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우선 정치적 후진성을 말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선진국들에서 허용되고 누리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최근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 민주화의 과정에서 쟁취했던 사상적 자유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도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우방국가인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용인되는 공산당은 물론 진보적 정당의 존재나 활동도 국가보안법을 통해서 금지되거나 극히 제약된다. 단지 보수적이고 우편향적 사상이나 정당 그리고 사회단체들만 자유를 누리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비정상적인 격차사회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엄격한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정치적 후진성을 말할 때 이렇게 오랫동안 남북한의 민족적 분단의 극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분단은 유럽의 독일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국가들의 전쟁의 결과로서 생겨났다. 그런데 성숙한 정치적 문화를 가진 독일인들은 맹목적으로 미소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악순환에 매몰되지 않고 1990년 독자적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 물론 독일국민들은 이미 전쟁 이전에 이데올로기나 정치사상에서 대결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철학과 가치들, 장점과 단점들을 체득했었고 그것들을 놓고 서로 토론과 정치투쟁의 경험들을 겪었고 그것이 동서독간의 대결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경험이 천박했던 후진국 한국의 정치가들이나 국민들의 미성숙성은 1945년 해방 이후 강대국들에 의해서 강요된 분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에도 남북한의 미성숙하고 철학 부재의 정치지도자들은 강대국 외세에 맹목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분단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결국은 동족간의 잔혹한 전쟁까지 일으켰다. 또 다수의 외국 군대들이 이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대결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당시의 친미적이고 친소적인 정치지도자들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의 고통이나 미래를 외면한 채 오히려 통일지향적인 민족적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숙청함으로써 민족의 미래를 왜곡된 길로 나아가게 했다. 그 결과 남북분단 반세기를 훨씬 넘은 오늘날까지도 남북한은 서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양쪽의 정치가들은 그 분단과 대결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만을 챙기는 데 전념하고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매우 기괴한 일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망령들의 출현이다. 그동안 피 흘려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과들을 무로 돌리고 과거의 반민주적 독재의 망령들을 되살려 내려는 주술적 행위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선 한 예로서 독재와 부정선거로 추방 당해 하와이에서 죽은 이승만의 망령이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되살아난 것이다. 그 다음은 잔혹한 군사독재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갔던 박정희가 “근대화의 아버지”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박정희 독재시절에 독재를 위해서 고안했던 공공기관들이 다시 그 본연의 임무를 외면하고 정치에 관여하는 현상이 되살아난 것이다. 박정희가 김종필을 시켜서 만들어 국민감시, 반대자 탄압과 고문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했던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그리고 경찰, 군대, 심지어 보훈처까지 나서서 대통령선거에 개입함으로써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이들 이승만, 박정희, 김종필 등의 망령을 되살려내려는 주술가들 중 몇몇 수구적 사고를 가진 비이성적 역사가들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치시대에 히틀러를 메시야로 찬양했던 일단의 역사가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은 이명박 시절에 8.15광복절을 “건국절”로 만들어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조상의 시조로서 단군이 나라를 세운 건국일로서 개천절을 기념하는데 왜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1945년 남한만으로 선거를 치르고 생겨난 분단정부를 세운 것을 건국절로 기념하자고 하는가? 그렇다면 고구려, 신라, 백제는 그만 두고라도 고려를 세운 주몽이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건국의 아버지로 기념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남북한이 통일되면 북한이 나라를 세운 1945년 9월9일을 건국절로 하자고 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망령들을 되살리기 운동에 앞장서는 사람은 유영익이라는 비정상적 인물이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이런 비상식적 인물을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소위 이승만 찬양론자로 알려져 있고 “이승만, 독립과 부강의 기초를 다진 국가 창건자”(2012), “건국 대통령 이승만”(2013)이라는 저서와 “이승만, 건국과 집권에 성공한 외교 독립운동가”(2010)리는 논문 등 이승만에 대한 많은 우편향적 글들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5년 전 8월 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고치자고 한 장본인이다. 그래서 그는 박근혜 정부가 국사편찬 위원장에 임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이러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명희라는 공주대 교수가 주동이 되어 교학사라는 출판사를 통해서 한국사 교과서가 출간됐고 교육부 교과서 검정을 통과하였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반한적 인사들로 구성된 우익들이 출간한 역사교과서와 비슷하게 역사를 매우 우편향적으로 해석하여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건이나 연대 그리고 인물 및 문법 등에 대한 오류와 함께 교과서로서 갖추어야 할 객관적 사실들조차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받고 있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이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필자는 한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유영익이라는 국사편찬위원장이 - 그는 아마도 개신교신자인 듯하다 - 이승만을 성서와 기독교역사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해서 해석하는 데서 제기되는 문제점들을 몇 가지 지적할 필요가 있어서 이 글을 쓴다.
