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심광섭의 미술산책] 율법과 복음

심광섭·감신대 교수(조직신학)

▲루카스 크라나흐, <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 1529.

종교개혁의 으뜸 사상은 칭의사상이다. 루터교회는 이 칭의 사상을 “교회를 세우기도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근본조항”, 곧 교회의 존폐가 걸려 있는 조항이라 했다. 교회의 죽음과 삶(死活)의 근거, 교회존재의 의의를 칭의에서 찾은 것이다. 칭의론이 무엇이길래 금과옥조처럼 그리도 중시했을까? 요즘 교회가 어렵다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한 통계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은 많이 해도 신학적인 접근, 곧 칭의론에 대한 세미나나 칭의론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개혁과 쇄신에 대한 특강은 전무하다.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면 칭의론을 다시 깊게 생각할 일이다.
 
칭의론의 핵심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인간의 공적은 전적으로 무효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 의간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의라는 발견이다. 칭의론의 사상은 교회에서 그렇게 많이 설교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하고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지금 구원을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사건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이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도 실적, 업적, 공적, 다양한 스펙에 따라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가? 사람이 아무런 공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정되었다’(You are accepted)는 말씀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실재가 현실적으로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존재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칭의 사상은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잉여인간이 증가하는 오늘날 인간의 삶과 죽음, 곧 인간의 존폐가 달려 있는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인간과 인간의 노동이 자본의 하수인이 된지 이미 오래, 생명 없는 물질은 공장에서 값있는 상품이 되어 나오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은 그곳에서 한갓 쓰레기로 변하고 만다. 노동자들은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귀한 인간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 도시의 아름다운 건물, 그곳에 잔열된 멋진 상품, 종업원들의 감동적인 감정서비스 뒤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심적, 물적 고통, 우울증과 자살이 있다. 사실 자본보다 이들이 먼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칭의론의 가르침은 이런 인간의 위기에 앞에서 인간의 근본 가치에 대한 가르침이다. 교회가 그 일을 맡아 할 때 교회의 존재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칭의론이 인간을 참된 자유에 이르게 한다고 선언했지만 현실에서 실재를 찾지 못한다면 두 가지 방향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업적이 현재 인간을 통해, 인간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일어나지 못하므로 죽은 다음 저 하늘나라로 이월되는 것이다. 현재 구원의 실체는 지극히 관념화되고 추상화된다. 교회는 그 틈을 타 세상보다 더 세속적으로 변질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서 구원을 위하여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는 교리적으로 칭의를 성화로부터 분리시키는 태도이며 율법무용론으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토마스 뮌처는 루터를 비판하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이름으로 외상을 그어놓게 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죄의 선술집에서 술값이 올라가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마셔대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이미 모든 것을 지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칭의를 성화로부터 분리한 은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까지도 값싼 은총으로 추락한다는 사실을 뮌처는 이미 헤아리고 있었던 것 같다.
 
칭의 사상은 “율법과 은총”이란 주제로 더욱 구체화된다. 종교개혁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는 이 주제를 20번이 넘게 반복적으로 그려 이 사상을 전파했다. 
 
이 그림의 왼편 하늘에 원형 구름에 둘러싸여 구체 위에 앉아계신 심판날의 그리스도가 손을 팔을 뻗어 에덴동산을 가리키고 있다. 지상의 숲에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어 원죄를 저지르고, 그림 전경에는 나신의 남자가 공포에 질린 채 옆구리를 향해 창을 든 해골과 사탄에 의해 지옥의 불구덩이에 쫓겨 가고 있다. 그 남자는 고개를 간절히 뒤로 돌려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데, 거기에는 흰 서판을 가리키고 있는 모세가 서 있다. 율법은 인간의 원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똑같이 나신의 한 남자가 그 옆에서 가리키고 있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따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향해 두 손을 벌려 경배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피는 사람을 향하고, 십자가 옆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괴물을 짓밟고 서 계시다. 악에 대한 예수의 승리, 곧 하나님의 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서방교회의 칭의론은 죄를 일방적으로 행위자(행악자, 가해자)들에게 제한시켜 그들이 지은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으로 끝남으로써 희생자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간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몰트만의 예리한 비판적 인식이다. 오늘날 칭의 사상은 “하나님의 의”(롬 1:17)의 문제임을 재인식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권리를 회복하여주고, 불의한 자들을 바르게 만들며, 궁극적으로 양자가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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