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군사적으로도 남북한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하게 무장하고 있다. 상대의 위협을 방어한다는 구실로 남북한은 각기 6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유지하고 있고 남한은 매년 30조 이상의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고 있다. 또 남한 정부는 2014-17까지 신국방계획에 따라서 약 24조 5000억 원을 방어비로 투입할 예정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남한정부는 매년 단독으로 혹은 미군과 더불어 막대한 화력을 동원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여기에 대응해서 북한도 적지 않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한국군과 미군의 군사훈련에 대비하는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남북한은 지난 60년 동안 정전협정체제 하에서 불안한 평화(안보)를 유지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전투적인 “북진통일” 정책을 추진하여 북한을 위협했었다. 그는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 먹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북진통일정책을 견지했었다. 그래서 당시 휴전당사자였던 미군은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북방한계선”(North Limited Line)을 설치하여 남한의 해군이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지 못하게 했었다. 사실상 NLL은 이러한 이승만의 북진통일정책으로 인한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계선이다.
군사 구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통치기간 내내 북한에 대해서는 소위 “체제대결”을 내걸고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들 가운데 우수한 체제가 승리할 것이며 따라서 그 체제로 통일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2년 7.4공동성명을 이끌어내고 자주. 평화. 그리고 민족대단결의 방식으로 통일할 것을 합의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후 여타의 정부들도 대북정책 내지는 통일정책들을 하나의 구호로 주창하기는 했지만 특기할만한 것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1992년에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화해와 협력을 위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것은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북한에 대해서 적대정책 보다는 햇빛정책을 주창함으로써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고(2000년) 6.15공동성명을 채택했고 노무현 정부 역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선언”을 이끌어냈었다. 이렇게 해서 남북한 간에는 다소간 긴장이 완화되고 금강산 관공사업이나 개성공단사업 등을 전개할 수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암시한대로 평화의 조건은 상호 적대적인 상대자들이 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힘으로써만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한 교훈을 되새길 만하다. 경제협력이나 교류를 통해서 서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 될 때 서로간의 갈등은 훨씬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대북정책으로서 “비핵개방 3000”이라는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매우 비현실적 정책을 제시하면서 그동안의 화해의 분위기는 얼어붙고 결국은 대결의 길로 나아가서 마침내 금강산관광의 중단, 천안함 폭침사건 그리고 연평도포격사건 등을 야기하는 남북한의 매우 불안한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대북한 정책을 이른바 “대북 신뢰프로세스”라는 명칭을 걸고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이 그의 “창조 경제론”만큼이나 애매모호하여 전문가들조차도 그 형식이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근혜대통령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도 이 신뢰프로세스를 설명하고 지원을 약속받았다는데 정작 우리나라의 학자들이나 국민들만 그 뜻과 의도를 제대로 모른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추측컨대 박근혜의 “대북신뢰 프로세스”란 이제까지 남북한의 관계가 상호 불신으로 점철되어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대화나 협력 등의 과정을 거쳐서 서로간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화해하고 마침내 통일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화해의 시대로 나아가서 마침내 민족통일의 시대를 열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신뢰(信賴)란 말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존재와 생각, 말하자면 존재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과 행위를 말한다. 타인의 존재나 사상, 즉 존재성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 할 때는 본인의 마음에서도 신뢰가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서도 신뢰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 사이의 신뢰에서도 타국의 존재와 체제를 그대로 승인할 때에만 신뢰가 생기고 호혜적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신뢰 프로세스란 적대적인 상대방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과정으로서 근대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호간의 관용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뢰란 말은 흔히 종교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실리를 따지는 현실정치 영역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종교적으로 신뢰란 타락한 인간의 현실, 죄악과 불신으로 가득 찬 인간들 사이에서도 타자나 적대자에 대한 관용과 자비를 베푸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용어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5-7장에는 이른바 “산상설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예수가 제시하는 “원수 사랑의 계명”이나 “타자우선의 원리”는 보통사람들로서는 지키거나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가 여기서 강조하는 원수 사랑이나 타자우선은 인간들 사이의 신뢰관계의 기초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산상설교야말로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 내용이라고 설파했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대는 일”이나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적대적 인간들 사이의 신뢰탄생과 성숙의 근간이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통일의 주역이었고 철혈재상으로 알려졌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원수 사랑과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신약성서의 산상설교를 가지고 현실세계에서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와는 달리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는 소위 하나의 타협안으로서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를 주창한바 있다. 그에 의하면 “산상설교의 정치학”이라는 이상적 정치현실은 죄악으로 가득 찬 타락한 세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접근해 보려는 근사치(Approximation)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전혀 신뢰할 수 없고 적대적인 남북한 사이에서 “신뢰 프로세스”를 실천해 나가려면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정부가 그동안 추구해 왔던 대북정책 이른바 그럴듯한 “상호주의 정책”을 가장한 “압박정책”(deterrence)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적대적 관계에서 신뢰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압박정책과 같은 상대방에 대한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고 하는 상호주의도 통하지 않는다. 예수는 구약성서의 율법에 나타난 원칙 즉 상호주의를 가지고는 절대로 타인과 화해하거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너는 왼쪽 뺨을 때려주라.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을 빼앗아라.”는 상호주의는 적대감만 더욱 부추길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억지로 5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같이 가주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39-44).
