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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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아베와 그 일당의 전유물 같던 망언이 이즈음 세월호 참사에 편승하여 이 땅에 한 자리 한다는 사람들의 입술에 달라붙어 역겨운 악취를 토해내고 있다.
둔한 일부 정치인들이 선수치더니 이제는 국영방송 고위 간부가 뱉어낸 망언이 유가족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그 말에 웬만한 상식과 감각이 있는 시민들이 화를 내고 눈살을 찌푸리는 건 당연하다.
망언의 심리적 기저에는 거대한 사건이나 쟁점에 한 마디 거들면서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튀어보자는 의욕이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민활한 치들은 그 파장까지 계산하여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는 모양이다. 때려죽일 놈/년의 극단적 파장만 아니라면 제 이름 석자가 그 화끈한 망언과 함께 인구에 회자되는 걸 반기는 분위기다.
이와 함께 자신이 추종하거나 지지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 정파나 계급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려는 맹목적인 열정이 예의 뻔뻔한 망언을 무릅쓰게 하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망언이 그저 우발적인 해프닝으로 터져나오는 경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 저변엔 그 발화자의 인격이 책임져야 할 경솔함과 천박함이란 악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심각한 것은 이런 계통의 망언이 대체로 무지와 무감각을 그 동류로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지와 무감각은 무능력을 낳는 태반이고, 그것은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확인되었듯,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다.
우리의 연약한 말이 당장 거대한 체계의 바위를 깨부수는 쇠뭉치가 되지 못한다면 일단 '전체에 대한 통찰'에 이바지하는 한 가닥 성찰과 분석의 훈풍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얼굴에 어룽거리는 슬픔과 번뇌의 자욱에 민감하게 응답하며 그 고통을 대변하고 치유하는 데 보탬이 되는 말이라면 더더욱 좋겠다.
요즘 아침에 재채기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미세먼지 탓인지 비염의 증상인지 재채기 후에 콧물이 흐른다. 딴에는 내 나름의 상징사전에 의지하여 그것이 즉각 토해내지 못한 채 심장에 결절된 언어의 사생아가 아닌가 더러 상상해본다.
망언의 조짐이 보이는 말들의 입자가 입안에서 근질거리면 재채기를 하는 게 어떻겠는가. 그것이 적시에 터져나오지 않는다면 헛기침이나 헛구역질은 어떤가. 정 말하지 않고 못 배기겠으면 화장실 변기나 욕실에서 제 심장을 향해 독백조로 중얼거리길 권해드리고 싶다.
입술로 떠들기보다 손으로, 온 몸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녀린 손가락으로 오지의 연약한 생명을 보듬다가 고인이 된 작가 앞에 서서 그 연보를 훑으며 응시하는 이의 고요한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