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21)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일층 새벽풍경, 순례자들이 길 떠날 채비를 한다. |
▲준비 마친 순례자들이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마당을 가로질러 출발한다. |
무엇이든 뚫을 기세로 내리쬐던 바르셀로나의 태양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만만하지 않았었는데, 오히려 이제 햇살이 그리운 아침을 맞았다. 반팔 소매 옷을 입으면 살갗에 서늘함이 일어난다. 지난 밤 10시에 론세스바예스 숙소는 전등을 모두 껐다. 그 때까지 취침 준비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은 조그만 손전등으로 어슴푸레 불빛을 비추며 못 다한 일들을 서두른다.
침대위에 놓인 짙은 검정색 침낭 속으로 들어가니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의 시커먼 ‘벌레’가 되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드디어 온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린다. 발바닥의 통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어깨가 뻐근하다. 그래도 침낭 안에 들어가 누워 있는 기분은 세상 평화가 가득한 우주 공간처럼 포근한 느낌이다.
우리 숙소는 40여 개의 침대가 있는 꼭대기층이었는데, 오직 캄캄함 가득한 밤하늘만 창문과 내 마음 안으로 까맣게 밀고 들어온다. ‘이제 강릉은 새벽을 맞겠구나. 교회에선 주일 새벽기도를 하겠지. 몇 시간 지나면 주일예배인데. 아니, 어떤 사람이 이렇게 코를 고는 거야. 아직도 비가 오네. 아침에 일어나 또 비를 맞으면 많이 힘들겠지?’ 생각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만 알람 소리가 나를 흔든다. 새벽 5시다.
▲왼쪽 산타 마리아교회Collegiata de Santa Maria 앞길을 지나 오솔길과 만난다. |
▲구름이 가득한 론세스바예스 하늘. |
숙소의 전등은 공식 기상 시간인 6시에 공동으로 켜지게 되어 있다. 몇몇 순례자들도 어둠 속에서 나와 같이 주섬주섬 일어나기 시작한다. 창문바깥은 아직도 어둡다. 곤히 자고 있는 세빈이를 살짝 흔들어 깨우고,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침낭과 옷가지들을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정리한다. 손전등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가 천장에 ‘화라락’ 비쳤다가 사라지곤 한다. 아직 자고 있는 순례자들이 많다.
짐을 배낭에 구겨 넣듯이 밀어 넣은 후, 어깨에 덜렁매고 계단을 따라 1층 식당이 있는 곳으로 가서야 숨을 좀 크게 쉬었다. 1층에는, 짐을 다 준비하고 벌써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아내가 어제 빨아 놓은 빨래를 지하층에서 가져왔는데, 아직 마르지 않았다. 바지와 윗옷과 속옷은 기능성제품이어서 마르는 속도가 빨라 어지간하여 배낭에 넣었지만, 면 함량이 많은 양말과 수건은 거의 축축하다. 준비한 옷핀 몇 개로 각자의 배낭 겉 부분에 고정하여 매달았다. 나설 채비를 마친 다른 순례자들 중에는 비옷을 걸쳐 입은 이들이 있다.
▲성 야고보 교회Iglesia de Santiago 앞 기둥에 기대 놓은 어느 순례자의 배낭.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90킬로미터 남았음을 알려주는 표지판. |
하늘은 아직도 구름이 가득하고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동이 트면서 사위가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어간다. 주말SABADO, 주일DOMINGO과 시에스타SIESTA 시간(주로 오후 2시-5시) 등에는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정보 탓에, 주일인 오늘의 먹을거리를 음식자동판매기를 이용하여 즉석음식 몇 가지를 구입하고 배낭에 넣었다. 하룻 만에 정든 곳, 론세스바예스를 떠나기 위해, 아침 8시, 우리는 배낭을 짊어지고 하얀 자갈 깔린 숙소 안뜰을 사그락 사그락 또 다른 출발을 한다.
비는 그쳤고, 짙은 구름이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안뜰을 빠져나가며 연결된 산타 마리아 교회 앞 길, 반반한 박석길이 곧게 뻗어 국도 135번 아스팔트길과 맞닿아 있고 그 길 오른편 오솔길로 순례자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그리로 가면된다. 멀리 검푸른 산등성이가 겹겹이 굴곡을 이루고, 어떤 산마루는 구름에 가려있기도 하고, 군데군데 샛푸른 하늘이 열려 있어 우리의 마음도 함께 열어 준다. 길은 좌우 나뭇가지가 맞 뻗어 터널을 만들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쬘 때면 더없이 훌륭한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나뭇 사이 오솔길을 따라가는 순례자들. |
▲울창한 나무와 아득한 숲으로 둘러 쌓인 까미노. |
걷기에는 참 좋은 아침이다. 지난 날 피레네를 넘은 고단함과 고생했던 시간은 꿈처럼 사라졌고 새 힘으로 가득하다. 누군가 예배당 앞 기둥에 조가비 달린 배낭을 지팡이와 함께 기대 놓았다. 나그네는 보이지 않는다. ‘한 날의 여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삶의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 아뢰는 것일까?’ 저 앞 안내표지판 앞에서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다. “SANTIAGO DE COMPOSTELA 790” 음, 앞으로 가야할 길 79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