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베리타스 DB |
1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초월성을 이성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투사한 후에 얻어지는 확실성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지젝에게 있어 초월이란 저 멀리 있어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초월이 아니라, 초월성 자체가 이미 세계에 들어와 있어 세계에 틈을 내고, 그 틈으로 인해 혁명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세계 속에 개입하지 않는 초월성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성육신은 세계안으로 개입한 신의 초월성을 아주 잘 드러낸 사건이었고, 그 초월성은 2천년 동안 유전되면서 지속적으로 변혁을 위한 유령을 불러내는 주문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 초월의 가장 극점인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회상하는 2014년 고난주간에 그 초월을 비웃는 일이 발생해 버린 것이다.
아! 이것이 정녕 초월의 방식인가!
아! 그래서 정녕 초월이란 “자기 속에서 자기를 능가하는 어떤 것!”이어야 했는가?
사실 위의 문구는 정신분석학에서 많이 논의 되는 타자(the Other)에 대한 정의와도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 안에 있지만, 나를 능가하는 어떤 것,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것, 내 안에 있는 틈과 얼룩과 빈 공간…… ‘그 X로 인해 혹 그 곳이, 혹 그 날이 탈구되어(out of the joint) 불현듯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예감을 가지게 하는 그 무엇을 우리는 타자라 부른다.
지젝의 시선으로 이번 사건을 바라본다면, 2014년 고난주간에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이 비극은 숨어 있었던,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실재가, 그리고 그들의 타자가 커튼을 찢고 불쑥 융기한 사건이고, 이 비극은 우리에게 앞으로 많은 Sign을 허락하면서 유령을 불러내는 주술이 될 것이다.
2.
그런데, 문제는 그 타자가 지젝에게는 결핍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기존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결핍만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란 대타자로 상징되는 세계와 사회는 완벽하다는 가정하에,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체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주체의 결핍이 주된 치료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 둘 다 이야기한다.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 그 양자의 결핍이 발생하는 복수적 결핍의 공간에 지젝은 개입하며 체제를 선동한다. 이것이 지젝의 특이한 점이다.
아래 예화는 지젝식 타자의 결핍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흥미로운 예화이다.
: 닭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믿는 환자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닭의 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치료를 받고 완치가 되어 그는 자신이 닭의 모이가 아니라, 인간임을 깨달았다. 완치가 되고 돌아가던 그 환자가 의사에게 돌아와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내가 이제 닭의 모이가 아니라 인간인 것은 알겠는데, 설마 닭도 그 사실을 알까요?”
여기서 닭은 세계와 사회, 즉 타자를 상징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치료란 정상적인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에 대한 치료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그 타자 역시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대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실제로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 자살자가 많다는 것은 자살하는 사람 본인의 문제, 즉 주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살사회를 만들어 국민들을 자살로 내모는 대타자인 국가의 결핍이기도 하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결핍도 체험했지만, 그보다 더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국가로 상징되는 대타자의 결핍, 아니 붕괴이다. 주체만 정신 차렸다면, 주체가 정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보다, 믿었던(?) 대타자였던 국가가 텅 비어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다. 완벽하게 미장센 되어있을 것 같았던 공간은 뻥 뚫려 있었고, 티끌 하나 없을 것 같았던 캔버스에는 곳곳에 얼룩이 묻어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못 했던 것은 아니나, 설마 이 정도까지 바닥을 칠 줄은 우리 중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결핍은 그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숙성시켜 왔던 것일까? 그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3.
전 시대를 ‘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하고, 현재를 ‘냉소의 시대’라고 할 때, 전자는 뭘 몰라서 생기는 문제이고, 후자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노동자, 농민은 한나라당을 찍는 것일까? 어떻게 자기 계급에 반하는 투표가 가능할까? 우리가 선거 때마다 수없이 물었던 질문들이다.
체제는 대중들이 원하는 환상을 너무나 잘 알고, 당대의 환상공식에 입각하여 새마을 운동으로, 뉴타운으로, 4대강으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그 환상들을 주입하는 데 성공해 왔다. 이렇듯, 이데올로기란 기본적으로 인민들에게 허위의식, 즉 환상을 주입하는 공식이다. 그것을 이데올로기적 조작이라고 불렀고, 80년대 운동의 1차 목적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주입하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저물고, 자본의 승리가 전 지구적으로 확인된 21세기를 우리는 냉소의 시대라 부른다. 냉소주의(Cynicism)의 기원은 그리스 견유학파의 대표격인 디오게네스로 올라가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수면으로 올라온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호와 운명을 같이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질적인 차이, 즉 사용가치를 화폐를 매개로 하는 교환가치로 바꿔버린 시스템이다. 환언하면, 전통, 개성, 성격, 역사, 명예 등등의 서사들을 비웃으며, “그런 것들 얼마면 돼?”라고 조롱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서사들은 몇 푼의 화폐로 교환되어 누군가에게 팔려가고,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통장에 돈이 입금되면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릴 수 있는 cool한 인간이 되었다.
