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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운동]생명목회 콜로키움 제1회 1강

생명목회 콜로키움 제1회 1강(1998.5.12)

토론기록 : 생명목회 콜로키움 2강

1998년 5월 12일

발제 -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 <깊은 강>
신이 움직이는 자리 - 부활과 환생의 자리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믿음을 갖고 산다. 이름 붙이기에 따라 인생관이랄 수도 있고 신앙이나 종교랄 수도, 철학이나 사상,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인생의 수많은 선택에서 일정한 기준이 되기도 하고 역경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끈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믿음이란 논리적인 이유 없이도 질기고 탄탄한 것이어서 쉽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만큼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나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 그리고 삶이란 결국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을 새로이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것이므로-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삶의 조건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선택이 달라지면 그런 삶의 과정에 따라 다른 형태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 종교라는 거대한 믿음의 체계가 있다. 믿음의 내용이 바뀌어 가는 것이 삶이고 삶의 결과로 믿음의 내용이 바뀌어 가듯 종교 역시 시간과 공간의 차이, 다양한 현실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또 그럴 수 있을 때에라야 종교는 살아있는 신앙을 담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에 등장하는 인물, 오오츠는 살아있는 믿음, 살아있는 신앙의 본질을 알고 있던 사람이다.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미츠코에게 버림받은 후 그는 미츠코의 말을 듣고 그가 저버렸던 신이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체험한다. 모든 인간들에게 버림받아 죽었던 예수가 버림받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끼고 그는 신부가 될 작정을 한다. 자신의 이전까지의 논리와 믿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을 그는 신의 무한한 품 안으로 돌아가면서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오오츠와 같이 종교라는 믿음의 체계를 어떤 상태에서건 내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에게 종교는 사회 문화 현상의 일부로 생각될 , 뿐인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믿음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자기 자신이다. 이 소설의 미츠코가 그런 것처럼, 마츠코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등등. 미츠코는 마치 믿음이란 것이 없어서 내면적으로 방황하는 인물 같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끝까지 놓지 않는 끈은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그의 삶은 ‘나’의 내면을 향한 고민과 실천, 기만과 공허함으로 이어져간다. 그가 오오츠를 유혹하는 것은 오오츠의 ‘신’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게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틀린 것이었다. 그런데 오오츠는 이런 생각을 흔들리게 만드는 존재로 계속 그의 가슴 속에 남게 된다. 자기가 신으로부터 빼앗았다가 버린 오오츠가 다시 철저하게 신의 것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 후에, 그녀에게 오오츠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오오츠의 신앙고백이 담긴 편지를 읽으면서 그리고 답장을 쓰면서 드는 생각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 그녀를 조금씩 변하게 만드는 것은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삶과 생각, 말 사이에 위선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그녀가 행해왔던 많은 위선과 값싼 사랑, 사랑의 흉내에 대해 환멸만을 느낀 그녀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오오츠가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또 그의 믿음이었던 진정한 사랑을 그녀도 배워가기 시작한다.


오오츠에게는 유럽에서 신학생으로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고생스러운 일이다. 유럽식의 가톨릭을 배우면서, 그 선과 악의 명쾌한 구분과 한 가지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신관을 배우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 이단적이라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게 되고 신부가 되는 일도 계속 늦춰지게 된다. 그에게 선과 악이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섞여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렇게 뒤섞여 있는 모든 것 - 인간을 포함해서 - 안에서 그것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오오츠에게 그것은 분명 진실이다. 일본의 범신론적인 사고
안에서 성장한 그에게 또 무엇보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버림받은 자신을 신이 감싸고 부르고 있음을 체험한 그에게 어떻게 신이 다른 것들과 분리시켜 우러러볼 대상이 될 것인가. 어떻게 선과 악이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인가. 그는 분명 자신이 볼 수 있는 신의 얼굴을 보고 지극히 당연하게 그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삼은 것이다. 동일한 종교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의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다른 종교들 안에도 신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신의 사랑과 변화의 신비가 나타나고 있음을 그는 자신의 믿음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작가가 신의 은총과 진정한 사랑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진정한 사랑이란 것도 사람마다 자신의 환경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듯이 신의 모습 역시 보는 사람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의 생각을 더 확장하여 이 소설에 이소베와 누마다 그리고 기구치를 등장시키고 있다. 60줄에 아내의 죽음을 만나고 아내의 유언을 따라 그녀의 환생을 찾아 인도까지 오게 되는 이소베는 결국 그곳에서도 아내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얼마나 아내가 큰 존재였던가, 자신이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던가를 아내와의 일상적인 생활을 반추하며 깨닫게 된다. 결국 그가 발견하는 것은 아내의 환생이 아니라 아내 자신이다. 그는 아내의 인격 전체가 그 안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현실 속에서 철저하게 아내를 잃어버림으로써 가능하다. 마치 예수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마다는 동물이 인간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린이와 동물의 교감을 동화로 쓰는 작가인 그는 어떤 사람과도 나눌 수 없는 진심으로부터의 대화를 그가 기르던 새와 나눈다.


