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
1. 어찌하여 뭇 나라가 모여들며 뭇 백성이 헛된 일로 술렁거리는가?
2. [어찌하여]지상의 군왕들이 전선(戰線)을 펼치고 권력자들이 함께 모의하며
야훼를 대적하고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메시아)과 맞서서 이르기를,
3. “그들의 족쇄를 벗어던지자! 그들의 사슬을 끊어버리자!”하는가?
4. 그러나 하늘에 계신 자는 웃으시며 나의 주님께서는 비웃으시는구나!
5. 참다못해 그가 분노하시며 격노하셔서 이르시기를,
6. “나는 <나의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기름 부어 세웠다.”하셨도다.
7.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야훼의 칙령을 선포한다. 그분은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나의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8. 내게 요청하라. 그러면 내가 뭇 나라를 네게 유산으로 주겠다.
그러면 네 기업(基業)은 땅 끝까지 이를 것이고,
9. 네가 그들을 철퇴로 질그릇 부수듯 부술 것이다.” 라고 하셨다.
10. 그러므로 이제 너희 왕들아, 슬기로워라. 지상법관들아, 지혜로워라.
11. 두려운 마음으로 야훼를 섬기고 떨리는 심정으로 그분을 찬양하여라.
12. 그의 아드님에게 입 맞추어라. 그가 진노하시면 너희가 길에서 망할까 두렵구나.
오, 그분(O, He !!)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행복할 것이다.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메시아 왕국의 건설에는 많은 거센 저항이 따른다. 지상교회가 ‘참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도 또한 많은 어려움과 저항에 부딪힌다. 즉 이 세상의 세상성은 메시아 왕국의 건설을 막으려고 안간 힘을 다한다는데 그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적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자는 냉소를 머금고 ‘같잖아 웃으신다.’라고 시편 2편 시인은 증언한다. 말하자면, 세상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이 세상을 두고서 하나님을 향하여 애원하듯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요 23:34)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메시아 왕국 도래의 지연(遲延)이란, 근본적으로는, 이들의 ‘소요’(騷擾)와 ‘저항’(抵抗) 때문만으로 생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의 기초’(마 16:18)로서 소명(召命)을 받은 우두머리 사도, 베드로에게서 더 기인(起因)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마 16:23; 23:13b,c)!! 특히 예수님은 그의 최측근(首弟子 베드로)의 애정 어린 휴머니즘(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지 말기를 간원하는 휴머니즘)을 단호하게! 책망하셨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즉 예수님은 속량적 십자가 수난을 만류하는 수제자 제자를 가리켜 ‘사탄’이라고까지 명명하시면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는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 16:22; 막 8:33)라고 힐책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현대의 주석가들 대부분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16:18)을 가리켜 예수의 직접적인 표현(ipsissima verba)이 아니고!! 후대의 첨가 문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예수님은 오늘의 지상교회와 같은 이런 기업화된 교회주의적인 ‘교회’창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지상교회들의 대부분은 그 머리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 즉 기업주의적인/교회주의적인 길(=예언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비판한 그 거짓교회이 길)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진정한 교회는 <메시아>(=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워서 자신의 대리자[surrogate]로 세우신 자)의 뜻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가리킬 뿐이지 오늘의 ‘교회주의적인 제도권 교회’와 같은 것은 전혀 전적으로 세우실 생각은 없으셨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러한 진의(眞意)를 왜곡(歪曲)시키는 자는 그가 메시아의 수제자(=베드로의 권위나 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나 즉 가톨릭의 전통이나 개신교의 전통아니 모두)라고 할지라도 그는 ‘사탄’(Satan or Satanism)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고 하겠다(시편 110:4[5]).
