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도구와 제물이 되게 하소서
고후 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지금 한국사회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성공단이 재개됨으로써 극단적인 대립으로 가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의 상처는 커 남북관계는 타협을 모르고 전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경색되어 있다. 이런 남북의 대립은 남과 북의 대립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사회에 극심한 좌우대립을 초래했다. 최근의 이석기 사태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 대한 좌우의 날선 이념적인 대립은 종북논쟁과 연계되어 한국사회를 또다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전투장으로 만들고 있다. 모든 국가의 정신적인 에너지가 이념논쟁에 쏠린 결과 경제는 정부의 간섭 없는 완전한 자유시장을 꿈꾸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인해 노동이 급속도로 유연화 되어 중산층이 몰락하는 등,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급속도로 가속화 되고 있음에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다.
갈수록 첨예화 되고 있는 이러한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에 맞서 사랑과 관용과 희생으로 그것들을 치유하고 공정한 정의를 회복하도록 영적으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종교계마저 어찌된 일인지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 그 영적인 힘을 잃은 느낌이고, 우리 기독교는 가장 정의로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할 이 때 WCC에 관련한 보수와 진보의 집안싸움으로 대내외적인 망신을 사고 있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으로 대립과 분열을 영적으로 치유해야할 기독교마저 과거의 역사의 덫에 사로잡혀 치유해야 할 대립을 더욱 확대재생산하고 있으니, 참으로 하나님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분열의 시기에 고린도후서와 히브리서 말씀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자 화해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했으며, 또 그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켰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 또한 우리 인간 사회 속에 그 화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간들 사이를 화해시키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극한적인 대립 또한 극복하여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해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동료 인간과 자연은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나갈 동역자들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해를 통해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자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자기성찰이다. 이러한 자기성찰, 즉 자성(自省)은 음행 중에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흠이 없다,’ 즉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주시는 신앙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가 절정에 오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는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고 예수를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빠트린다. 만약에 ‘돌로 치라’고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당신의 말씀과 모순된다고 할 것이고, 돌로 치라하면 사형의 구형과 집행은 로마당국만이 할 수 있기에 로마법을 어기게 된다. 나아가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불경스러운 행위가 된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하셨다. 이는 자신들은 완전하기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의심할 나위 없이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음행한 여인은 또한 마찬가지로 의심할 나위 없이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 또한 죄인이라는 것, 다시 말해 그들 또한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그 입장으로만 남을 비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예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꼬집으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분열의 심층에는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이 놓여 있다. 정치적으로 우파와 좌파는 자신들의 입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 사이에 타협이란 존재할 수 없다. 우파에게 국가의 공권력을 비판하는 좌파는 단순히 ‘빨갱이,’ ‘종북세력’일 뿐이며, 좌파에게 국가에 충성하라는 우파의 주장은 단순히 ‘공안세력’일 뿐이다. 그들 사이를 중재하여 타협을 일구어 내려는 중도적인 입장은 변절자의 간사한 변명이라 평가받기 일쑤이다.
경제적으로도 보수와 진보 사이에는 바리새적인 위선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입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 사이에 건설적인 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수에게 부의 재분배를 위해 국가개입을 요청하는 좌파는 단순히 자신들의 부를 도둑질하는 ‘도둑놈들’이고, 좌파에게 완전한 자유시장을 위해 불필요한 국가의 개입을 중단하라고 요청하는 우파는 단순히 ‘기득권’ 세력이다. 그 둘 다 자신의 입장이 맞다고 보기에 화해는 어렵다.
종교적으로 보수와 진보 사이에도 바리새적인 위선이 깔려 있다. 둘 다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만이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만을 취한다. 보수가 보기에 WCC에 참여하는 교단은 단순히 ‘이단’이며, 진보가 보기에 WCC에 참여하지 않는 교단은 ‘꼴통’이다. 서로의 입장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만을 취하고 자신만의 입장이 옳다고만 생각하기에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적대적인 공존의 상황에서 양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주장을 무조건 폄하하고 비난하며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러한 절대적인 자기긍정에 대한 거부이다. 절대적인 자기긍정 속에 바로 화해와 통합을 가로막는 악마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절대적인 자기긍정은 자기자신을 신으로 만드는 현대판 심리학적인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학적인 우상숭배를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철저히 죄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틀릴 수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자아성찰을 통한 자기부정은 신앙에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상대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적이다. 자신과 정반대되는 극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바로 변증법의 위대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는 적대적인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적인 공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 즉,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양자가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