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종교의 정치참여 불가피…사회갈등 조장 지양해야”

[특집대담] 종교와 정치, 관계를 묻다- 이원규 교수편

본지는 갑오년 신년특집으로 ‘종교와 정치, 올바른 관계를 묻다’란 주제의 대담을 진행하고자 한다. 지난해 말 현 정권의 행보에 반기를 들며, 종교계에서 일제히 비판적 정치참여 활동을 벌인 것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정치참여 활동을 두고는 국민들 뿐만 아니라 종교계 내에서 조차 여전히 그 활동의 폭이나 깊이를 둘러싸고는 이견이 있는 게 사실이다. 또 한국사회 내 특정 정치 아젠다와 연계해 종교 집단 내 진보와 보수가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소모적 성격의 종교 집단 내 대립은 각 종교에 몸 담고 있는 종교인들을 지치게 하며, 때론 갈등마저 유발하게 한다. 이번 대담에서는 ‘종교가 우리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보존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종교가 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얼마 전 은퇴식을 가진 이원규 감신대 교수(종교사회학)를 그가 30여 년 이상 봉직한 서울 냉천동 감신대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 종교 집단 내 종교의 정치참여 형태를 놓고 입장차가 분분합니다. 보수 집단에서는 성직자가 목양에 일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진보 집단에서는 (성직자가)불의에 항거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잃어선 안된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전자는 정치에 관심 끄라는 것이고, 후자는 관심을 가지라는 말인데 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우선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요. 정치와 종교가 역할과 기능은 다르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한 사회 안에 다양한 제도가 있는데 거기에 정치 제도도 있고, 종교 제도도 있고, 사람이 살다보면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종교 문제와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라는 것이 이 세상과 담 쌓고 도피적인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이처럼 현실 속에 존재하기에 어떤식으로든 정치, 경제 등의 문제와 관계를 맺게 되어 있어요. 종교가 이 세상적인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종교는 이 세상 안에 있는 한 불가피하게 이 세상적인 것에 이렇게 저렇게 관계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죠. 두 영역은 관계가 없다거나 혹은 분리되었다는 견해는 전제가 잘못 되었다고 봐요. 인간은 쉽게 말하면 정치적 동물이기도 하고, 사회적 동물 또 종교적 동물이니까 종교라고 하더라도 정치, 경제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문제들을 신앙과 분리시킨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럼 다음 단계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 ‘정치’가 무엇이고, ‘참여’가 무엇이냐고 정의함에 따라 다양한 이해가 있을 수 있어요. 우선 정치라는 것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회생활, 사회관계, 그 모두를 아우르는 국가적 행위를 뜻한다고 할 수 있어요. 좁은 의미에서는 어떤 특정한 권력집단이 통치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정권과 관련이 되어있는 통치행위, 정부 등 특정 집단과 조직의 활동으로 그 범위가 좁혀질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종교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 그 범위는 어떠해야할까요. 직접 통치에 가담한다든지 정부와 밀착해서 국가 종교를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앞서 말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 참여는 종교가 해야 할 영역을 넘어선다고 봐요.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 모든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라면 종교는 얼마든지 참여하여 정치에 동조하거나 비판을 하며 다양한 형태로 종교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종교가 정치와 관계할 때 정치를 통해 종교가 이득을 추구한다든지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직접 종교가 정치를 행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정치참여는 종교의 역할을 넘어선 것이라고 봐요. 그러나 그 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 평등, 자유, 인권 등 성서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인간 삶의 필수불가결한 가치에 관해서는 그런 가치들이 정치를 통해 제대로 실현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종교가 항상 감시하고, 검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견제하는 역할들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참여라면 종교의 의무가 아닐까요? 예언자적 역할 말이죠. 이렇듯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참여라면 당연히 종교가 참여해야 합니다. 
 
▲이원규 감신대 교수는 종교가 사회 구성원으로 남아있는 한 정치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바람직한 종교의 정치참여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또 정치참여 방식도 다양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요. 극단적 경우에는 종교가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행위를 해보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요. 아니면 정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항상 비판하고, 견제하고 거기에 어떤 도덕적인 방향을 설정해 주는 그런 참여적인 개혁적인 방법으로 정치와 관계할 수도 있어요. 정반대로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며 침묵을 지키는 입장도 있을텐데요. 저는 이러한 입장 역시 종교의 정치참여라고 봐요. 왜냐하면 침묵한다고 하는 것은 현재 질서에 대한 암묵적인 동조거든요.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현상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니까 그것도 암묵적 정치참여라는 것이죠.

