의학을 포함한 자연과학이 모두 다 함께 하나가 되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한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을 함께 고백하기만 한다면,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에서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진심을 기울여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우리네 인류가 다함께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코, 죽음도 극복하게 될 것이고 또 우리는 모두가 다 창조주 한 하나님의 품, 그분의 거처(居處)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확신하며 확신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성서의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그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신앙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진실을 추구하는 자들이 종교교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말하기를, “이 지구는 결코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또 이 지구가 붙박이처럼 땅 위에 고정해 있지 않고 태양 주위를 돌며 마치 만경창파를 헤엄치듯 이 우주 안에서 창조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라고 주장하여도 그리고 심지어는 “이 우주는 점점 무한 팽창해간다.”라고 말한다 하여도, 결코, 종교교권이 무식하게 나서서 저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말씀에 역행하는 말을 한다고 정죄하거나 종교재판에 붙여 갈릴레오를 처형하듯이 저들을 처형하는 그런 종교적 ‘무지’와 종교적 ‘독선’, 그리고 종교적 ‘몽매주의’를 추구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말고 그저 무조건 믿으라. 그리고 교회 마당만 열심히 밟기만 하여라. 그리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다.” 라고 말하는 그런 거짓 교리에 목을 매는, 그런 종교적 몽매주의를 우리는 결사적으로 떨쳐버려야 할 것입니다. 의심 없이 믿기만 하여라. “믿기만 하면 성전 꼭대기에서 땅으로 뛰어내려도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며 또 의심 없이 믿기만 하면 언제든 돌을 가리켜 떡이 되라고 하여도 떡이 되게 할 수 있다.”라고 선전하면서 성서말씀을 대단히 곡해하고, 성서를 단지 문자적으로만 믿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런 기독교적 몽매주의와 거짓 가르침에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가르치고 바로 배우고 바로 알아서 그 뜻을 바르게 실천하여야만 우리가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 진리를 깨닫고!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성서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러면, 진실로 그러기만 하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을 누리게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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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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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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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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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