‘입금되면, 즉 환상이 주입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마치~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산타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선물을 받기 위해 마치 진짜 산타가 있는 것을 믿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어.” “나는 대한민국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 하지만 7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갖고 있는 성공한 대통령이기에, 마치 이 나라에 아무일 없는 것처럼 행동할 거야.” 나는 산타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이고,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잘 아는 통치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대통령은 산타의 존재와 국가의 결핍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환상의 측면에서 발생한다는 말이다. 환상은 결국, 결핍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고, 환상은 결국, 얼룩을 감추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체제에 의해 수많은 환상들이 제공되면서 우리 안의 결핍을 메워왔다. 증상이란 그 결핍을 숨기는 과정에서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생기는 얼룩과 같은 것이고…… 간헐적으로 그 증상들은 한국 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극적으로 출현하였다. 그것이 90년대 이전에는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문익환 등등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었고, 근래에는 용산에서, 밀양에서, 쌍용에서, 구럼비에서 그것들은 어김없이 제삿날 망자들의 혼령이 귀환하듯 그렇게 우리사회 구천을 떠돈다. 증상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억압을 주장하지만 억압은 완벽히 억압되지 않는다. 지난 한국 현대사에서 억압되어 왔으나 완전히 억압되지 않았던 것들의 집단적 발호와 집단적 귀환이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이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4.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슬퍼해야 한다. 충분히 우리는 울어야 하고, 충분히 우리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조금 진정된 다음에, 눈이 부시게 푸르렀던 그 아이들을 다 보내고 난 다음에, 우리는 마음을 다 잡고 서서히 복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주요 골자는 Act이다. Act는 실재(the Real)을 드러내는 행위다. 억압당했던 실재를, 이데올로기가 선사하는 환상에 의해 메워졌던 결핍을 드러내는 행위가 Act이다.
지젝은 이 대목에서 Act와 Action을 구분한다. Action은 그때 그때 상황에 일시적 땜질을 하는 반응이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 action을 취하는 것마저도 힘겹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촛불기도회 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몇몇 책임자 처벌하고, 일부 개각을 단행하고, 관련 법규 가다듬고, 유족들에 대한 보상 논의가 오고 갈 때쯤이면, 우리는 다시 일상에서 허덕이다 6월에 있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광장에 모여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 ‘오! 필승 코리아’를 한 목소리로 부르며 이 국가에 대한 감격을 다시 공유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오늘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젝의 현대 다문화주의 전략에 대한 지적이 나의 관심을 끈다. 세계화, 지구화, 탈영토화라는 모토아래에서 운영되는 21세기 자본의 운동은 차이의 정치학, 다문화주의에 대한 찬양과 옹호로 전환되어 전 지구를 하나로 엮어 버렸다. 이 말은 21세기 자본의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차이와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이는 특수한 것들이 보편화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감당한다.
예를 들어, 여기 homophobia(동성애혐오증)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우리 사회에서 지난 시절 불온하게 불리어 왔던 빨갱이, 전라도, 종교다원론자, 좌파 등등의 말이 지니는 기표들의 연쇄의 최종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사회의 결핍을 드러내는 위험요소들이다. 그런데 현대의 다문화주의는, 아니 자본의 위력과 아량은 이 모두를 다 포용한다. 그리하여 각자에게 우리 사회에서 기거할 자기만의 방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 방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동성애가 갖는, 빨갱이가 갖는, 좌파가 갖는 틈으로서의 잠재력은 사라진다. 그냥 단순한 This is one of them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의 타자는 타자성이 거세된 타자이고, 나와 일치하고 내가 공감하는 타자이다.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환대와 수용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이러한 수평적 다양성은 라끌라우가 말하는 수직적 적대, 지젝식 틈새와 결핍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최후로 남겨진 수직적 적대라고 할 수 있는 절대 관용할 수 없는 타자는 역으로 공격해도 무방한, 이 사회에서 셈을 안 해도 되는 그런 존재로 정당화된다. 무슬림 세력이 대표적이고,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는 이들을 대표하는 표제어가 되었다.
에필로그
세월호 침몰사건은 대한민국의 수직적 적대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머지않아 사건이 진정되면서 수평적 다양성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물타기 전략이 흘러 넘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편적 차원으로 고양되어야 할 Act를 가리우고 상황에 안주하는 Action 차원에서의 논의와 대책들이 요란하게 흘러 넘쳐 우리의 혼을 빼앗아 또 다시 이 논의에서 우리를 소외시킬 것이 뻔하다. 이제부터 두 눈을 부릅떠야 할 것이다.
Act는 사회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세월호 침몰은 대한민국 사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극명한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 긴장을 어떻게 유지하여야 하고, 어떻게 변혁을 위한 보편화의 가능성으로 이끌어 낼는지는 여기 이곳에 구차하게 살아 남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고, 어린 망자들을 향한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고 애도일 것이다.
글/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본 글은 2014년 4월 30일 웹진 <제3시대>에 실린 글입니다.
본 글은 2014년 4월 30일 웹진 <제3시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