그에게 자연은 인간과 생명의 교감을 만들어 주는 존재이다. 그 자체로 온전하고 평화로운 자연을 그는 믿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만나는 것은 생명이자 죽음인 자연과 온화하면서도 잔인한 여신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대표하는 갠지스 강이다. 자신을 대신해 죽어주었다고 믿는 구관조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는 인도의 숲 속에 예의 그것과 똑같이 생긴 구관조를 놓아준다. 자연의 소리와 생명이 주는 감동을 느끼면서 그가 깨닫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사람 사는 어디에나 짙게 배어있는 죽음의 냄새와 그 속에서도 빛나는 생명의 모순을 그는 동화라는 공간을 통해 피해가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어서 물고기가 된다고 믿는 어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바다를 오염시키는 데에 반대하며 싸우는 내용은 빼놓은 채로 동화로 썼던 자신. 신은 그가 믿었던, 인간을 위해 얘기를 들어주는 자연 뿐만 아니라 죽음의 그늘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모순투성이 자연 속에도 존재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그 신에게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전쟁에서 전우 츠카다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기구치는 츠카다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인육을 먹었음을 알게 된다. 츠카다는 그 일로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가 술로 얻은 병으로 죽게 된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자원 봉사자 가스통은 신께선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며 안데스에서 인육을 먹으며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매일 그를 찾아오며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하고 위로한다. 실수투성이 가스통이 환자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가스통의 병원 자원 봉사는 미츠코의 그것과 묘한 대조를 하게 만든다. 일을 열심히 잘 해내고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미츠코는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더욱 기만하는 셈이 되고 있었지만 가스통은 실수를 하고 놀림감이 되는 것을 통해 환자들에게 위안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기구치가 인도에서 얻는 것은 차문다 여신의 강한 인상이다. 고통에 찌든 그러면서도 인간을 위해 젖을 짜내 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그 여신상에서 기구치는 불교의 맥이 힌두교와 통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뿌리는 여신상에서도, 그가 믿는 불교의 부처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에서 병에 걸려 있는 동안 다른 사랑의 모습인 가스통을 꿈속에서 보게 된다. 츠카다의 인육식을 자비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가톨릭 신자 가스통을.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오오츠의 실패로 정리한다 . 가톨릭교회에서도 버림받은 그는 갠지스 강에 몸을 맡기려는 사람들을 업어 나르는 일을 한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인 양 그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나른다. 사진이라는 눈에 보일 뿐인 우상 때문에, 거기 숨겨진 자신의 욕심 때문에 갠지스 강의 시신을 찍는 미조와 그를 향해 힌두교도들이 달려드는 것을 말리다가 목이 부러지는 오오츠가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 자기에 있던 미츠코는 오오츠를 향해 “결국 실패한 거 아냐”라고 외친다. 어느 종교에나, 어떤 사물과 계기에나 신의 생명과 사랑이 숨어 있다고 믿은 그의 믿음은 결국 아무데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만 것이 아니냐는 미츠코의 외침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미츠코 자신이 오오츠를 인정하고 있음이 담겨 있다. 미츠코의 변화는 바로 오오츠의 성공이자 신의 성공이다.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며 위선을 지독히도 배격하던 미츠코는 자신이 이미 그러한 사랑의 강 속에 있음을, 참 인간의 강 속에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변화되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기 다른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무언가 하나를 잃는 과정을 통해서 잃어버린 그것의 온전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소베가 아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누마다가 자신이 자연이라고 믿어왔던 자신만의 세계를 보다 크게 확장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기구치가 신의 근본 뿌리를 엿볼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리고 오오츠가 신의 사람이 되고 미츠코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존재로 되는 것도, 미츠코가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도 이전의 자신과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 중 가장 온전히 이전의 자신을 포기하고 새롭게 된 사람은 오오츠이다. 다른 인물들이 과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믿음을 만들어 갈 지는 확신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나 많지만 오오츠만은 그렇지 않다. 변화된 자신의 믿음에 우직하게 신의 뜻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에게는 위선이 없다. 오오츠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모자라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느꼈기 때문이다. 작가가 소설 여기저기에서 썼던 ‘피에로’라는 말은 그 자신의 약함과 모자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피에로가 원래 잘났고 못났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피에로 되기로 했다는 것이고 이전까지의 자신을 처음부터 부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품 중에 등장하는 루오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피에로는 예수를 상징한다.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 자신을 부정하고 철저히 신에게 자신을 내맡긴 사람, 그럼으로써 새로워진 사람, 이런 것이 예수의 인간적인 면들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일 것이다. 부활이란 그리고 환생이란 그런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이전의 믿음과 자신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만나가는 것, 그리하여 삶이 바뀌는 것이 부활이고 인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생명과 사랑의 실체인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신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어떤 종교에도 있고 사람들 하나한의 가슴 속에도 있으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신이 움직이는 자리는 이전의 것이 철저하게 부정되고 새로운 믿음과 삶이 전개되는 부활과 환생의 자리이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의 모든 것을 감싸고도는 커다란 사랑과 같은 갠지스 강에서처럼 말이다.