이렇듯 다양한 정치참여 방식이 있는데 양극단은 좀 배제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극단적으로 종교가 정치와 결탁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그런식의 밀착된 관계는 종교의 본래 정서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바람직하지 않아요. 또 정치참여 해선 안된다며 침묵지키는 것은 종교가 이 세상을 보다 더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꿔가야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에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양극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적절한 종교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는 바람직하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봅니다.” 
 
- 정교분리 원칙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간섭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라고 오해를 해서 종교의 정치참여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우리사회의 정교분리 원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는 몇 가지 모형이 있어요. 종교가 정치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정치 위에 군림하는 모델. 중세기 유럽이 그런 모델이죠. 중세 가톨릭이 국가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종교적 이념에 의해서 모든 국가의 통치 행위가 이뤄진 바 있죠.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이 신정정치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모델이거든요. 종교가 정치 위에 군림해서 통제한다는 것은 사회 정치적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모델이에요. 종교가 정치화 되는 것이니까요. 어떤 정치적·사회적 자율성이라는 것이 통제가 되기 때문에 종교적 이념에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체제 하에 굉장히 심한 통제와 압제를 받기 때문에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에요. 종교의 기본적인 정서도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요. 
 
반대로 정치나 국가가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종교를 통제하는 모델이 있어요. 공산주의, 전체주의 국가를 말하는 것이죠. 그 경우에는 국가가 종교를 국가정책 시행의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려 합니다. 국가와 종교가 종속관계에 놓여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신앙의 자유라는 게 배제되니까 그것도 또 다른 측면에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죠.  
 
지금까지 그래도 그 관계에 있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정교분리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분리라고 하는게 정치와 종교가 서로 관계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의미는 서로 고유의 영역을 인정하자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정치는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누구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 행위에 대해 통제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놓고 신앙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라는 것입니다. 종교도 국가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법이라는 것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종교가 국가를 부정한다든지 법을 무시한다든지 할 때에는 정부와 국가의 개입을 불러일으키게 되거든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질서를 흔드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종교가 갖춰야 할 것은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리되 법 테두리 안에서 그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원규 감신대 교수는 정교분리 모델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원칙이라고 강조하며 정교분리란 상호간에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역설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국가나 정치가 각종 정책을 펴나감에 있어서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종교가 국가 정책이나 이념에 대해서 이런식으로 되어야 한다며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접근하고 간섭하면 사회가 굉장히 혼란해질 수 있어요. 더군다나 다종교 사회에서 각 종교들이 각각의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정치에 압력을 행사하면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정치는 그런 면에서 종교의 간섭을 받아선 안되고 정치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해요. 이처럼 정교분리라는 것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상대방의 역할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의 분리죠. 
 
그렇다고 마찰이 아예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이것은 분명히 부도덕하고 비신앙적 정치행위라고 할 때는 아무리 정교분리라지만 어떤 식으로든 (종교의)정치참여가 이뤄지는 것이죠. 비판적 입장을 취하든 개혁 운동을 전개하든 체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운동을 하든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정치 입장에서는 종교가 반사회적 행위를 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법을 지키지 않고 그럴 때는 보편적 질서와 안녕을 위해 종교에 개입을 하게 되겠죠.” 
 
- 성직자가 강단에서 강론이나 설교를 할 시 수위 높은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이를 놓고, 성직자의 노골적인 정치참여 활동이 정치적 성향이 제각각인 종교인들 간 분열을 야기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예배시 등장하는 성직자의 정치적 발언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봅니까. 
 
