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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 강연문]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

위르겐 몰트만 박사·독일 튀빙겐대 석좌교수

▲위르겐 몰트만 박사(독일 튀빙겐대 석좌교수) ⓒ베리타스
“희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화를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 안에서 희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라고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와 시대를 지나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 희망의 하나님
 
이 말은 유일무이한 말입니다. 종교적 세계 어디에도 신이 세계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희망과 연계되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신,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한 존재, 절대적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서의 신은 많은 종교들에서 이미 알려져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하나님, 우리 앞서 계시고 우리 앞서 가시는 “희망의 하나님”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해준 성경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단지“계시(현재)”거나, 아니면 단지 “계셨(과거)”을 뿐만 아니라 계시록 1장 4절에서처럼 또한 “오실(미래)” 그 하나님은 새롭습니다. 오실 그 하나님은 천지를 그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마음껏 펼쳐내고 만개할 수 있는 미래의 “넓은 곳”에 계신 분으로서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는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백성을 광야의 오랜 방랑길에서 자유의 시간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내신 분입니다. 그는 성령의 불과 폭풍 가운데 자기 사람들, 즉 “미래의 세계의 능력”을 통해서 이미 여기서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부활의 하나님 예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의 미래로부터 우리를 마주하여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유의 시간의 땅인, 약속의 땅에서 그는 자기 백성과 함께 살려 하십니다. 모든 없어져버릴 것들의 새 창조 안에서 그는 모든 인생들과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계21:5). 그것은 그의 도래하는 나라에로의 크나큰 초대입니다. 기대하고 희망하는 자에게는 이미 그의 인생사 가운데 항상 새로운 지평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발할 준비가 되어있고 그리고 새것으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 대강절에 뿐만이 아니라 - 온전하고 완전한, 확실한 희망입니다. 앞으로 향하는 것이고 오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 속에 있는 삶입니다. 미래는 기독교에 관계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요소입니다. 모든 노래들이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 (절대)음과도 같은 것이고, 모든 성화들이 그려지는 곳에 쓰이게 되는 새벽여명의 황금색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희망이라야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고있는 하나님나라에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자신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 기대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매일을 경험합니다. 기쁨도 슬픔도 말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나아갑니다. 우리는 희망하고 인내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깨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 아침을 맞으면서, 매번 찾아오는 새해를 맞으면서, 매번 새로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에는, 우리는 예수께서 맞은 편 냇가에 서 계신 것과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축제에 초대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의 기쁨에 참
여하라”고 말입니다.

2. 끝에 있는 시작
 
우리의 세계에 미래가 있습니까? 오늘날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천재지변을 두려워합니다. 기후재난을, 방사능재해를, 쓰나미, 지진, 그리고 다른 자연재해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추락을 두려워하고, 우리 문명의 종말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상상들이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지금 종말이”라든지, “장차 올 그날”, “아마겟돈 계곡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마막 살육” 등의 주제들 말입니다. 인류가 우리 세계에 종말이 있는가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관계없이 던지는 전형적인 묵시론적인 질문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물의 마지막”에 대해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의 끝‘을 말하고, 또 현대적 개념으로서 “역사의 종말”을 말합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해서 그려보는 상과 상상들은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경악할만한 묵시론적 상들인데,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과연 기독교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원초적이고 정통성 있는 기독교인의 미래기대는 그러한 종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앞서 말한 생명의 끝, 역사의 종말, 세계의 종말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종말은 오히려 시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참 생명의 시작과,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모든 피조물이 그 영원한 모습으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시작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의 끝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생명의 끝, 역사의 종말, 세상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종말에 새로운 시작이 기독교적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1945년 4월 9일 처형될 때 그는 동료죄수들과 이별하면서 한마디 말을 남깁니다. “이것은 끝이지만 내게는 영생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마지막에, 그것이 어떤 모양이라 할지라도 그 새 시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어떻게 “종말에 시작”입니까? 왜냐하면 기독교적 희망의 원천이자 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께서 살아나셨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음으로 이끌리는 삶으로부터 나와서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으로 불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시작”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개인적으로 맞은 종말은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한 참된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생의 시작이요, 하나님나라의 시작이며,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미래가 됩니다. 우리와 우리 세계가 미래가 있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를 알게 됩니다. 그 미래가 어떻게 오든지간에 말입니다.
 
