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상 대주교가 부활절 예배시 성만찬을 집례하고 있다. ⓒ사진=지유석 기자 |
김 대주교는 "인류의 역사가 뒤바뀐 가장 기쁜 이 날을 우리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슬픔으로 기념하게 됐다"며 "이번 참사가 단지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고라면, 우리의 고통과 슬픔이 차라리 덜 하겠다. 그러나 이번 참사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는가를 드러낸다"고 꼬집었다.
김 대주교는 이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보다도 내가 얻는 이익과 편의가 더 중요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모두가 신뢰하며 위임한 권한에 깊이 감사하며,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법과 원칙이 세워지고 지켜져야 할 터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법과 원칙을 내세워 정의와 평화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먼저 지키려고 드는 권력자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한국 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런 세상이 되어버린 이 일에 우리는 모두가 공범이요 죄인이다.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바로 이런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는 교우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다. 불의하고 참담한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증거하고 드러낼 때, 그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깨닫고 고백할 때,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사랑은 우리와 이 세계를 위해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선포했다.
한편 이날 성공회 성도들은 이날 부활절 계란에 세월호 생존자들의 생환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적어 함께 나눴다.
아래는 김 대주교의 강론 전문이다.
슬픈 부활절을 기뻐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참 기쁜 부활절입니다. 서로서로 인사를 나눕시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늘 이렇게 부활대축일을 축하하며 맞았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올해는 참으로 슬픈 부활절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뒤바뀐 가장 기쁜 이 날을 오늘 우리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슬픔으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쉽게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은총을 허락하신 깊은 뜻을 모른 채 그저 “이제 모든 일이 축복이겠지” 하고 지내왔는지도 모릅니다.
성 목요일 우리를 위해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고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있어라.”
성체를 모신 제대 앞에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드린 작은 촛불들이 바람도 없는데 일렁입니다. 마치 세월호 선실 안에서 두려움에 울먹이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영혼이 날아와 앉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랑해요, 엄마 아빠. 하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겠네요...”
우리는 이 부활대축일에 우리가 모든 소망을 거는 하느님의 침묵과 무능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참담한 무능함,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무력함과 무지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강력한 긍정적 신앙으로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식의 거짓복음은 우리가 의지할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교리적 신앙으로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의 의미를 다 설명해내려는 일도 허망한 일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정직하게 우리의 삶과 믿음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는 기적일까요?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 죄와 악과 죽음의 문제가 단지 하느님께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개입하시면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수준의 기적적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킨 이 시대에, 우리의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요?
이번 참사가 단지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고라면, 우리의 고통과 슬픔이 차라리 덜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참사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는가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보다도 내가 얻는 이익과 편의가 더 중요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모두가 신뢰하며 위임한 권한에 깊이 감사하며,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법과 원칙이 세워지고 지켜져야 할 터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법과 원칙을 내세워 정의와 평화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먼저 지키려고 드는 권력자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맡은 일에 전문가의 식견과 능력과 양심을 발휘해서 세상을 이끌어야 할 터인데, 권력에 기대어 아부하며,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데 능통한 자들만이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으신 하느님 앞에 양심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실이 뻔히 드러나도 거짓 내용으로 조작하고 우기면 그대로 통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합법적으로 남에게 책임과 고통을 떠넘기는 기술이 성공적인 삶의 처세술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이 되어버린 이 일에 우리는 모두가 공범이요 죄인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바로 이런 우리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진짜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죄악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얼버무립니다. 도리어 차별 없이 더불어 살아가자는 자유와 관용의 덕목은 불온하고 심각한 죄악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한없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이에게 자비하시고 은총을 베푸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신성모독이요 정치적으로 반역죄로 고발하였습니다.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폭력에 예수님은 참으로 무력하게, 무참하게, 허망하게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감추고 모양으로만 죽은 척 하신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참사람, 곧 사람의 아들로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리들과 똑같은 죽음이요, 그래서 우리들의 죽음은 또한 주님의 죽음과 같은 죽음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그 원통함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느끼는 그 원통함입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 진도 앞바다에 목숨을 묻은 그 어린 영혼들이 부르짖는 그 원통하고 절망스런 외침을 예수님께서 먼저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죄와 고통과 죽음에 당신의 온 생명, 삶과 죽음을 일치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자녀와 가족을 잃은 부모와 친지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함께 괴롭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의 무자비한 십자가 처형에 잃으셨습니다. 무슨 일을 벌이는 지도 모르고 저지르는 인간의 죄악에 희생이 되는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분노와 슬픔과 절망에 기진한 부모님들의 마음이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잃으신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흔히 말하는 “하느님의 부재와 침묵”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함께 아니하신다, 그저 가만히 계신다는 의미가 아닐지 모릅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깊은 친교 안에서, 성자와 연결된 인간들의 고통을 한없는 슬픔으로, 가없는 무게로 견디시는,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성부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기 위해, 당신을 다 내어주시며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우리는 도리어 하느님의 부재, 하느님의 침묵으로 경험하는 지도 모릅니다.