“성직자 정치적 발언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 정치적 발언은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봅니다. 종교인은 정치가나 시민운동가와 다르거든요. 종교가 정치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정치의 정신이라든지 원리에 대해서 제시해 주고, 이끌어주고 그것을 비판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정도입니다. 너무 구체적으로 정책 하나 하나까지 간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정책 하나 하나에 대해서 어떤 입장에 서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정치가가 할 일이지, 종교인이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종교인이)비판하고, 얼마든지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공동체적 인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이런 방향으로 모든 것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 입장이 극우, 극좌 색깔이 너무 선명한 구체적인 세부 정책 하나 하나에 대해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정책은 찬성 혹은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종교인이 하기에는 그 영역을 벗어나는 것 같아요. 개인적 입장에서 종교인이 할 수는 있어도 성직자는 그렇지 않거든요. 성직자는 다양한 신도들 앞에 가장 기본적인 것을 얘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직자가 너무 구체적으로, 정책적 문제, 체제에 대한 문제까지 나서서 얘기하는 것은 성직자의 역할을 넘어선 것이라고 봐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떤 성직자가 강단에서 "정권 퇴진해야 한다"고 발언을 하는데 굉장히 도에 지나쳤다고 봐요. 왜냐하면 정권 퇴진이라는 게 옛날 군사 정권 때에는 설득력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정통성이 없는 체제니까요. 국민이 선택한 정권이 아니거든요. 그 때에는 정권 퇴진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고,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있겠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직접 선거를 통해 정권을 선택을 하는 시대인데 그것에 대한 판단은 선거를 통해 이뤄져야 하고, 국민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잖아요. 종교인들이 자기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구체적으로 정권 퇴진을 얘기하며 선동적 언행을 하는 것은 도에 지나쳤다고 봐요. 성직자는 공인이고, 교인들의 정서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거든요. 선동가 역할을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고, 그래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그것이 달라지고, 고쳐지고 개선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겠죠.
 
선거를 통해서 심판하면 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현 정권이)잘 가고 있다, 잘못 가고 있다.’ 이런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까지 좋아요. 그런데 그것 이상 더 나아가서 어떤 구체적 행위를 유발하고,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너무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언자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는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원규 감신대 교수는 성직자의 정치적 발언 수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적어도 성직자는 공인의 위치에 있기에 그가 기본을 가르쳐야 할 신도들 앞에서는 정치적 발언을 원론적인 선에서 그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 우리사회 정치 아젠다들 자체가 가치 중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에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만 흑 아니면 백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가치 판단이 익숙해 지고 있습니다. 그 위험성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우리 한국사회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갈등 구조를 뽑을 수 있어요. 지금 보면 한 사회의 구조를 평가하는데 크게 두 가지 모델이 있어요. 하나는 통합 모델과 다른 하나는 갈등 모델이에요. 통합 모델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 간 합의가 이뤄지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모델이 통합 구조를 뜻합니다. 한 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다양성 속의 일치여야 한다고 봐요.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고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적어도 인간 세상에서 바람직한 사회 구조라고 봐요. 
 
우리 사회는 그런데 그런 부분이 전혀 없어요. 그저 갈등 구조에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끊임없이 긴장, 대립, 투쟁만 있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 너무 극단으로 치우치고 있어요. 우리 사회를 보면 모든 관계가 갈등으로 설명이 되잖아요. 노사갈등, 계층갈등, 지역갈등, 민족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우리 사회는 완전히 갈갈이 찢어져서 크게 병들어 있다고 봐요. 단일민족, 단일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인데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나 다르다는 것을 틀리다고 보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고착화되어 있단 말이에요. 물론 그런 분위기를 조장한 것은 과거의 통치자들이 그런 것을 이용한 것도 있고, 또 여러 이익집단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험악한 대립 구도를 끌고 간 안타까운 역사도 있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 정치, 경제 지도층 인사들이 이렇게 편가르기를 해 놓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종교까지 그 갈등의 한복판에 들어가 화합하고 일치하는 데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부채질하고 있단 말이죠. 부채질을 해서 패싸움을 하게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부분은 종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인데 종교마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잖아요. 사실 종교인들은 배타성이라든지 극단적 이분법적 논리가 더 강해요. 왜냐하면 종교인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믿음을 절대적이라고 보고, 자기가 절대선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만이 절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우월주의, 독선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종교인들이 갈등 구조 속에서 어느 한편에 서게 되면 대립과 갈등의 분위기가 더욱 더 격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보수나 진보나 마찬가지에요.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절대악, 절대선이라며 흑백 논리에 따라 분리시키는 작업을 종교가 한다면 전 그것이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종교가 올바른 말은 해야하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와 존중의 마음을 갖지 않을 때에는 사회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종교끼리 긴장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제라도 ‘다름’을 인정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그리고 ‘무엇이 다른가 내 입장은 이것이다, 너의 입장은 무엇이냐’ 등 어떻게든 함께 가려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너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고, 우리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독선 같은 것에 종교가 물들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앞으로 종교가 진짜 해야할 일은 노사갈등, 지역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계층갈등 거기에 들어가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봐요. 갈등의 현장에 있는 구성원들을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만드는 피스 메이커의 역할을 종교가 떠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정신, 예수는 중보자 아니었던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혔던 담을 허물고 하나되게 하는게 예수의 역할이었거든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야할 일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어느 한편에 서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양쪽을 하나되게 만드는 화합과 상생의 역할 말이죠. 지금 현재로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세력이 마땅이 없어요. 할 수 있다면 종교가 해야 하는데 그것을 종교가 못해내고 있어요.” 
 
