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손규태 칼럼] 은혜의 절기로서 성탄절

손규태·성공회대 명예교수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해마다 어김없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대강절이 지나면 성탄절은 찾아온다. 2013년에 찾아오는 이 성탄절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가장 부유한 나라 뉴욕의 할렘가의 가난한 흑인들, 남미의 콜럼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빈민굴에서 신음하는 어린이들.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에 시달리는 난민들, 인도의 뉴델리의 빈민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서울 구로동의 쪽방 촌에서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성탄절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  맘몬의 광기가 온 세계를 휩쓸고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성탄절은 어떤 의미를 닦아오는 것일까?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하는 천사들의 찬송과 더불어 찾아오는 예수의 탄생인 성탄절은 60여 년 동안 남북한이 분단되어 서로 불신하고 증오하며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성탄절은 온 인류에게 화해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평화의 왕” 아기 예수를 기리는 절기이다.
 
이 화해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내세워 장차 자기의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 2:18-19).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것을 천명한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을 요약한 것으로 그 주제어가 되는 것이 바로 표준번역 성서 “은혜의 해”라 할 수 있다. 이 은혜의 해란 포로가 된 자들이 해방되거나 감옥에 갇힌 자들이 사면을 받고, 억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을 뿐만 아니라 눈이 면 자들과 같이 신체적 고통을 받거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값없이 치료를 받고 가난한 자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말한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은혜의 해가 도래함으로써 정치적 평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평화”(social peace)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란 말은 바울사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세계경륜, 즉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 사건이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을 가장 중심적으로 해석되었다.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로마서 3:25).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 인해서 인간을 죄와 사망의 세력에 맡겨두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인간의 과오를 묻지 않고 값없이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것이 바울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인간은 값없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총중심의 구원론은 그 후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와서 한층 더 강조되었다. 그는 당시 하나님의 은혜에 더해서 인간의 업적도 주장했던 그의 신학적 적수였던 펠라기우스의 사상인 신인협동론(synergism)에 대항해서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강조했고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심판을 받았었다. 그러나 중세기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에서는 이 은혜론이 철저히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 신학의 표준적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아퀴나스의 토마스는 “자연과 은총”이라는 도식을 통하여 다시금 펠라기우스의 신인협동설을 수정해서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가 플러스 되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공로, 즉 업적이 보태져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의 가톨릭의 해석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의 대원칙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창하였다. 인간은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공로(업적)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힘입어서 오직 그리스도가 베풀어준 은혜를 믿는 것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혜만”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만”이란 도식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은혜론과 믿음론은 종교개혁 다시 칼뱅에 의해서 하나님의 “절대예정론”으로 변용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주창했던 칼뱅은 이중적 예정론을 주창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구원받을 자들과 저주받을 자들을 미리 예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뱅의 이중예정론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나 노력(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의 뜻을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인간은 선행을 할 능력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네덜란드에서는 예정론 논쟁을 일으켜 국민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인간의 자유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상대적 예정론자였던 아르메니우스(Armenius)가 기계론적 절대 예정론자인 고마루스(Gomarus)에 의해서 피소되어 도르트렉히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기도 했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론(혹은 대속론, 그리스도의 속죄론)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향에서 논의되고 있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책 “나를 따르라”(그리스도의 제자직)에서 당시 독일교회에 만연하고 있던 사조 즉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사고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참회 없이(자기 노력 없이) 공짜로 구원받겠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공로로 자기들은 아무런 신앙인으로서 참회나 세상에서 섬기는 삶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일은 예수에게 떠넘기고 자기들은 편안하게 부활이라는 영광만을 차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러한 은혜론을 둘러싼 논의들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신학계에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다. 그것은 특히 절대적 은혜론의 다른 표현인 대속론(代贖論)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감리교 신대의 이정배교수에 의하면 초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다석 유영모나 함석헌 그리고 복음교회 창시자인 최태영과 같은 선구적 인물들은 대체로 서양의 신학의 거장인 루터나 바르트의 객관적 대속론적 입장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주관적 자속론(自贖論)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신인협동설이나 아르메니우스의 자유의지론을 훨씬 능가하는 해석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을 담은 모범적 인간으로써 살았었고 하나님의 씨알을 자기 안에 담고 그를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곧 구원의 길에 있다는 식이다.
 