주문 외우듯 하느님을 찾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그런 현실은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 고통스런 참혹한 현실에 주어진 기쁨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니 놀라운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주시라는 것은 좋은 믿음이지만 부활의 믿음에는 아직 멉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면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셔야 한다는 놀라운 진실이 우리 믿음의 전제입니다. 그 고난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 고난이야말로 주님께서 함께 이루시려는 하느님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함께 하시는 표징입니다.
이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는 교우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입니다. 불의하고 참담한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증거하고 드러낼 때, 그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깨닫고 고백할 때,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사랑은 우리와 이 세계를 위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우리와 죄와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은, 저와 여러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이 볼 때는 그저 실패와 좌절로만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 당시의 사람들은 기적적인 능력으로 군사적 경제적 강대국을 이루어주는 그리스도를 기대했습니다. 그 기대가 깨지자 예수께 등을 돌리고 권력의 속임수에 놀아나며 세상의 지배에 체념하고 적응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임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의지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해결사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랑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우리의 살림살이는 나아지는 게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리십니까? 여전히 병이 씻은 듯이 낫지 않고 치료하느라 고통과 불안과 우울함에 시달리십니까? 마음 속에 생겨난 미움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으십니까?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별로 없고 뜻밖의 일들만 꼬리를 물고 생겨납니까? 교회도 세상도 나라도 하느님의 뜻과는 한참 먼 현실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우십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와 함께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함부로 손쉬운 구원과 막연한 희망을 말하지 말자고 하십니다. 차라리 진정으로 죽음의 길을 걷자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일이 하느님께 대하여는 사는 일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죽는 죽음은 곧 하느님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겪는 세상의 정죄는 도리어 하느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드러내는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의 살아계심은 하느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슬픈 부활절을 기뻐합시다. 이 역설과 신비를 가슴에 간직합시다. 진정 비통한 슬픔을 통해서,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 대하여 죽기로 다짐하는 일이 우리의 부활신앙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것들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않기로 합시다. 교우들끼리도 서로 세상에서 이룬 성공을 자랑하고 부러워하지 맙시다. 도리어 하느님을 위하여 세상에서 포기하고 잃은 것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합시다. 세상의 이념논쟁 따위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지 맙시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지식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거나 못가지거나 간에 하느님의 사랑 안에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하나가 되도록 합시다.
진정한 삶의 슬픔과 고통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 가장 어린 영혼들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도록 합시다. 무시하고 지시하고 통제하는 대상으로 보지 말고, 그들의 꿈과 소망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존대하며 섬기도록 합시다.
이 기쁜 부활절에, 참담한 슬픔 가운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영광을 기억합시다. 우리와 삶 가운데 고난과 죽음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 사랑으로 이 슬픈 부활절에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