- 한국사회 내 정치 이념 논쟁을 종교적 보수, 진보가 답습하고 있는 구태를 자주 목격합니다.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종교적 보수 집단이 자신들의 이념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진보 집단을 공격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굶주린 북한 주민을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문제는 그 좋은 예로 보입니다. 종교가 이러한 소모적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려면 우선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이원규 감신대 교수는 종교의 정치참여에 있어 양극단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중간그룹의 건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와야 할 때라고 말했으며, 자신 역시 그런 중간그룹의 참여자라고 했다.
“우리 사회도 양극단으로 가서 중간그룹의 힘이 약해요. 양자택일을 하게 만드는 문화가 강해요.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회색분자라고 몰리죠. 그러나 사실 어느 사회이든지 중간그룹이 튼튼해야 양극단으로 가지 않고 갈등을 극복할 수 있거든요.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극단적 보수주의나 극단적 진보주의를 다 배제하고 그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그런 중도적 입장을 가진 종교 운동이 좀 일어나면 좋겠어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대화합의 장을 만드는 그런 종교 운동 말이죠. 그런 중도적 입장에서 상생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세력이 커져야 한다고 봐요.
 
극단적 진보나 보수는 다수는 아니지만, 극단적이기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냅니다. 때문에 그게 한 세력을 대변하는 것처럼 우리사회에 비춰지죠. 때문에 (중간그룹의)침묵하는 다수의 의식을 변화시켜 내야 합니다. 더이상 중간그룹이 침묵하지 말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종교의 기본 정신인 사랑, 용서, 이해, 화합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운동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는 침묵했던 다수가 더 이상 이러한 양극화된 분위기를 방관하지 말고, 중간지대의 폭을 넓혀가며 양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의 시민운동이든 신앙운동이든 간에 그런 힘이 점점 그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고 봐요.” 
 
- 우리 사회 그리고 종교가 ‘다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지 교수님이 언급한 바와 같이 각종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세상에 엄존하고 있는 ‘다름’을 끌어 안고 화합의 사회, 화해의 종교로 나아가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사회든 종교든 새로운 운동이 필요할 때라고 봐요. 지금까지는 나와 다른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려 했냐면 약점만 발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상대방의 장점도 있거든요. 하지만 장점은 안보고, 서로 상대방의 약점만 잡고 물고 늘어져왔어요. 예를 들면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있잖아요. 산업화 세대는 옛날 군사정권, 박정희 정권 우리나라 경제성장 기여했다고 내세우지만 민주화 문제는 취약점이란 말이죠. 또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에는 공헌했지만 산업화,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내립니다. 산업화 세대는 민주화 세대에 우리가 경제 성장을 위해 달리오기만 했지 민주화를 위해 기여한 바 없는데 당신들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것 참 고맙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또 민주화 세대는 경제성장 발전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별로 없었다. 우리가 못했던 경제성장 발전을 위해서 여러분 세대가 수고하고 노력해 주어 고맙다고 말해 줄 수는 없을까요? 서로 상대방을 인정해 주면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되는 것이거든요. 
 
종교도 마찬가지인데 교회를 예를 들어보면 진보와 보수 교회로 갈라져 있죠. 서로 상대방의 단점만 물고 늘어지고 있어요.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보고 옛날 군사정권 때 거기에 동조하던 세력이었고, 따라서 반통일 반민족 반민주 세력이라고 공격한단 말이에요. 또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향해 너네가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기여한 게 무엇이냐 아무것도 없다고만 지적합니다. 이것을 바꿔 보자는 것이에요.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우린 민주화를 애썼지만 한국교회를 성장시킨 데에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당신들이 한국교회를 이만큼 성장시킨 것 참 수고했다고 격려해 보고 말이죠, 보수주의자들은 한국교회 성장시키느라고 한국사회 민주화를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데 당신들이 민주화를 위해 공헌했으니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칭찬도 해보란 말입니다. 이렇듯 상대방의 잘한 것을 인정해 줄 수 있다면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상대방은 다 틀렸고, 문제만 있다고 보니까 대화가 안돼요. 상대방에 대해 적대감만 생기고, 상대방을 타도 대상으로 삼기만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없는 장점이 상대방에게 있고, 그들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다고 인정해 주면 마음이 열리게 되거든요, 그러면 대화가 되면서 상보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한쪽은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한쪽은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요. 
 