그의 부활의 빛 아래에서 그리고 그의 현존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예’라고 긍정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계 한복판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충만함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죄로부터의 구속과 선한 삶의 시작을 감지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이 세상의 신으로부터 버림받음이 끝나는 것과, 만물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하심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오늘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걱정을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의 부활의 빛 안에서 또한 과거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산 자만이 아니고 죽은 자까지도 말입니다. 과거의 사망의 그늘 위에도 부활과 생명의 빛이 비칩니다. “너희 죽은 자들이 살아나리라.”(사26:19) 기독교적 부활소망은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까지도 위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부활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들에 대해 다만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조상에게 기대거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공경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포함해서 우리는 희망의 공동체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
고”(사35:10) 말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미래 말입니까? 어떻게 아직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미래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장차 올 사건이라고 보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제어가 안 되는 염원일 뿐이거나 아니면 걷잡을 수 없는, 겁나는 환상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알버트 까뮈가 말한 대로 “확실하게 생각하라 그리하면 희망할 것이 없을 것이다”는 말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제 고향에서 재담으로 하는 말처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그리하면 실패하지 않을것이다”라든지 말입니다.
 
아닙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나, 우리의 두려움이나 또는 미래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그가 우리의 이 세계로 오심, 그가 전하신 가난한 자와 병자와 아이들을 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 그의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그가 계시하신 생명의 영원한 충만함 말입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그의 역사와 부활의 현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그 단단한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역사 중심에 그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이상
향과 묵시록적 형체들에 대한 시금석이 됩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면전에서 합격하는 것만이 기독교적인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표적과 함께 병들게 만드는 악마적인 형체들이 그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축출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골고다의 십자가 뒤에서 부활의 해가 떠오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저편에서부터 하나님의 새 세계의 아침 여명이 동터옵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성공적인 더 좋은 날을 약속하는 낙천주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그곳에 희망을 물들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회상은 개인 생애의 미래와 그들 민족의 미래와 세계사의 미래와 자연사의 미래 안에 넓은 지평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영생에 있어서 단지 우리 영혼만을 위해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인류사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단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인류 구원만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덧없음과 무질서로부터 자연의 구속까지도 희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희망의 팔로 우리는 이 모든 세상을 끌어안고 그 누구도, 또 어느 것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미래를 하나님에게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단지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실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를 화해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선지자 이사야의 모범을 따라 선포한 것처럼, 그의 오심으로부터 “덧없는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세상으로의, 멸망할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세상으로”의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오심을 이미 여기에서 지금 복음의 말씀과 우리를 살리시는 영 안에서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이미 세례와 성찬을 통해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의 현존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합니다. “예수께서 사셨다”는 체험의 강도가 높을수록 우리는 “마라나타(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계22:20)를 더 많이 외치게 될 것입니다. 고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신약성경에 그리스어로 “파루시아”이고, 라틴어로는 “어드벤투스(Adventus)”이며, 독일어로는 “쭈쿤푸트(Zukunft)”입니다. “쭈쿤푸트”라는 단어로 우리는 본래 낱말의 의미로서“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을 표현합니다. 어떻게 될 것이라든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저는 “희망의 신학”을 말하기 시작한 1954년 이래로, 우리가 멀리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뿐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만 기대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 계시지 않다거나, 그가 사라져버렸다거나, 어디를 가셨다거나 그래서 어느날 다시 오셔야 한다고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문을 닫고, 문에다가 “주인 부재중 그러나 곧 돌아옴”이라고 적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시는 중이고, 우리의 모든 현존이 그의 가까우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심이라.”(빌4:4-5) 우리는 깨어서 우리의 모든 마음을 그의 오심을 향해 열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우리에게 이미 현존하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중단되는 법이 없는 미래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 시간 속에서 체험하는 것 같은, 언젠가 과거가 되어버릴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가 현재로 머무르게 되는 미래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은 오고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실재라는 것입니다.

4. 저항과 선취는 희망하는 자들의 덕목입니다.
 