그래서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며 평화운동가인 프란츠 알트(Franz Alt)는 그의 “산상설교의 정치학”(Politik der Bergpredigt)이란 책에서 당시 동서독처럼 대립갈등이 첨예화된 세계에서는 ”원수사랑“만이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한 가장 현실적 삶의 철학이라고 갈파했었다. 필자는 한반도와 같은 첨예하게 대립되고 엄청난 최신무기, 특히 핵무기로 무장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원수사랑“이야말로 가장 현실성 있는 정책이라고 믿고 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갈 이 땅을 분단된 상태로 그리고 적대적 관계로 넘겨줄 수 없다. 따라서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통해서 달성될 평화야말로 우리와 후손들을 위한 ”삶의 계명“이다. 우리와 우리 후손이 불안과 공포 그리고 적대감 없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적대시하던 북한주민들을 불가피하게 사랑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사고방식의 전환과 그 능력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정부의 대북한 신뢰프로세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은 물론 상호주의 같은 어리석은 정책을 버리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신뢰 프로세스를 성공으로 이끌고 남북한이 신뢰하고 화해하여 통일함으로써 이 땅에 항구적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첫째 박근혜 정부는 전 국민이 북한과 북한주민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일체의 법령을 폐기하고 선전이나 선동행위를 중지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박근혜정부가 신뢰 프로세스에 성공하자면 지금 북한을 적대시하게 하는 국가보안법을 폐기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과 원수되게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구약성서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 사람들을 서로 갈라서 원수가 되게 만드는 “계명의 법”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거주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이방인을 아내로 삼거나 같이 식사를 하거나 이방인의 옷을 입어서도 안 되었었다. 이러한 법과 제도는 심지어 형제국가였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는데 그들이 이방민족 아시리아에 짐령 당함으로써 피가 석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와 바울 사도는 이러한 계명의 법을 철폐했다. 예수는 친히 사마리아로 여행하고 복음을 전했으며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물도 얻어 마셨었다.(요한복음 4:5-11). 이렇게 예수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쌓았던 유대의 전통과 법들을 철폐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희생함으로써 “계명의 율법”을 철폐하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에베소서 2:14-15).
따라서 남북한으로 갈라져서 사는 우리 민족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원수가 된 것은 바로 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남북한 한 민족을 원수가 되게 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을 철폐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서로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둘째 박근혜 정부는 대북한 신뢰 프로세스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대화의 창문을 활짝 열고 우리로 하여금 원수되게 하기 위해서 만든 국가보안법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적대시하게 하는 병력이나 무기감축과 같은 문제들을 조속히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남한과 북한은 휴정협정 후 60여 년 동안 막대한 병력과 무기로 무장하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위협정책을 써왔다. 남한 정부는 막강한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지원을 얻어 수시로 군사훈련을 함으로써 북한을 불안에 떨게 했고 북한은 거기에 대응한다는 구실로 심각한 경제적 난으로 국민들이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핵무기와 장거리 로켓을 개발했다. 남한은 최첨단무기로, 북한은 핵무기로 무장하고 위협하는 현실에서 상호간의 신뢰 프로세스는 불가능하다. 최첨단무기들로 무장한 상대에게 어떻게 신뢰를 말하고 신뢰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남한 정부는 금년도에도 32조의 국방비를 책정하고 지금도 8조 5천억을 들여 최신예전투기 60여대를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사오려고 한다. 그리고 2014부터 18년 사이에 남한 정부는 새로운 국방계획을 위해서 240조 5천억 원을 쓰려고 하고 있다. 남북한 정부는 군축을 통해서 남는 돈을 경제발전에 투자함으로써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도 해결하고 남한의 빈부격차도 개선하여 통일로 가는 길을 예비해야 할 것이다.
셋째 박근혜 정부는 남북한 상호 교류와 경제협력을 통해서 어려운 북한을 지원하고 인도주의적 원조를 통해서 굶주리는 북한 부민들을 도움으로써 상호 신뢰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보수적인 정권들은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대북 퍼주기”라고 비판하면서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미국에 “퍼주고” 최신무기들을 사들이는데 이는 단지 상호간의 적대감만을 부추길 뿐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고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한국정부는 앞으로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과 기술지원 그리고 인도적 원조를 통해서 신뢰를 쌓고 통일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넷째 박근혜정부가 신뢰프로세스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나 성인교육에서 적대적인 안보교육이 아니라 화해적인 평화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학교에서 역사교육이나 사회교육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교육을 시켜야 한다. 지금 세계는 19세기의 민족국가 시대처럼 20세기의 이념국가 시대처럼 타민족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대상을 상정하고 전쟁을 부추기던 낡은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은 민족국가주의는 세계화를 통해서 극복되었고, 이념국가들은 1990년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해체로 사라졌다. 지금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의 화폐경제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서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 사이의 빈부 격차사회가 사회적 연대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적대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잘 사는 남한과 어려운 북한은 낡은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을 청산하고 협력함으로써 서로가 잘 살고 나아가서 통일과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신뢰프로세스의 교육을 젊은이들에게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성인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는 언론매체들(특히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처럼 낡은 이념대결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도록 신뢰프로세스에 협력해야 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신뢰프로세스”가 어떤 “원칙론”에 사로잡힘으로써 포용성을 상실하고 경직되게 되면 이명박 정부의 상호주의처럼 실패하게 되고 남북한 사이에는 다시금 적대적 관계로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