시편 2편은 이러한 이념과 신앙을, 기원 전 14세기만큼이나 아주 고대의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엘-아마르나’ 문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 이른 바, 이집트의 봉건군주(封建君主, the Egyptian suzerain)에 대항하든 시리아-팔레스타인 봉신들(封臣, Vassals)의 반역적 소요를 그 역사적-문학적 배경으로 하고서 그들 봉건군주들의 소요와 반역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을 유비(類比, analogy)의 소재(素材)로 하여 4세기 정도 후대 다윗 시대의 ‘메시아의 길’(Davidic Messianism)과 대적하여 저항하는 당시 지상(地上)의 모든 대적 자(對敵 者)들을 예언자적 비판의 형식으로 비판하고 있는 시(詩)라고 볼 수 있다(cf. Dahood, M., Psalms I, P. 8). 말하자면 이러한 반역 소요는 메시아의 철장(鐵杖)에 의하여 질그릇 깨어지듯 부셔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마저도, 비록 지극한 휴머니즘으로 위장되었다고는 하여도, 추호의 망설임이 없이 ‘사탄의 행위’라고 규탄하는 정죄를 그의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마 16:22-23, cf. 마 26:72-75)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도 이러한 오류를 억지로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의 이러한 양자옹립(養子擁立, 시 2:6,7)은 실로 이러한 예언자적 예견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들인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의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은 바로 이 시편 2편 기자의 예언자적/종말론적 경고의 바로 그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종말]이 온다. 나 주 야훼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오히려 야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그 날[종말]에는 사람들이 야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그 말씀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날[종말]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젊은 총각들이 목이 말라서 쓰러질 것이다.”(암 8:11-13)
“내 백성이 지식[하나님을 아는 지식: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호 6:6 ]이 없으므로 망한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야훼의 말씀이다. “무엇하러 너희가 내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자신을 보이려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너희는 단지 나의 [집의] 마당만 밟을 뿐이다!”(사 1:11-12)
너 사람아,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야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야훼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직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임마누엘 신앙]그것이 아니냐!(믹 6;8)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은 세상 군왕들과 통치자들의 반역 소요를 보시고는 같잖아 ‘비웃으시는 것’(God’s cynical laugh!)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시(詩)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요체(要諦)가 된다고 하겠다. 4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비웃음’을 강조하는 평행어법들로 표현하였는데, 히브리어 ‘사학크’와 ‘라아그’의 동의평행(同意平行)은 세상 군왕들과 통치자들의 그 대단한 저항의 소란과 위협 및 반란의 도모(圖謀)를 오히려 태연하게 조롱의 비웃음을 보내시는 야훼 하나님의 자세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바, 양자(養子)를 세운다는 것은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공관복음서는 일제히 한 목소리로!! 이 <메시아 세우심>에 대한 ‘문학적 표현’을 예수의 <세례 받으심>에 관련시켰다(막 1:11; 마 3:17; 눅 3:22).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12세 소년 때 이후부터 나이 약 30이 되던 때까지의 17년 공백기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갑자기 30세 성년으로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나와, 요단강의 세례자 요한 앞에 불쑥 나타나시고는 세례를 받으신 후, 곧장 광야로 물러가(retreat) 40일 간 금식(禁食)의 피정(避靜)을 하신 직후, 사탄의 시험도 너끈하게 이겨내신 다음, 그 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유다 땅에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공백기, 즉 13세로부터 30세 사이의 17년간 이라는 중요한 공백기를 누가복음은 “그(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눅 2:52; cf. 눅 1:80; 2:40)라는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하나의 전형적인 공식 표현어법에 따라(cf. 삼상 2:26; 잠 3;4) 묘사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넘어갔다. 