고난과 실망, 그리고 고통과 염려 속에서 기독교적 희망은 그 위로하고 저항하게 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저기 무언가가 오고 있다는, 그래서 고통과 걱정 속에서도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희망의 힘을 우리는 단념하지 않으며, 불의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세계에 침묵하지 않고, 불만족합니다. 악한 것과 화해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들 속에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시험입니다. 저는 2차 세계대전 때에 포로수용소에서 이러한 위험에 처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약속은 종종 우리를 우리 환경 속에서 모순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세계와 그 속에서 살면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옛 세계는 서로 모순됩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십자가의 그늘이 우리에게 드리웁니다. 우리는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계를 견디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필경 타협할 것입니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협하지 아니하고 저항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을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세계에 대한 희망의 능력을 압제받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계의 진행과 거꾸로 가는 반대 이야기로서 들려줍니다. 예언서 에스겔 37장에 부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른 뼈들이 가득한 백성의 시체더미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이 오는 것을 듣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깨우는 것이고, 죽은 자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망이 마지막 단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곧 망할 “거대한 창녀 바빌론”에 대한 종말론적 반대 그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와 로마제국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도래할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그림은 바로 로마제국, “영원한 도시”를 노래하던 로마제국에 반대되는 그림입니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요”라는 신앙고백의 “주”라는 칭호는 “세계의 군주”로 영예를 누리던 권력자 로마황제에 대한 반대 그림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하나님 선포는 어느 상황에서도 파괴적인 하나님에 대한 칭호입니다. 많은 지배자들이 성경을 위험한 책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저항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1919년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26:13)라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 구절은 독일에서 나치 독재자에 대항한 고백교회 내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희망을 가진 생명에게서 우리는 다만 저항이나 고난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예시와 선취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다만 악하다고 하고 그래서 사생활로 침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20절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선으로 악을 이겨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백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관여해야 합니다. 진실과 가난한 자의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폭력으로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메리카 사회복음 운동의 희망이었고,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의 희망이고, 미국 시민권 운동의 희망이었고, 유럽 생태운동의 희망이었습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좋은 것으로 바꾸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의 영께서 우리를 우리의 이기주의나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깨우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한 열정을 느끼며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그리고 우리의 손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펴야합니다. 히브리서 6장 5절이 말하는 “내세의 능력”이 실제로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인생에는 항상 새 생명에 모순되는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희망 가운데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승리하리라, 그 날에...” 그러나 그 새 세계에 걸맞고 장차 올 그날을 예시로 보여주는 상황도 있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는 촉구해야 하고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에 상응하는상황들은 기쁨이 지배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모순되는 상황은 공포가 지배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곳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명을 “꿈”에 대한 하나님의 미래를 선취하는 것으로서 보여드리려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3년에 워싱턴에서 선포했던 “꿈” 말입니다. 그것은 미국 흑인시민들에 대한 백인인종주의를 극복하는 시민 권리운동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그의 희망을 종종 이러한 말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 약속의 땅을보았습니다”라고. 여기 그의 희망의 꿈이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언젠가는 이 나라가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자라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진실은 모든 사람은 동등 하게끔 창조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전직 노예들과 전직 노예주들이 형제애라는 이름의 탁상에 같이 앉게 될 것을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미국독립선언의 정치적 배경 안에 있는 백인인종주의로부터의 흑인 해방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가난한 자나 부자나 동일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정의의 정치를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예언자적 지평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계곡은 높아지고 산은 낮아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생활수준과 삶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는 시민 인권 운동을, 공동체 안에 있는 모두가 “함께” 경험하게 될, 주의 영광의 그 미래를 선취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1968년 웁살라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의 호소문에 온전히 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습니다. 배고픈 자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찾고 있습니다. 경멸당하는 사람들과 불이익에 놓인 사람들이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에 참여하십시오. 오늘 이미 새 창조의 무엇인가가 보이게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날에 완성할 그 새 창조 말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고요? 아닙니다. 누구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각자는 새로운 것을 시작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실패나 좌절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시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 주일 예수의[다시 사신] 부활을 축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겨우 그 새 생명의 작은 시작정도를 보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단지 그 평화의 첫 발걸음 정도를 내딛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완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바울은 빌립보에 편지합니다(빌1:6). 그러니까, 우리의 일은 시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5. 회의적인 자들의 희망
 
믿음은 그의 인생에서 희망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인간적 지성은 희망을 통해서 의미의 깨우침과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얻게 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신앙의 비참함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데에 있고, 희망이없는 곳에서 인간적 지성은 더 이상 지적이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죄나 병일까요? 먼저 “죄”는 도덕적인 결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어에서 볼 수 있듯이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말합니다. 단테는 그의 신적인 코미디에서 지옥의 입구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여기를 입장할 때, 가지고 있는 모든 희망을 먼저 지나가 버리게 하라.”
 