<대화>


아시아적인 기독교


이정배 교수: 여러분들도 모두 읽으셨겠지만 엔도 슈샤쿠의 소설로 유명한 것은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깊은 강』은 오오츠의 삶 속에서 선과 악이 함께 얽혀져 있는 것을 보면서, 서구적인 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좁게는 일본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렇게 제한 할 수는 없고 넓게 말해서 아시아적인 모성적인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각도에서 이 책을 읽으셨는지 또 어느 인물이나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자유롭게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우인 목사: 경동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특별히 강원용 목사님과 김경재 목사님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목회현장에서 깊이 고민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는 소화해서 그 맥을 이어가야한다는 구체적인 숙제로 저에게 다가 옵니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저는 폭 넓은 태도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척 갈등도 됩니다. 작게는 또 다시 불교를 공부해야 하나? 넓게는 기독교 목사로써 대화에 무슨 일을 해야 하며 교인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기독교만으로는 안 되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정배 교수: 이 논의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혼합된 의미로 대부분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일본의 혼합이라는 부정적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아시아속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기독교 복음을 아시아 종교 속에 대상화시킬 수 없으며 복음을 이해하는 내적인 신성이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에 신성과 복음과의 만남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제가 보기에 작가는 아시아적인 신성 속에서 복음을 혼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서구가 강요하는 신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아시아적 상황에서 문화적인 가능성과 타종교와의 대화의 실천 가능함에 도전을 던져 주고 있다고 봅니다.


권종호 목사: 엔도 슈샤쿠가 오오츠의 입을 빌려서 서구 가톨릭에 상당히 도전하는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듯 하면서, 실재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사상은 제2 바티칸 공의회에 이후에 나왔던 이야기 중에 불교도는 보다 확실한 불교인으로 힌두교인들은 확실한 힌두교인으로 남는 것, 그것이 오히려 낫지
않는가라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이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서구 가톨릭에 대해서 도전적인 말을 하면서도 오히려 가톨릭적인 도식을 빌려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사람이


가톨릭 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신우인 목사: 이 책은 엔도 슈샤쿠가 가톨릭교인으로써 그의 삶 말년을 정리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큰 감동을 주기 때문에 차라리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어설프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에서는 배교의 차원이 신을 진정으로 버린 것은 아니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을 뛰어넘어선 보다 깊고 심화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권종호 목사: 이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신이 어떤 종교의 형태이든지 인종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든지 항상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정배 교수: 엔도 슈샤쿠는 간디의 말을 인용을 하죠.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한 지점으로 가는 길이다.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한 우리들이 서로 다른 길로 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권종호 목사: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단순한 인용이 아니고 그가 간디의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엔도 슈샤쿠가 오오츠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을 보면 가톨릭교인들은 보다 확실한
가톨릭교인으로 계속 생활하면 되고 불교인은 보다 확실한 불교인으로 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라는 말을 이 책에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방금 전에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김경재 교수: 파니카 등의 급진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외교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가톨릭의 입장은 강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 밑바닥에는 신앙고백상으로 그리스도신앙의 우월성을 믿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선한 종교들이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지금까지 공적인 입장이라고 봅니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가톨릭을 통해서 그가 이해한 신관이 정말 실질적으로 수천만 명이 믿는 하나님 신앙을 완벽하게 표현한 것인가? 라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시아인으로써 일본인으로써 정직하게 자기를 볼 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요소를 포함하는 더 크고 깊은 강이 있다고 하는 말 같습니다. 교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신의
초월성 못지않게 신의 내재성이 있고 선악이 뒤섞여 있으면서 그것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인식하고, 과감하게 서구적인 것을 탈피해서 새로운 신학 모델을 해야겠다는
것으로 봅니다. 종교 간의 대화는 나의 신앙고백을 가지면서도 다른 신앙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성숙한 지평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결국
삶이고 구원의 체험인데 그것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봅니다.