이것이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 요한)의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소위 신약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바, 주인공 위인의 완숙한 성장(成長)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하는 구약의 전형적 화법으로 처리하고 그냥 지나쳐갔던, 이른 바,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以前)의 그 알려지지 않은 예수 청소년기 17년(소위, 예수의 잃어버린 공백 17년!)에 관한 문제가 새로운 논의의 도마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미 1984/1987년에 ‘섬밋’(Summit) 대학교 출판사를 통하여 엘리자벳 클에어 프로펫(Elizabeth Clare Prophet)이라는 한 여성 영성연구자(靈性硏究者)가 출간한 책, 『예수의 잃어버린 17년』(The Lost Years of Jesus: Documentary Evidence Jesus’ 17 year Journey to the East; New York: Summit Univ. Press, 1984, 1987)이라는 책은 이러한 궁금증에 관한 논의를 크게 부추기에 충분한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수수께끼 속의 17년을 인도, 네팔, 라닥(Ladakh), 티벳 등의 동양지역, 이른 바, 불교의 고장들인 동양(東洋)으로(동쪽으로!) 여행하여 불교 사상도 익히고 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기도 하였다는 것을 여러 가지 불교계 필사본(筆寫本; 聖 ‘잇사’[ St. Issa]에 관한 자료들을 근거하여 증언한 바가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와 불교 경전 사이의 서로 유사한 가르침들(예컨대, ‘긍휼’[기독교] 강조와 ‘자비’[불교] 강조의 유사성, cf. 눅 10:37)은 예수님의 이러한 17년간의 동양여행(東洋旅行; 인도에서 새로운 것들도 배우고 또 천국복음도 가르쳤었던 17년 餘酲?)의 결과였다는 주장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히, 4복음서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불교사상, 더욱이 요가(yoga, 瑜伽) 사상 등등에 관한 관심 보다는 히브리적인(Hebraism) 인간관과 유일신 신관,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구속사역(人間救贖使役)에 전적으로 관심하였고 그의 3년간의 공생애는 전혀 전적으로 여기에 집중하였다는 것이 4복음서의 통일된 관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들은(예수님의 ipsissima verba[예수님께서 친히 직접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의 텍스트]를 엄격히 가려내어 살핀다 하더라도, 간디의 친 기독교적 성향과 같은 것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현재의 나로서는 무리로 보인다.), 비록 예수님은, 분명, 사제 종교적(司祭 宗敎的)인 전통을 완성하시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어 십자가의 속죄제물[贖罪祭物]이 되셨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공생애의 삶은 오히려 형식종교 일반에 대하여 비판적인 예언자적 전통 위에 더욱 확고하게 서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속량적인 죽음’의 선택을 만류하는 수제자 베드로를 ‘사탄’이라고까지 즉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여 메시아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행위’라고 단죄(斷罪)하시기까지 하셨던 것이다(마 16:23; 막 8:33). 특히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제물용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예언자 이사야(사 56:7)와 예레미야(렘 7:11)의 말씀을 인용하여 저들을 호되게 꾸짖으셨던 것도 그의 예언자적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시편 본문 2:7-9는, 전적으로, 삼하 7:14의 예언자 신탁[나단 예언자의 신탁]과 직접 연결된다고 하겠다. 즉 선민(選民)이 하나님의 계약백성으로서 세계역사 속에서 취할 기본 정체성이란 신(神)의 양자(養子)로서, 이른 바,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cracy=토라에 의한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난해하고 신비한 한 어구(語句)인 삼하 7:19c, “주 야훼여, 이것은 ‘사람의 법’(토랏 하아담)입니다[혹은 ‘입니까?’].”라는 문제의 어구(語句)와 만난다. 그러나 현대 주석가들은 이 어구를 확실하게 해석하지는 못하고 있다.(cf. Schroeder, J.C.; Smith, H.P.; Hertzberg, H.W.; Arnold, B.T. et al.) 물론 스톨쯔(Stolz, F)는 “주 야훼여, 이것은 실로 인간에게 내려진 계시입니다.”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처리하고는 있으나, 그러나, 이 어구의 진의(眞意)를 명쾌하게 밝혀주지는 못하고 있다. 비록 이 말, 즉‘사람의 법’(토랏 하아담)이라는 이 말 자체의 그 구체적 의미를 추론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예언자 나단(나단 계약)을 통하여 선포된 바, 영원한 왕조로서 축복받은 다윗 왕조(메시아 왕국)의 ‘불확정적 미래’를 내다 본 신명기 역사가(dtr)의 염려 섞인 예견(삼하 7:20-29)일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예언자적 예견의 현실이 바로 시편 2편(1-12절)에 나타난 것이라고 나는 주석해본다.
