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설교 후의 환상>, 73x92cm, 1888. |
사는 게 별거겠니
추억하며 잊어 가는 일
죽고 싶다가 살고 싶은 일
감정의 시소 타며 하늘 보는 일
사는 데 가장 큰 고통은 욕망이야
야곱이 씨름 후에 축복받고
하나님의 얼굴도 보았다고
사는 데 이런 일이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일어난다면
慶事스런 생의 好事 아니겠니
고갱의 이 그림은 성경의 이야기를 현재로 옮겨 놓는다. 과거의 그 이야기가 지금 여기로 옮겨질 때 그 이야기는 직접적 실재에서 환상, 아주 강렬한 환상이 된다. <설교 후의 환상>이란 이 그림의 제목처럼.
고갱이 꾼 환상에 여러 명의 브르타뉴 여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여인들은 한 교회의 예배에서 ‘천사와 씨름(투쟁)하는 야곱’에 관한 설교를 지금 막 듣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이 설명할 수 없는 씨름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일어난 사건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듯하다.
이 그림은 화면을 다루는데서 일본 판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화면은 우측 아래로부터 대각선을 가로질러 왼쪽 상단으로 쭉 뻗어 있는 나무줄기로 양분되며 여인들이 보고 있는 야곱과 천사의 씨름은 호쿠사이의 스모 선수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로지른 나무줄기가 물질적 현실과 내면의 환상을 가르지만, 그 둘은 한 화면 안에 모두 그려져 있다. 화가는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역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환상은 여전히 환상일 뿐,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고갱은 브르타뉴 농부 여인들이 주일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의의는 환상의 꿈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찾는 것일까. 환상과 실재 사이에 걸려 있는, 현실 속에서 출몰하는 듯한 씨름판을 향하여 왼쪽 상단에 출몰하는 작은 황소는 환상의 순간에 실재의 비현실성을 폭로하려는 듯 서서히 달려오는 것 같다.
그림의 왼쪽 전경에는 예배를 마치고 나온 흰 두건을 쓴 브르타뉴 여인들이 그려져 있다. 어떤 여인은 무릎 꿇고 두 손을 꽉지 낀 채 기도하고 있으며, 어떤 여인은 눈을 감고 두 손은 앞에 모은 채 기도드린다. 오른 쪽 맨 앞의 여인들이 쓰고 있는 투가같은 모자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오직 한 여인만이 눈을 뜨고 환상의 세계와 현실을 서로 교감한다.
씨름하는 천사의 노랑 오렌지 색깔 날개는 사람이 이길 수 없는 힘을 과시한다. 이 그림과 함께 동년(1888년)에 그려진 <황색 그리스도>는 퐁타방(Pont-Aven)에서 그린 고갱의 상징주의의 대표작이다. 사실 이 작품을 계기로 1888년 이전(인상주의)과 이후의 그림(상징주의)의 양상이 달라진다. 이 작품으로 고갱은 형태를 단순화하고 강렬한 색체를 사용하는 새로운 회화양식을 선언한다. 이로써 고갱과 퐁타방에서 그를 따르던 젊은 화가들이 표방한 종합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단지 천사와 씨름하는 야복을 예시하는 수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미술계에서의 자신의 인정욕(認定欲)을 드러냈으리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미술의 새로운 길을 그렇게 치열하게 탐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싸움(투쟁)은 이상(환상)에 다다르고자 하는 인간 욕망,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 도처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려고 하는 거룩한 욕망의 투쟁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