오세훈 목사: 저는 신목사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남는데, 너무 은혜가 되어서 부담된다고 하셨지요? (웃음…) 저는 이글을 읽으면서 저자는 이사야 53장5절 말씀을 화두로 던지고 있고 또한 그 말씀과 힌두교의 차문다 여신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그것이 결국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요즘 와서 느끼는 것은 목회를 해보니까 잘 안 돼요. 그래서 난 목회에 실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할까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이 소설은 저에게 도전과 위로를 모두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버림받은 것 같지만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이 결국 승리했고, 하나님 안에서 승리한 사람은 오오츠이고 예수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들의 목회적 삶이 너무나 성공 지향적이고 상대평가를 통해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현실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과감하게 떨쳐버릴 때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이 열려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강원용 원장: 사실 제가 엔도 슈샤쿠의 책을 무척 좋아하는데 제가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런 방향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짜 소설가입니다. 그 사람의 소설에는 어느 신학자도 이야기 하지 못하는 주제들이 나옵니다. 나 자신도 여기 저기 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풀리지 않던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서 풀릴 때가 많거든요. 제가 엔도 슈샤쿠의 글을 읽으면서 자꾸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이 났어요. 제가 던지고 싶은 이야기는 성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열린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대적이 될 수 없어요. 그리스도를 신약성서에는 우주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기독교는 거꾸로 뒤집어 났습니다. 변선환 교수 사건 때 제가 중앙일보에다가 쓴 글이 기억나는데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자가 없다? 고 했는데, 그 나가 누구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나는 감리교도 아니고 장로교도 아니고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했을 때 그 예수는 단순하게 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예수가 아니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열려있고 정말로 우주적인 선언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없다고 하는 신학의 해석을 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가 참된 열린 종교로써 바뀌어 지는가가 21세기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보다는 문학가가 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엔도 슈샤쿠는 단순하게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문학가로써의 통찰을 가지고
보는 것이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학가로써의 통찰의 특색을 찾아서 우리의 신학적 풍토와 비교할 때 어떻게 우리 현실에 의미 있는가로 대화가 진행되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은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움직이는 분



정병길 목사: 제가 이 책을 읽으며 가진 의문은 왜 갠지스 강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왕이나 천민이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곳이고 모든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는 갠지스 강에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일본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풍요로움 속에 살아온 전후세대가 깊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은유로 보았습니다. 목사로써 이글을 읽을 때, 서구라파의 문화화된 기독교에서 찾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그래서 이글을 읽고 아아 이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직된 기독교의 껍데기를 벗어내고 어떻게 하면 우리 문화 속에 갖고 있는 생명의 원천과 기독교가 만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윤바울 목사: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저의 습관은 성경말씀 하나를 현실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를 강조합니다. 저는 농촌에서만 10여년을 목회하면서 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은 꼭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큰 교회가 되고 내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해서 목회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떻게 하면 저나 교인들이 깊이 있는 삶을 살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살까? 에다가 초점을 맞추니까 굉장히 즐겁습니다. 많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한사람 한사람씩 신앙의 깊이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김종수 목사: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라는 늘 하는 이야기가 은은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두발을 못 쓰는 분이 있는데 집이 정말 가난해서 가족 네 명이 모로 누울만한 집에서 사는데, 그분이 참 착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집을 나갔다 들어오고 하는 불행이 있고, 더욱이 그 집 아이는 정박아입니다. 흔히 장애인 주일에 설교는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겨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얘기 일뿐입니다. 그 분 댁에 심방할 것을 고민하고 있다가 이 책을 읽고나서 하나 찾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람한테 어떤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읽고 생각 난 것이 아! 당신은 사실 우리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어요.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 자체가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고, 삶이란 것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오오츠는 치사하게 여자한테 체인 것을 가지고 그랬지만 (웃음…) 저는 그분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학범 목사: 저는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나중에 후기를 보니까 미츠코라는 여자가 전후세대로 써 일본에서 물질문명이 가장 강하던 시대에 진정한 생명을 찾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탐욕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인데 비해서 그것이 가장 약한 반문명적이고 반문화적으로 살아가는 오오츠가 자기를 찾는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에서 오히려 오오츠가 되지 못하고 미츠코와 같이 되어가는 그래서 오히려
생명을 찾아주겠다는 허구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오오츠를
통해서 생명이 찾아지는 것인데 물질문명 안에 편승하는 목회자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관영 목사: 제가 느끼기에는 휴머니스틱한 사랑이 짙게 깔려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오츠가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랬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구원을 받는데 그러한 대속적인 사랑과 오오츠가 보여준 휴머니스틱한 사랑과는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동질성이 있는가 궁금합니다 너무 얕은 강만 찰싹거린 것 같아서 , .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글을 읽으면서 도움을 받은 것은 중간에 장례가 났는데 49제 추도예배를 치러 달래요. (웃음) 왜 49제를 치르는지 몰랐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이 책에 설명이 나와서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환생이 사람이 죽고 나서 7일안에
이루어지는데, 그때까지 안 되면 최소한도 49일 이전에 이루어진대요. 그래서 49제의 의미를 전에는 몰랐는데 잘 알게 되었습니다.(웃음…)