첫째 유영익은 이승만의 공로를 이집트에서 노예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낸 모세에 비교하고 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이집트의 파라오와 담판을 거쳐서 출애굽을 감행했고 추격하는 이집트 군대를 피해서 천신만고 끝에 홍해를 건너서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영익도 인정하듯이 이승만은 적국인 일본에서가 아니라 당시 안전한 땅 미국에서 해방의 투사가 아니라 소위 “외교적 독립운동가”로서 아무런 투쟁다운 투쟁이나 모험도 없이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모세는 출애굽이라고 하는 거대한 민족해방운동을 실현시킨 후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정치적 권력자가 되지 않고 팔레스타인 변경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그의 후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전권을 일임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모세와는 달랐다. 이승만은 일본을 패퇴시킨 미국의 지원을 얻어서 귀국하여 권력욕에 사로잡혀 정권쟁취에만 몰두했다. 그는 한민당이라는 친일적 보수단체를 등에 업고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만든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친일파들을 대거 정권에 기용함으로써 한국에서 친일적 수구세력을 온존시켜서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다방면에서 득세하는 세상을 만든 자다. 그는 또한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지향하던 정치지도자들, 예를 들면 김구선생 같은 이를 배후에서 암살하고,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함으로써 민족적이고 통일 지향적 정치세력들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토대를 만들어냈다. 그는 권력에 눈이 멀어서 대통령이 되어서도 장기독재를 획책하고 부정선거를 감행하다가 결국 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추방당했다. 모세는 이승만처럼 외세인 미국에 의존하여 국군통수권, 전시작전권마저도 미국에 넘겨주는 외세 의존적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승만을 모세와 비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둘째 유영익은 이승만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비견할 인물이라고 찬양했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 다져진 (개신)교회의 기반은 1960년 이후 남한이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부상하는 도약대가 됐다. 이는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적에 비유된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우선 간단한 오류부터 정리해 보자.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기독교국가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국가가 다른 모든 종교를 부정하고 기독교만을 국교로 정한 것과 같은 상항을 말하는데 한국의 헌법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한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는 것은 학자적 자질을 의심하게 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다른 종교 특히 유교나 불교 등을 다소 억압하고 개신교를 지원한 것은 사실이나 한국교회는 오히려 불교를 지원했던 박정희 시절인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군사독재시절에 급성장을 이루었다. 기독교의 성장은 어떤 정치세력의 지원 하에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기독교사상, 즉 자본주의적 기업성장론과 다단계적 판매 전략이 결합된 선교전략이 한국에 도입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확산을 이승만의 정치적 지원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은 오해다.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승인함으로써 첫째는 그는 가난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의 종교를 부유하고 권력자와 부유층의 종교로 만들어 어용화했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어용화를 가리켜 교회사에서는 “기독교의 콘스탄티누스적 일탈”(die konstantinische Wende der Christenheit)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가 예수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이탈했음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유산이나 잔재가 아직도 미국의 대통령선서의식이나 국가조찬기도회에 남아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적 개신교목사들이 주관하고 대통령들을 초청해서 벌리는 조찬기도회다. 이는 명백히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요 조찬기도회를 만드는 당사자들이나 대통령에게도 아무런 유익도 없는 타락한 행사이다. 둘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만을 유일한 공인된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기독교 성직자는 특권계급이 되었고 타종교의 성직자들을 체포 구금하거나 그들의 교회당이나 재산을 몰수하여 기독교의 것으로 만드는 행패를 부렸었다. 그 후부터 권세를 누리고 부유해진 기독교 성직자들은 타락해서 기도나 명상 그리고 선교 같은 종교 활동에 전념하지 않고 축재와 축첩 등 온갖 추행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는 불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의 원성을 샀고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만들어낸 타락한 기독교의 전통이다. 한국의 개신교인들, 특히 한국기독교총연합의 목사들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시절 누렸던 특권을 그리워하며 그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고급호텔에서 대통령 조찬기도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정치적 권력에 아부하고, 거기서 거지 나사로처럼 어떤 특권 부스러기라도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유영익이 이승만을 콘스탄티누스에 비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지만 정치지도자들이 불순한 동기를 갖고 종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같은 동기로 정치권력에 아첨하는 것에서는 서로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유착은 정경유착처럼 종교도 타락시키고 또 정치도 타락시킨다는 것을 유영익씨는 기억하기 바란다. 사실상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통치수단으로 이용했지만 자신은 죽어가는 침대에서 비로소 세례를 받았던 철두철미 정치가였다.