이러한 자속론적 논리는 민중신학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서남동교수는 예수의 대속적 메시아론을 부정하고 민중의 자속적 메시아론을 주창함으로써 하나님의 씨알인 민중이 각성하여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구원(自力救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상 이러한 대속론 혹은 속죄론은 초대교회 영국의 신학자 캔터베리의 안셈(Anselm)이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주창한 것으로서 마귀(죄)의 포로가 된 인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대속물(속량물)로 대신 주어서 사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당시의 서구의 사회적 배경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로서 독일의 라인 강변에는 수많은 성채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기사들의 성채도 있는데 거기에 사는 난폭한 기사들이 주변에 있는 영주들을 납치하여 성채에 가두고 몸값(ransom)을 받고 풀어주는 예들이 많았다. 즉 기사들에게 감금당한 영주들은 그 가족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구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안셈은 자기의 이론을 몸값이론(대속론)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2013년 오늘날 자본주의적 업적사회가 낳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갈등과 모순의 시대를 넘어서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적 시대를 전망하면서 “은혜의 해”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의 탄생사건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는 이 은혜라는 말이 갖는 종교적 의미를 사회-정치적 의미에서 되새겨 보자. 우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은혜론으로부터 시작하자. 그는 1517년 종교개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는 “95개조 논쟁문”에서 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에서 만들어진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물인 “면죄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는데서 출발한다. 인간구원은 인간의 공로사상(업적주의)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Gratia)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아르메니우스파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자속론자들이나 자력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단으로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은혜론의 정치신학적 해석은 특별히 보수적인 개인구원이나 영혼구원론보다 진보적인 사회적 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꼭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업적사회에서 인간들의 구원이란 무자비한 치열한 경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성과와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업적사회에서 어린학생으로부터 직업인들이나 기업인들 할 것 없이 어떤 성과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란 없다. 그들은 돈(맘몬)을 벌기 위한  경쟁에 내몰려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무자비한 수단들을 동원하고 마침내 몰록신(죽음의 신)의 제물이 되고 만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가는 길이 바로 몰록신에게 자기를 바치는 행위로서 자살을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자본주의적 업적 사회에는 인간들 사이에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없고 오직 상호 불신과 적대감에 사로잡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인간들로부터의 은총이이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업적(공로)사회를 은혜사회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 모두가 같이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즉 진정한 의미에서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업적사회를 극복하고 은혜사회를 지향했던 모델은 이미 신약성경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원시 공산주의적 공동체상에서 나타난다. 신도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서 내놓고 서로 나눔의 공동체로 살았었다. 여기서 자기 재산(사유재산)에 집착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범법자로서 배제된다. 그리고 18세기 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두었던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은혜의 사회모델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업적(공로)사회요, 사회주의는 은혜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혜를 주창해야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주의라고 하면 치를 떨고 오히려 예수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맘몬의 사회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있다. 그래서 교황은 자본주의는 타락한 사상이라고 했던 것이다.
 
2013년 성탄절, 은혜의 해를 맞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은혜,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이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복지사회를 꿈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인간들의 은혜를 지향하려고 했던 소련중심의 사회주의는 맘몬숭배자들인 미국의 자본주의의 외적 공세와 은총이 아닌 율법에 의한 강제적 국가사회주의 내적 모순들에 의해서 실패했다. 그러나 서부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제국들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자발적 자비와 은혜를 지향하는 인간적 사회주의 혹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은혜의 사회를 지향해서 사람들은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정도로 공동체적 구원, 즉 땅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계절인 성탄절을 맞아 업적지상주의라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격차가 극심한 이 한국 땅에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간들의 자비를 같이 나누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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