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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자신을 엄마가 몰라볼까봐 학생증을 손에 쥐고 죽었다는 학생 얘기, 구명조끼 끈을 묶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비장한 마음을 품었을 또 다른 두 명의 학생 얘기, 이런 얘기가 전해질 때마다 진저리와 함께 심장의 고통이 가중된다.
또 한 여학생은 갑판 위까지 나왔다가 친구들을 구해야겠다며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고, 그 어여쁜 사진과 함께 이 공간에 자주 뜨던데, 그 눈망울을 쳐다보지 못하겠다. 깊은 통증과 분노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이런 비애의 현장을 지척에 두고 누가 시간이 약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주변의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투철한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멀리서 이동하여 진도 팽목항 사고 현장을 찾아가는 형제자매들이 적지 않다. 우는 자와 함께 울기 위해 몸으로 참여하는 이들의 열정은 얼마나 극진한가. 푸짐한 봉사를 못하더라도 그저 그 아픔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 얼마나 갸륵한 사랑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이 그 자리에 엿보인다.
거기까지 가진 못해도 현장에서 이를 악물고 제 할 일을 감당하면서 눈물 흘리며 비분강개의 심사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호소하는 무리도 있다. 이런 참사를 초래한 책임의 일선에 선 자들이 너무 뻔뻔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거나 염장 지르는 거친 언행으로 상처에 소금 뿌리는 폭력적 짓거리들을 질타한다. 무능력한데 교활하기까지 하여 이것저것 쉬쉬하며 표정 관리하는 자들에게 거친 분노를 토하며 시끄럽게 아우성친다.
이 땅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를 토하며 질투하는 야훼의 일그러진 모습이 그 풍경과 겹친다. 비느하스의 열정어린 창이 번득거리는 게 그 가운데 그 오랜 투쟁의 계보가 어룽거린다.
그런가 하면 이런 열정의 도가니 속에 행여 이성을 잃을까봐 침묵하며 조용하라고, 회개하라고, 고통의 밤이 지나면 기쁨의 새 날이 온다고 훈장질하는 목사들도 보인다. 비판을 하더라도 비난은 삼가라고 개념의 섬세한 분별을 앞세운다. 이러한 혼돈의 도가니가 가져올 국가적 멘탈 붕괴의 후유증을 걱정하는 노파심이 읽힌다. 마치 청정한 성자의 평정심을 보는 듯한데 거기엔 어쩐지 위선의 구석도 느껴진다. 전지적 화법의 자리에서 이 모든 세상사를 초연한 듯한 '아디아포라' '아파테이아'의 스토아적 무정념이 기독교교육과 상담학의 세계를 수백년 넘도록 감염시킨 결과이리라.
그 요청대로 마음이 좀 차분해지면 이러한 훈장질도 관심과 애정의 일환이라고 봐줄 수 있겠다. 그런데 외려 이 땅의 침묵하는 다수 가운데 덤덤한 맘으로 이런 비극을 뒷문으로 슬쩍 통과시키는 사람들은 없을까. 자신과 별 상관 없는 불쌍한 족속의 재수없는 참사라고 손톱만큼의 연민마저 제 몸 밖으로 내쫓으려드는 부류는 없는지 걱정된다.
다수의 침묵이란 늘 이런 무대책과 무관심의 자기방어적 메커니즘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희희낙락하는 일상의 자리에서 오늘도 무사히 하루 잘 보내고 더 밝은 내일의 안녕에 대한 끈끈한 욕망만이 가로등 앞의 불나방떼처럼 번성한다.
수업도, 집필도 갈팡질팡하면서 심장이 화닥화닥 튀는 게 진정되지 않는다. 아, 깊이 상처받은 게 분명하다. 우울증 걸리지 않아야 할 텐데, 내 질투가 내 힘이, 우리의 저력이 될 수 있을까. 우울의 정념마저 애끓는 연민으로 발화하여 타인의 죽은 얼굴을 향해 소통의 회로를 구축하는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을까.
이 땅의 동서남북에서 울부짖는 고통의 현장, 그 구겨진 얼굴들, 멍든 심장들, 두루 불쌍히 여기소서.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채 이승을 하직해야 했을 저들의 그 원통한 마지막 호흡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 무거운 죄짐을 어떻게 벗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