유영익은 또 이승만의 건국을 야곱이 하나님과 얍복 나루터에 나타난 하나님과 밤새도록 싸워서 달성한 성과(축복)와 비교하고 있다. 필자는 구약성서학자는 아니지만 야곱과 이승만의 비유는 과도한 견강부회(牽强附會)라 할 것이다. 다 알다시피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서 당시 맏형에게 아버지가 물려주던 장자권과 축복권을 온갖 야비하고 기만적 방법으로 가로채고 나서 형이 두려워 도망쳤다. 그는 부자인 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 집의 두 딸과 하녀들을 얻고 산다. 그는 영리한 삼촌에게 속은 것을 알아채고는 또 비겁한 방식으로 삼촌의 가축들을 가로챈다. 그는 화가 난 삼촌을 패해서 달아나 고향인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하나님(물귀신)과 싸워서 축복을 얻어낸다.
그는 사실상 형으로부터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챘으나 아버지로부터 재산도 물려받지 못했고 축복도 받지 못한 채 삼촌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마중 나온 형에게 일곱 번이나 절을 하고 “형님의 얼굴을 뵈니 하나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라고 온갖 굴욕과 아첨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성서의 구속역사에서 주류를 이루는 가계(家系)에 야곱 같은 이런 부도덕하고 야비한 인간군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칼 마르크스는 그의 딸에게 자가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야곱을 꼽았고 그의 고등학교졸업논문에서 에서와 야곱형제의 다툼의 도식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결(투쟁)이라고 하는 계급사회론을 역사해석의 원리를 도출해 냈었다. 따라서 유영익이나 칼 마르크스나 한 사건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는 있다. 그렇지만 유영익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물귀신과 싸워서 얻은 축복을 대한민국의 건국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사실적으로도 의미론적으로도 들어맞는 데가 없는 것은 필자의 무식의 소치일까?
어쨌든 역사학에서 중요한 세 요소들, 즉 역사적 사실, 역사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해석이라고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그의 “역사연구”에서 설파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들은 다양한 역사가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과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유영익의 해석도 가능하고 이기택의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결론 삼아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역사해석에 특정한 국가권력이 - 진보든지 보수든지 - 개입하거나 그것을 정치에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기관인 교육부가 그것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역사교과서 자체를 검정하고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문제이다.
필자는 모든 나라들이 초, 중, 고등학교의 교육은 의무적으로 담당하고 있지만 교과서들까지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등 몇 나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럽의 선진국들은 국가나 정부가 교육의 의무를 지지만 교과서를 통제하거나 검열하지 않는다. 한국이 국어과목이나 역사과목을 국정교과서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할 수 없는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검인정제도는 1911년과 1915년 일제의 강점기 식민지정부의 교육령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전통은 일제의 잔재로 남아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민주화된 한국에서 국정교과서들은 폐지되어야 하며 꼭 필요한 경우 다양한 역사해석 방향에서 저술된 검인정교과서 정도를 두어 학교에서 담당교사들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취사선택하고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를 검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