성장과 분배의 문제도 마찬가지잖아요. 성장이냐 분배냐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필요합니다. 둘이 같이 가야 하는데 한쪽은 성장만 붙잡고 늘어지고, 또 다른 한쪽은 분배만 붙잡고 늘어져요. 한쪽 가치가 의미 있듯이 다른 한쪽의 가치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서로 힘을 모으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으로도 보수, 진보가 싸우는게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게 있는 것인데 왜 그렇게 상대방을 죽이지 못해서 그럴까. 상대방의 공헌을 인정해 주고 우리에게 없는 것 너희에게 있으니까 도와달라. 너희에게 없는 것 우리한테 있으니 도와주마. 이렇게 갈 수 없을까요. 
 
사회도 그렇지만 종교도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목사님들 상대로 강의할 때 그런 얘기를 꼭 합니다. 보수적인 목사님들 앞에서는 여러분들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서 크게 기여했지만, 여러분들이 비판하는 진보 그룹 목사들은 우리 사회 정치, 경제 민주화를 위해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제 수고하고 고생했다고 칭찬을 해주면 어떻겠는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성장과 민주화가 손 잡고 갈 수 있지 않겠냐고 제안합니다. 또 진보 그룹 목사들 앞에서는 당신들이 한국 정치, 경제 민주화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은 사실인데 한국교회 이 만큼 성장시킨 것은 보수주의자들이라는 것을 환기시켜 줍니다. 비판만 하지말고 교회 성장시키는 것은 피 땀흘려 수고한 것이니까 그것은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자는 것이거든요.”
 
- 종교가 한국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어떤 정치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원규 감신대 교수가 한국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종교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소명에 대해 견해를 밝히고 있다.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향점, 목표가 나오죠. 각 국가나 사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것 같아요. 어떤 사회냐에 따라서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내용과 방식이 다를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한국적 상황에서 살핀다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기본적으로 우리사회 가장 큰 문제가 도덕성 문제와 공동체성 문제라고 봐요. 공동체성 문제는 하나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도덕성 문제. 정치 권력, 경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있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봐요,
 
그러면 우리 한국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 종교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 가치는 무엇일까?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는 정치적 민주화입니다. 과거보다 상당히 민주화 되긴 했지만 아직도 민주화의 완성이라고 하기에는 가야할 길이 멀기 때문에 꾸준히 그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봐요, 왜냐하면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또 우리가 제대로 민주주의를 했던 역사가 짧았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에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 같아요, 점차적으로 민주화의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보는데 종교가 그 부분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봐요, 
 
둘째는 경제적 평등화입니다, 그동안 주로 성장을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분배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경제 구조가 되어야 하는게 우리사회 필요한 가치라고 보니까 그런 면에서 어떻게 경제적 평등화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하는 데 대한 종교적 가치 전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셋째로 사회적 복지화에요. 복지 수준이 나아지고 있지만 우리사회는 더욱더 복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봐요. 어떤 복지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느냐 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종교가 해야 한다고 봐요. 넷째로 문화적 성숙화의 과제를 얘기하고 싶어요. 문화 가운데서 특히 가치관.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너무 염려스러울 정도로 천민적 자본주의, 물욕주의, 금권, 배금주의, 성공주의, 출세주의, 한탕주의, 업적주의, 학력주의 등등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가치관이 너무 지배적인 상황에 있어요. 우리 전통 사회를 보면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이 있거든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건강한 가치 풍조를 조성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봐요.
 
다섯째는 통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남북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장기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우리사회, 정치가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이것들이 제대로 이뤄져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고 안정적인 것이며 모든 국민들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원규 감신대 교수는

1967년 대광고등학교를 나와 감리교신학대학교(B.Th)를 졸업한 뒤 미국 Emory University 대학원(종교사회학 전공)에서 M. A.와 Ph. D.를 받았다. 1986년 감리교신학대학교 부교수로 부임한 뒤 그는 학내 신학과장, 학생처장, 대학원 교학처장, 교무처장, 대학원장 등 역임했다. 대외 활동에도 힘을 쏟은 바 한국웨슬리신학회 부회장, 한국종교학회 이사, NCCK 신학위원회 위원장, 기독교타임즈 논설위원장, 한국종교사회학회 회장,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회장, 『현상과 인식』 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21세기 기독교 영성』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 『힘내라, 한국교회』 『인간과 종교』 『기독교의 위기와 희망』 『한국 사회문제와 교회공동체』 『한국교회 어디로 가고 있나?』 등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들이 있다.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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