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룰렛은 리볼버 권총에 총알 한 발을 넣고 무작위로 장전한 다음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쏘는 극한의 도박이다. 영화 <디어 헌터>에서는 베트콩이 포로로 잡은 미군 병사들에게 러시안 룰렛을 강요하는 모습을 그린다. 실제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이 극한의 행위를 미군 포로에게 강요한 사실은 없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러시안 룰렛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 청년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표현한 은유에 불과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러시안 룰렛은 이 나라 국민의 일상이다. 이 나라는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를 신호탄으로 10년이 멀다하고 대형 참사가 터졌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붕괴를 제외하면 희생자들 대부분은 아이들이었다.
대형참사의 신호탄이었던 성수대교 붕괴 참사에선 이른 아침 학교에 등교하던 무학여고 학생들이 참변을 당했다. 1999년엔 인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 화재 사건이 벌어져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운데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를 누빈 하키 선수의 자녀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대형참사는 잠잠해 지는 듯 했다. 그러던 것이 2010년 해군함정인 천안함이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져 46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숨졌다. 지난 해 7월 태안에서는 해병대 체험캠프에 참가한 고등학생 5명이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다. 그리고 올해 2월엔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에서 붕괴사고가 발생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던 9명의 예비 대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이어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이라는 대규모 참사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침몰에 따른 피해규모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와 실종자 수는 각각 46명과 256명(4월20일 오전 8시 현재)에 이른다. 더욱 슬픈 건, 실종자 가운데 대부분은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다.
아이의 죽음 앞에 침묵하는 하나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아이들일까? 일련의 대형참사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아이들이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번 사건이 철저한 인재(人災)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계실 하나님을 주목하게 된다.
특히 꽃도 피워보지 못한 뭇 어린 생명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 안타까운 사고에 등지고 있는 하나님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 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일까?’, ‘구원의 손이 짧지 않거든 왜 관망만 하는 것일까?’까 하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질문이 계속되다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는데 구호뿐인, 이름뿐인 ‘사랑’인가라는 몹쓸 생각에 미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종화 목사는 20일 경동교회 부활절 주일예배 설교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진 작은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포개졌으면 한다”고 말했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침묵하셨듯이 잘못 없는 아이들이 죽어갈 때 역시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는 하나님 앞에 예수가 행한 일은 자기를 죽이려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일이었다. 이런 메시지는 세월호 실종자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어린 생명들이 생존자와 카톡으로 주고받은 내용에도 확인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숙연함을 더해준다. 이 아이들은 한결 같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용서해 달란다. 그리고 사랑한단다. 그러면서 어른들이 지고 갈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간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어린 생명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본다. 설사 자기 탓이라 하더라도 남 탓으로 돌리며 책임전가에 급급한 어른들의 일그러진 모습과 대조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나하나 살겠다는 이기중심주의에 매몰된 탐욕스런 우리의 추한 모습을 바닥 밑까지 드러내 보이게 하는 맑고 깨끗한 성수(聖水)와도 같은 것이다.
일련의 대형참사로 아이들이 자꾸 희생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른들이 수지타산에 눈멀어 아이들의 안전을 뒷전으로 미룬 때문이었다. 성수대교 참사, 해병대 캠프 사고, 경주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모두 피해규모와 성격만 다를 뿐 어른들의 탐욕과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인재였다. 즉,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아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 사회가 아수라장이 된 데에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로지 물질주의를 지상가치로 격상시킨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 뭇 어린 생명들의 값진 희생 앞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어린 생명들처럼 속죄의 제단 위에, 화해의 제단 위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은 적이 있는지를 되묻고, 그런 적이 없었다면 이제라도 제단 앞에 나아가야할 것이다. 이것이 무고한 어린 생명들의 희생 앞에서 숨 쉬기 조차 미안해야 할 우리 어른들이 속죄의 가능성을 찾는 일일 것이다.
지난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도 못 얻어
TV나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사고현장을 보면 심한 우울감을 느낀다.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무슨 일인가는 해야 하겠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일 조차 죄책감이 들 정도다.
사실 대형참사에 대비해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일은 정부의 몫이다. 그러나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정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전혀 감도 못 잡는 듯한 모습이다. 여기에 언론은 혼선을 부추기려고 작심한 듯 보인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전까지 되풀이했던 참사 시나리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양상이다.
수차례의 대형 참사는 늘 똑같은 패턴을 되풀이했다. 정부는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고, 언론은 선정적인 화면만 내비치며 본질을 흐렸다. 한편 사건 책임자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이번 세월호 참사의 경우 선장은 제일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했다.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나면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유족들은 언제나 오열했다. 이후 사건 책임자에 대한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이때 거의 예외 없이 최고위 책임자들은 사법부의 칼날을 비켜갔고 하위 관리자 몇 명만 희생양처럼 법의 심판대에 섰다. 그런데 그 심판대마저 일반인의 법 감정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있는 미약한 형량으로 그쳤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곧 언제 그런 일이 벌어졌냐는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사건의 추이를 보건데, 세월호 참사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기 어렵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이건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이에 대비할 수는 있다. 이런 과정에서 '과거'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고 잘 했던 일은 기억하고 잘 못했던 일은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하면 재앙이 던질 충격파는 흡수가 가능하다. 결국 세월호 참사 이후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현장은 그동안 되풀이 되는 참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되풀이 되는 참사는 더욱 큰 참사를 부르는 중이다. 바로 불신이다. 이제 국민 각자는 정부와 언론을 믿지 못하게 됐다. 또 언제고 닥칠 재앙에 대비해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즉 국민전체가 언제 자신의 머리에 총알이 박힐지 모르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내던져진 셈이다.
세월호 침몰을 둘러싸고 온갖 말들이 난무한다. 어떤 말이 참이고 어떤 말이 거짓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분명 지금은 말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데 온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사건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려 확실하게 매조지해야 한다. 관련 당사자들은 아이들의 죽음 앞에 그 어떤 발뺌도 죄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을 돌이켜야 할 때이다. 만약, 이번에도 또 다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사건을 유야무야 넘겨 버린다면 또다시 이러한 끔찍한 참사가 반복, 재현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생존자들의 생환을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