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28)
▲건물 벽 라라소아냐Larrasoana 표지판 |
▲아르가 강을 건너는 라라소아냐 중세 다리 |
▲금빛 아침 햇살을 받는 라라소아냐 산 니콜라스 교회 |
어둠이 찾아온다. 어둠이란 ‘공간’은 불안, 회피, 우울, 절망, 혼돈, 무질서 등으로 우리에게 언제나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다. 늘상 찬란하고 완전한 빛이 찾아옴으로 어둠은 범죄자인양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고 마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오늘은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찾아오는 어둠이 복되다. 너그럽게 감싸주고 덮어주는 캄캄함이 오히려 정의로운 빛을 밀어내듯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밤이다. 아! 어둠은 기도의 시간이다. 빛 속을 살며 나그네로 걸었던 고통과 먼지와 인내와 상처를 씻어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인도하심과 자비하신 주님께 향한 감사를 채우는, 성찰과 묵상으로 깊어가는 시간이 어둠이다. 소란과 분주함과 근심과 조급함의 발걸음을 멈추고, 기쁨과 푸른 초장과 신선한 시냇물가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아름다운 찬송으로 영광 돌리는 평화의 시간, 그것이 어두운 밤이다.
어두운 밤 가운데 잠들어 누워 있는 사이에, 천사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새롭게 하며 위로의 힘을 불어 넣을 것이다. 거룩한 선지자는 영혼의 고백을 주님께 아뢰었다. “나의 영혼이 밤에 주님을 사모합니다. 나의 마음이 주님을 간절하게 찾습니다.”(이사야26:9) 그 고요한 어둠과 함께 사랑스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가족 셋이 하는) 저녁기도회를 열었다. “자비하신 주님.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소서. 거룩한 길 걷도록 베풀어 주신 은총을 감사하나이다. 새 힘을 허락하셔서 주님의 길 지치지 않게 하소서.”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자명종을 맞추지 않은 채로 곯아떨어진 것인지, 자명종 소리를 듣고도 못 깨어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다. 그 무렵 막 일어난 듯 움직이고 있는 아내에게 시간을 물었다. “7시 30분.” ‘아차! 오늘 좀 일찍 나서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8월 27일 월요일인 오늘은 팜플로나Pamplona까지 가기로 어제 저녁에 서로 약속을 해둔 터였다. 까미노 셋째날, 라라소아냐에서 팜플로나까지 16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 항상 결정은 했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의지대로 된 일은 없다. 새 아침의 빛은 우리를 분주히 움직이게 하고, 명랑한 세상속 생명의 역동으로 안내한다. 새로운 의지와 다짐이 충일하고 어느덧 다리와 팔에는 새 힘이 부어져 있다.
▲라라소아냐를 떠나는 순례자들의 아침 길 |
▲순례자를 형상화한 벽 모자이크 |
철제 침대 위에서 밤새 온 몸을 보호해 준 침낭을 돌돌 말아 배낭 제일 밑에 밀어 넣고, 옷가지들과 필수품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배낭 제일 윗부분에는 손쉽게 이용할 먹을 거리 약간과 지도책, 안내서 등이 있다. 배낭의 겉부분 별도 공간에는 비옷이 자리한다. 배낭 양 옆 주머니에는 물병이 날개처럼 꽂혀 있다. 카사 엘리타에서 어제 저녁 미리 준비한 빵과 과일, 음료로 소박한 아침식사를 나누었다.
물과 빵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카사 엘리타에 들렸다. 어제 저녁의 젊은 아가씨는 없고 노파가 상점을 지키고 있다. 배낭을 짊어지고 들어갔더니, 상점 노파의 냉랭한 손짓이 날아온다. 배낭은 바깥에 내려놓고 들어오라는 ‘수신호’였던 것이다. 상점 밖에 배낭들이 줄을 지어 있다. 들어갈 때 왜 못 보았을까? 우리들의 시선은 항상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까닭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아집과 독선이 잔뜩 묻어 있는 까닭이다. 순례길을 나서면서 더 넓은 가슴과 공평한 관점과 관대한 삶을 구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은사를 마음에 품었는데, 갈 길이 멀다. 빵과 물을 사고, 뜨거운 물을 얻었다. 준비해 놓았던 일회용 엽차 주머니를 뜨거운 물에 우려서 차가운 아침 공기로 식은 폐부를 다시 데운다.
태양 없는 아침 바람이 쌀쌀맞다. 동은 터서 하늘은 맑고 싸한 기운이 다가오지만, 이내 태양은 열기를 뿜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 몸도 뜨거워질 것이다. 산 니콜라스 교회 종탑을 지나, 세빈이가 우리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르가 강을 다시 건넌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아내도 어제보다는 한결 좋아진 듯 걷는 속도가 좋고 여유도 있어 보인다. 오늘은 세빈이와도 보폭을 모두 함께 하기로 하였다.
등 뒤에서 일어나는 태양의 축복을 받으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행진한다. 피레네 산맥과 에로 고개를 넘어 온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충만한 자신감이었다. 길 가에 새까맣게 익은 철 늦은 산딸기가 지천이다. 롤랑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롱스의 골짜기, 가시딸기 골짜기)인데, 그 딸기가 바로 롱스(홍스, 검은 딸기)Ronce이다. 맛은 달콤하고 입안 식감도 근사하다. 우리는 종종 이 딸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고단함을 풀곤 했는데, 서양의 순례자들은 그렇게 즐겨하지 않아 보였다. 비스듬히 빗겨 쪼이던 동편 햇빛에 길게 드러누웠던 선선한 그림자가 기지개를 켜듯 일어날수록 라라소아냐는 멀어지고 있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