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영성순례기] 수비리에서 멈추어야 했다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26)

 
▲낡은 벽돌 건물과 수비리Zubiri 입구 안내 표지판.
▲수비리Zubiri마을 곁을 흘러가는 아르가 강Rio Arga.

에로 봉우리에서 내려가는 골짜기는 바위와 자갈이 뒤섞인 험한 길이다. 까미노 전체 여정에서 만나는 가파른 내리막 경사 중에 단연 으뜸이다. 4킬로미터 정도 구간이고, 정상적인 걸음이라면 한 시간 소요되지 않을 거리이다. 그러나 전날 생장피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다면 사정은 다르다. 더욱이나 걷기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참 험난한 여정이다. 그렇게 ‘게걸음’으로 절룩이면서 한 시간 반 정도 내려 왔을까? 오후 4시쯤 되니 아래쪽으로 붉은 지붕들이 있는 수비리 마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원한 물줄기 흐르는 수비리 마을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수비리 마을을 지나 라라소아냐Larrasoana까지 6킬로미터 이상을 더 가야 한다. 나중에 따져보니, 우리 내외가 수비리에서 라라소아냐로 갈 즈음에 세빈이는 라라소아냐에 이미 도착하였다. 
 
기와의 색이 바랄 정도로 낡고 오래된 벽돌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수비리’ 마을 안내 표지판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한다. 수비리 알베르게에 여장을 푼 어떤 순례자는 흐르는 강물에 고단한 발과 마음을 담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부럽기가 한량없다. 수비리로 들어가려면, 길 오른쪽 아르가 강Rio Arga을 가로지르는 중세 아치형 다리를 건너야 한다. 라라소아냐로 가는 길은 수비리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아르가 강을 오른쪽에 두고 계속 걷는다. 
 
마그네슘의 원료가 되는 마그네사이트 나바라州 공장 담 길을 따라 황막한 먼지길 2킬로미터를 터벅거리면, 아담하고 조용한 이라라츠Ilarratz 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잠간 쉬어갈 수 있는 샘터와 그늘이 있다. 늦은 오후가 되니 그림자는 더욱 짙고 길어진다. 마음은 급해지는데 두 다리는 전혀 협력할 뜻이 없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터덜터덜’ 걷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나바라州의 마그네사이트 공장을 지나가는 까미노 
▲까미노를 인도하는 노란 화살표는 멈춤이 없다. 

초지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는 누런 소들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길옆의 키 높은 미루나무는 새파란 하늘에 닿아 있고, 나무꼭대기 잎사귀들이 바람에 살랑거릴 때마다 초록빛과 은빛이 뒤섞여 반짝거리는 모습은 흡사 경포 밤바다위에 내려앉은 달빛 은파를 떠오르게 한다. 일렁이는 경포호수와 안목바닷가에 비치는 보름달 은빛의 비추임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주변에 지나가는 순례자도 이젠 없다. 모든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함이 찾아온다. 주변은 정지한 듯 고요하다. 발과 다리, 어깨의 고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소용돌이치던 머릿속 생각도 사라지고, 걷고 있는 ‘나’만 홀로 있다.
 
그러다가 에스키로즈Esquiroz 마을 진입 표지판이 번뜩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큰 기쁨이 찾아온다. 에스키로즈 다음 마을이 라라소아냐 이기 때문이다. 론세스바예스에서 라라소아냐까지 28킬로미터 ‘대장정’이 끝나가고 있다. 우습고 어리석지만, 라라소아냐까지 여정의 목적은 숙소와 먹을거리였다. 직접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값이 싼 공립알베르게Muni.Albergue에 도착하는 것이 이 무모한 행진의 ‘거룩한’ 목적이었다.
 
길 따라 같이 흘러 온 아르가 강, 그 건너에 라라소아냐 마을이 나타났다. 마치 천국에 도착한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세빈이는 잘 도착했는지, 숙소의 침대를 확보는 했는지, 저녁 식사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하는 생각, 길고 힘든 하루 여정을 이제 모두 마쳤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중세에 건축된 다리 밑으로 나무 그늘진 잔잔한 강물이 검푸르고, 하루의 마지막 오후 햇살을 물놀이와 함께 즐기는 어린아이의 물장구가 신선하다.
 
▲조용한 에스키로즈의 벽돌 건물 
 ▲이 고개만 넘으면 라라소아냐 마을이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여유롭고 걱정이 없는데, 나는 ‘먹고 잘 것’을 염려하며 잰 걸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굳이 주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아도, 세상의 것에 대한 근심이 내게 가득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며 근심하면서, 한 날을 죽도록 걷고 수고하며 구한 ‘먹고 잘 것’이 오늘 내게 풍성할 것인가?
 
드디어 아르가 강을 건너 라라소아냐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 저 끝에 세빈이가 보인다. 등에 배낭과 바이얼린을 멘 세빈이가 이리로 가까이 오면서, “엄마” 하고 부른다. 아빠도 있는데, 녀석이 ‘엄마’만 부른다. 이제까지 두 시간 정도 강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순례자들을 살펴보며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리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 세빈아. 잘했구나. 힘들지 않았어?” “네, 괜찮았어요. 이곳에 4시 20분쯤에 도착했어요. 수비리에서부터는 벨기에 유리형과 거의 같이 왔어요. 바이얼린 메고 가니까 대단하대요.” 눈자위에 무언가 아리한 것이 뜨끈하게 고여 온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방의 낯선 길을 난생 처음 걸으며 도전했을 아이를 생각하니 감정이 복잡해졌다. 어딘지도 모르고, 연락할 수단도 없는 그런 곳에서 부모를 기다린 열네 살 소년,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간 세빈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반갑고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는 어른의 생각보다 더 자라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 했다. “세빈아. 알베르게 침대는 구했니?” “음. 그게요. 세 사람이 모두 있어야 침대를 준다는 거예요. 크레덴시알이 있어도 안 된대요. 아까 침대 일곱 개 남았다고 했었어요. 지금 아마도 어려울 것 같아요. 지나간 순례자들 숫자가 그보다 훨씬 많았거든요.” 쿵. 헷갈리기 시작했다.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한날의 수고가 비눗방울 터지듯이 허무하게 사라지려고 한다. 벌써 저녁 여섯시가 넘었고, 햇빛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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