정동수 목사: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오오츠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오오츠를 보면서 그는 철저히
자유로운 자임을 느낍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오오츠의 모습이 결국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깊이 있을수록 낮아지고 자기를 겸허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모든
교리라든가 신념을 넘어서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를 엔도 슈샤쿠가 오오츠라는
인물을 내세워서 말하려고 했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과 환생


이정배 교수: 단순히 작가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이 책에서는 계속해서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환생이라는 개념은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개념들입니다. 이 내용이 전부 다는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이야기 하는 것은 아내의 환생을 찾으러 인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인데 남편의 인격 속에 아내의 모든 삶이 가가없이 그대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너무 처절하게 느끼고 있거든요. 또 오오츠의 실패한 죽음 앞에서 작가는 예수의 환생을 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가적 상상인지
아니면 아시아적인 실존 속에서 이해되는 부활에 대한 해석인지를 저는 감동적이고 신학적인 뉘앙스를 받게 됩니다. 이 책은 환생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도 오오츠를 예수의 부활로 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환생이라는 주제가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이해들에 대한 여러분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김기호 목사: 이 책에서도 환생의 문제가 나오고, 최근의 신문이나 매체에서도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바람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이 소설가가 나타낸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갠지스 강으로 가는데, 우리는 목회자로써 어떻게 이러한 사람들을 깊은 강으로 안내할 수 있을까? 라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김경재 교수: 환생과 부활이라는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해석학적인 교류가 일어나는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려면 끝없는 문제가 있어요. 그렇지만 말하려고 하는 중심 주제를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수운 최재우가 잡혀서 대구에서 곧 바로 참수되지 않고 한양으로 이송됐다가 갑자기 국상을 당하니까 다시 대구로 환송을 시키는데 숲 속에서 동학도들이 나와서 그를 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최재우가 그것을 말리면서 하는 유명한 말이 “내가 너희들을 그런 정도밖에 안 가르쳤느냐? 나는 죽지만 죽지 않는다. 나는 너희들 생명
속에 같이 살아있다” 라는 말을 확고부동하게 합니다. 최재우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객체적 부활의 신앙은 아니에요. 동학도이기 때문에 여기서 환생이라는 말을 쓰지만, 결국 왜 현대인들이 환생문제를 소설에서까지 다루느냐는 핵심은 인류의 영적인 지평이 한 단계 꺼풀을 벗어가지고, 생명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관계성속에 있다는 것을 훨씬 더 철저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에, 영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달리 제시하기를 기다리는 문화적 상황 때문에 이런 소설이 많은 호소력을 준다고 봅니다. 그러한 범위에서 환생의 주제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정배 교수: 결국은 정리하자면 깊은 강이라고 하는 것은 부자도 가난한자도 산자도 죽은 자도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면서 흘러내리는 그런 강입니다. 결국 그것은 오오츠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범하면서도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선과 악을 함께 품고 있는 삶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깊은 강과 오오츠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고, 예수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고 봅니다. 아무쪼록 아시아적인 풍토 속에서 오오츠가 서양 사람들이 전달해준 신학을 소화하지 못하고 결국은 신부수업을 포기하고 떠나와야 만 했던 그 고뇌는 오늘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이고 부딪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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