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영성순례기] 결국은 각자 걷는 길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24)

 
▲메스키리스 봉우리를 오르며 에스피날을 뒤돌아보다
▲신과 배낭을 벗고 예배하였던 메스키리스 봉우리 오르는 길목

날씨는 더욱 신선해지고 청명해졌다. 비온 뒤 갠 하늘은 그지없이 깨끗하다. 목회자로, 목회자의 아내로, 목회자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묵직한 멍에가 주는 부자유함과 무게감을 감당해야 하는 굴레이다. 그것은 주인이 벗겨주지 않으면 결코 벗을 수 없는 무한 구속의 장치이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139:7-10)
 
그러나 결국 그 굴레는 은총이며 힘이며 선한 인도하심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도록 매어주는 놀라운 도구로 사용된다. 까미노를 걸으며 주님께 더욱 가까워지려고, 친해지려고 마음을 모았을 때, 이미 주님은 바로 내 옆에서 내게 씌워진 굴레를 붙드시며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시23:2)’를 베푸셨다.
 
에스피날Espinal에서 메스키리스 봉우리Alto de Mezquiriz로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신을 벗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찬송하였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한 거룩한 시를 들으며 감사했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햇살은 우리에게 은총을 쏟아주었고, 바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실어다주었다. 구름은 세빈이의 바이올린 가락에 맞추어 함께 찬송했고, 나무는 잎사귀를 흔들며 같이 기도했다. 그렇게 길Camino 위에서, 배낭에 달린 십자가 바라보며 겸손히 주일의 은총 속에 예배했다.
 
▲순례자를 인도하는 노란 화살표
▲비스카레트Biskarret 마을 입구 전경

이제 길은 두 사람이 겨우 교차할 정도의 폭으로 좁아졌다. 가파른 오르막은 숨을 몰아쉬게 하였고, 신에는 뽀얀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해발 950여 미터 메스키리스 산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아마도 비스카레트Biskarret일 것이다. 아내의 배낭에 매달려 흔들거리던 젖은 수건이 바싹 마를 만큼 햇볕은 금세 강렬해졌다. 간간이 보이던 구름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늘은 서늘하고 양지는 따갑다. 양지에 있으면 그늘이 그립고, 그늘에 있으면 양지가 간절해진다.
 
메스키리스 봉우리 오를 때부터 아내와 나의 걷는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세빈이는 특별히 문제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걸음 속도를 맞추려는 세빈이가 오히려 더욱 힘들 것 같아서, ‘순례자들의 뒤를 쫓아가라.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라. 다음 마을에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생장피드포르에서 피레네 고개를 넘어 론세스바예스로 내려갈 때처럼, 메스키리스에서 비스카레트로 내려가는 걸음이 더욱 문제였다. 오르막은 어떻게 올라갔는데 내리막에서의 무릎 통증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아내는 다리의 균형을 맞추지 못할 정도였다. 먼저 간 세빈이가 한 시간 정도 기다린, 정오가 다 되어 비스카레트Biskarret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세빈이와 우리 일행의 각자 걷기가 시작되었다. 까미노를 나서기 전부터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중학교 2학년 세빈이였는데, 문제는 세빈이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있었다. 언젠가 아들과 따로 걸어야 할 시간이 올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이를 줄은 몰랐다. 비스카레트 마을에 먼저 도착해서 우리를 맞이하는 세빈이를 볼 때, 대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묘하고 다양한 감정이 속에서 뒤엉킨다.
 
 ▲비스카레트의 라 포사다 누에바 앞 좌우 벤치에 앉아 있는 아내와 아들

머릿돌에 1867년에 지어졌다고 쓰인, 작은 여관 라 포사다 누에바La Posada Nueva(www.laposadanueva.net) 현관문 앞 좌우 벤치를 아내와 아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 고풍스러운 갈색 나무 덧창이 달려 있는 눈부시게 하얀 벽면 아래, 아들 있는 벤치에는 쏟아지는 햇빛, 아내 앉은 벤치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고 있다.
 
빵 두 덩어리와 물 조금으로 점심을 마치고, 오후 일정을 함께 상의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하여 에로Alto de Erro 봉우리 넘어 수비리Zubiri까지 22킬로미터 걷는 것이 처음계획이었는데, 수비리에서 6킬로미터 더 지난 라라소아냐Larrasoana까지 가기로 했다. 그 곳에는 넉넉한 침대와 주방 조리시설 등이 갖추어진 숙소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13킬로미터를 걸어 온 비스카레트에서 수비리까지는 9킬로미터, 라라소아냐까지는 15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한다. 모두 28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세빈이에게 라라소아냐에 먼저 갈 것을 부탁하고, 우리 세 사람의 크리덴시알(순례자증명서)을 세빈이에게 주어서 공립알베르게(저렴한 숙박비와 주방시설이 있는) 숙소를 예약할 임무까지 부여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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