그러나 진리는 그 반대입니다. “만일 네가 모든 희망을 포기해 버린다면, 너는 지옥의 입구에 와 있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과 생명 앞에 죄가 될까요?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모든 죄의 원천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권력의 오만은 권세 잡은 자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다만 반쪽뿐인 진실입니다. 슬픈 진실의 그 다른 반쪽은 더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타성에 젖은 심장이고, 슬픔어린 자각이며, 용기 잃은 의지입니다. 그것은 유혹에 빠진 무기력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높은 곳에 두시고 자유롭고 넓은 곳으로 시야를 여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물러나려하고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새 창조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은 옛날에 머무르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것보다는 회의적인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라고 교부 크리소스톰이 일찍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겠습니까
 
모든 회의는 희망을 전제합니다. 아픔은 희망이 있어도 그것을 이루는 길을 알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생의 희망이 모든 점에 있어서 좌절되는 곳에서 희망은 인간을 등지고 그를 내적으로 갉아먹게 됩니다. “나는 도처에서 일자리를 구해보았지만, 모두로부터 거절당했다. 결국 아무래도 상관없어. 될 대로 되 버려” 라고 베를린에서 범죄한 어느 청년은 말합니다.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의미 있는 인생에 대한 아무런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알코올이나 마약 아니면 폭력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하는 일에 손을 대게 됩니다. “부셔버려라, 너희를 부수는 그것들을 부셔버려라”고 말입니다. 공동의 삶에서 희망이 사장되면, 종종 사람을 해치는 일들이 시작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회의에 빠져들게 되면, 모든 생의 희망이 좌절되고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의영혼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을 정도로까지 혼미해지지 않았습니까?’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십자가상에서 탄식할정도로 가장 깊은 회의에 빠져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회의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에로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지옥으로부터 그의 영원한 나라에로 높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하는 공동체에는 회의 속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도 역시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Tu es spes desperatis)”
 
저는 믿습니다. 제가 전후에 전쟁포로수용소의 비참하게 희망을 상실했을때, 그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모두 경험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후에 저는 아쿠이레이아[역자 주: 이태리 도시명]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을조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회의하는 자들의 희망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결 론
 
희망의 이유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공상이나 탐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여기에서 오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에 있습니다. Incipitvita nova, 새 생명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이유는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탄생에 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으로 새 생명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것은 희망의 이유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1절의 말씀처럼 “살아있는 희망에로”의 거듭남으로 옛것이 되었고 죄 짐을 진 생명이 새로워졌고 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희망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끝에서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마지막 이유입니다.
 
1911년에 불란서 시인 챨스 피기가 놀랄만한 시 하나를 썼습니다. 그 제목은 <희망의 비밀로 가는 문>입니다. 그 시에서 그는 기독교의 기본 세덕목인 믿음, 사랑, 소망을 세 자매로 비유합니다. 믿음은 그 당시와 그 영원에 대한 것을 봅니다. 사랑은 그 때와 영원에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희망(소망)은 그러나 모든 것을 앞으로 옮겨 놓습니다.
 
믿음은 보지만, 단지 장차 될 것을 볼 뿐입니다. 사랑은 단지 장차 될 것만을 사랑합니다.
...
희망은 아직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될 것을 봅니다.
희망은 아직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을 사랑합니다.
시간과 영원의 미래 안에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잊지 않습니다.
“작은 (자매인) 희망은 두 언니들 사이에서 앞서 걷습니다.
사람들이 단지 [작은] 그녀를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구원의 길 위에서, 구원의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두 자매의 사이 길에서
그 작은(자매인) 희망은 앞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고백은 “숨쉬는 한 희망한다”입니다

출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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