세상은 메시아 왕국의 수립에 대적하여 대동단결하고 담합(談合)하여 저항하는 기질과 성향을 갖고 있다. 세상은 메시아 왕국을 ‘자신을 죄는 족쇄와 자신을 묶는 사슬’이라고 생각한다(시 2:1-3). 왜냐하면 세상의 제국주의 이념(理念)은 메시아의 평화왕국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직 인민 탈취를 통한 자기의 영달(榮達)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시리아-바벨론-희랍 로마-히틀러의 나치즘-스탈린의 스탈린주의-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세습 왕조체제 등등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이념은 메시아 왕국을 일종의 ‘족쇄와 사슬’(시 2:3)로 생각한다는 시편 2편의 증언은 매우 날카로운 비판분석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이즘(-ism)/이념 근본주의 때문에 이 지구는 정말 얼마나 고달파하여 왔던가?! 조선왕조의 당파싸움 역사와 오늘 한반도의 소모적 이념근본주의 양극화는 분명히 반(反) 메시아니즘이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 등등의 지상(地上) 삼대(三大) 유일신 종교들이 한 때 범하였던, 그리고 지금도 깨닫지 못하고 범하고 있는 바, 바로 그 타락한 반(反) 성서주의, 이른 바, 반(反) 경전주의도 또한! 다름 아닌 사악한 근본주의적인 반(反) 메시아니즘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반(反) 메시아니즘의 세력(=세속주의 세력)을 능히 철장(鐵杖)으로 깨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로고스’(하나님의 말씀)의 성육(成肉)이신 메시아(incarnated Messiah) 예수님이실 뿐이라는 것이 시편 2편 기자의 증언이요 확신이다.
왜냐하면 최종의 승리자는 ‘진실’이기 때문이고 그 ‘진실’은 ‘로고스’(=하나님의 말씀)만이며 이 ‘로고스’의 성육(成肉, incarnation)은 곧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 2편 기자는 이 세상 군왕들과 이 세상 법관들을 향하여서 ‘슬기롭기를’/‘합리적이기를’/‘야훼를 경외하기를’(하늘 두려워하기를)/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아와 입 맞추기를’ 권면한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길을 가로막으며 진실(말씀)과 대결하며 나가다가는 ‘길에서’(마 5:25, ‘길에 있을 때에[개역 개정판]’) 멸망할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태 16:23(막 8:33)에 나타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하게 된다. “너는 하나님의 법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법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유념하고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즉 “하늘에 계신 자의 웃으심”(시 2:4)이라는 의미의 문맥에서 볼 때, 이 시편 2편은 분명, 예언자적 비판력을 가진 메시지를 전하는 시(詩)라고 확신할 수 있다. 최근 한국정치의 상황은, 분명, ‘신의 웃음’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천만인의 비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좌․우의 극한적이고도 근본부의적인 이념대결(理念對決)은 국가의 미래를 전혀 생각지 않아 국운(國運)을 위태롭게 할 지경이다. 법의 족쇄를 아예 벗어 던지고 있고 양심의 끈을 깡그리 끊어 버리고 있다. 전혀 대책이 없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어느 분야에서도 희망의 빛이 비쳐 오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신(神)의 십자가 진통(陣痛)’을 통해 태어난 메시아의 철퇴(鐵槌)가 질그릇 부수듯 부수는 그런 엄청나 파괴력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카오스’ 정(頂)수리를 겨냥해 돌진해 오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떨면서 주님의 말씀(로고스) 속으로 우리 몸을 숨겨(묻어)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주께로 피하는 자는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시 2:12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