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언제나 이 '사이'가 문제다. 실내는 깨끗한데 바깥은 늘 더럽거나 더렵혀질 준비가 되어 있다. 개인들은 겉보기에 무난한데 그들이 사이를 두고 엮어지면 슬슬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삼각관계는 참 드물다.
이번 세월호 사태로 집중 타격을 받는 해경들도 한 사람씩 집에 가면 능글맞아도 대체로 다정한 남편이고 자상한 아빠이리라. 운명의 장난처럼 갑을관계로 꼬인 작금의 현실은 그들을 유난히 악독한 집단인 양 도매금으로 난도질하는 분위기다.
정말 흉악한 윗선은 표정 관리하며 커튼 뒤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윗선'에서도 딱히 '위'가 태생적으로 나쁜 게 아닐 텐데 '선'으로 엮여 관계의 사잇공간이 생기면 그게 망나니처럼 칼춤을 춘다.
'구조'와 그 '틈새'가 인격이 되는 세상에서 설 자리를 모른 채 망설이는 그대와 나는 불우하다. 생존의 악다구니로 우리는 저 사이의 원수를 탓하며 면죄부를 얻는다.
범국가적 참사로 인한 범국민적 애도의 파장 때문인지 어제 개장한 전주국제영화제 분위기가 좀 썰렁하다. 영화의 거리를 고독한 포즈로 어슬렁거리다가 <슬픔을 넘어>라는 제목의 묵직한 덴마크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사이'의 미로에 선 망연자실의 실존을 무릅쓰고 시간을 여러 겹으로 꼬아 순간을 되살며 슬픔을 보상받는 자는 그나마 복되다. 오늘도 죽으면서 그 죽음을 내일로 유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잡된 세속의 앞뒤 골목을 종횡무진 누비는 시대에 '사이'의 지린내와 쓰레기 더미에서 풍겨나오는 계시란 것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