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여름방학의 전국 순회 대강연 여행을 마친 뒤, 송창근은 동경으로 귀환하여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계속 다녔다. 그러다가 1924년 봄 학기에 신호(神戶:고베) 신학교에 편입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4년 가을 학기에 청산학원 신학부 전문부(3년제)의 2학년으로 편입했다. 청산학원의 신학부에는 본과와 전문부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이고 전문부는 3년제였다. 이때 그가 전문부 2학년으로 편입한 것은, 동양대학 문화학과와 신호신학교에서 공부한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26년 3월 하순에 청산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송창근은 우선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미국 유학 준비를 서둘렀다.
유학 대상 학교는 프린스톤 신학교. 부지런히 수속하여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확보하고 여권을 내고 여비를 만들어서 9월 학기가 시작되는 것에 맞추어서 떠나야 했다. 이때 그는 선교사들의 연줄이나 후원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을 독자적으로 해낸 것처럼 미국 유학 역시 독자적으로 해내려고 한 것이다.
그가 미국에 갈 여비를 구할 때, 이용도 목사가 집을 팔아서 여비를 대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뿐 아니라 이용도 목사는 송창근이 입고 있는 양복이 너무 허술한 것을 보고 자신의 양복을 내주어 고쳐서 입고 떠나게 했다.
당시 미국에 가려면, 일본 동경 인근의 항구인 횡빈(橫濱:요코하마) 항구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드디어 미국행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나서 그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때는 1926년 8월 말이었다. 이때 태평양을 건너던 일을 회상한 송창근의 회고담이 다음 해인 1927년 2월에 발행된 잡지 <청춘> 제7월 제1호에 실렸다. 제목은 ‘태평양 바다 위’였고, 편지글 형식으로 쓰였다.
R형-
본국을 떠난 지는 벌써 두 달이 거의 됩니다.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도 얼른 떠나지지 않는 걸음을 8월 30일에사 서울에서 동경으로 옮겼습니다. 초가을 선선한 바람이 거리에 왕래합니다.
9월 20일에 횡빈에서 배를 타고 지금은 태평양 바다에 떠 있습니다. 동무 없는 걸음이니 퍽 적적합니다. 바다가 예상 밖에 잔잔해서 다른 사람들은 퍽들 좋아합니다.
횡빈을 떠날 때에 동경에서 내려온 동무들이 선실에 들어와 보고서는 말은 안 해도 퍽들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마시라”고 위로했습니다. “조선사람에게 삼등도 과분하오. 아무 데를 가더라도 고난과 구차한 것으로는 제일이라는 조선사람의식만 잊지 않으면 삼등은 고사하고 사등이 있다면 그걸 타고 갈거요!”라고 했습니다.
떠난 저로서는 그러다가 바다에 물결에 사나와서 배가 곤두박질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참말 잔잔합니다. 나는 바다와 나는 아무 인연도 없는 줄 알았었는데 이번 길에서는 바다에 대한 애착심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기에 서글픈 노래나마 날마다 일기책에 적으면서 옵니다.
바다
오늘도 선실에서
갑판 위로 나오니
때는 점심 훨씬 지난 오후 세 시입니다.
하도 잔잔한 대양을 바라보노라면
바라보는 젊은 나그네 마음은
어머니 곁에서 앓는 어린애 같습니다.
바다여! 하고
나는 부릅니다.
“바다여 그대는
어머니 같으다”고.
송창근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날은 1926년 10월 11일이었다. 드디어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당시 그는 윤치호가 쓴 <무선생영어자통無先生英語自通>이라는 영어회화 자습서를 챙겨 갖고 미국에 갔다고 한다.
당시 그가 미국에 도착한 때의 상황과 전말을 소상하게 밝혀주는 귀한 자료가 있다. 1928년에 <기독신문> 지면에 4회에 걸쳐서 연재되었던 그가 쓴 “푸린스톤 만필(漫筆)”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하도 오랜간만에 붓을 잡사오니 무슨 말씀부터 먼저 올려야 하오리까. 그 중에도 내 몸이 하늘 한 끝에 나도는 외로운 나그네 신세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온즉 그저 마음이 아득아득할 따름입니다.
본국을 떠난 때는 재작년 8월 중순 가을바람이 우리 서울 거리에 나돌고 하늘의 별빛이 고요히 땅 위에 내리는 그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실상 떠나기 힘드는 결음을 떠나 동경 와서 얼마 있다가 9월에 횡빈을 떠나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산프랜시스코에 이르던 대는 10월 열하루날 비오던 새벽이었습니다.
산프랜시스코에 들어서자마자 배에서 우리 회관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날이 마침 주일날이었음으로 아무도 없는 까닭에 누구 하나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향이 없이 내려 하루 종일을 두고 우리나라 사람 찾던 그때 이야기는 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어떤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에 우리나라 분들을 만났습니다. 처음 뵈온 이가 상항(桑港)에 오래 계신 황사선(黃思宣) 목사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나서 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어른을 뵈오니 하늘에서 내려온 이 만난 것보다 더 반갑습디다요."
이때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무척 엄청난 것이었던가 보았다. 그가 말한 ‘우리 회관’이라 하면 아마도 ‘한인 회관’이거나 ‘YMCA 회관’이었으리라. 그는 미국에 도착한 날 “비 오던 새벽에” 배에서 “정향이 없이 내려 하루 종일을 두고 우리나라 사람을 찾다”가 못하고 어떤 호텔에서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2년이나 지난 때에 그 일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한 마디로 “그때 이야기는 쓸 길이 없습니다”라는 것이다. 본성이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 특별했던 일요일의 일들 하나하나가 온 존재를 뒤흔들 만큼 격동적으로 마음에 사무쳤던 모양이다.
송창근 목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로 가기 전 1년간 공부했던 샌 안셀모의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해안에 있는 첫 기착지로서, 그가 프린스톤으로 가기 위해서 스쳐 지나가야 했던 미국의 대도시들 중 하나였다. 송창근은 미국 유학 수속을 할 때 이미 프린스톤의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받아서 그걸 갖고 미국 유학 수속을 한 터였기 때문이다. 프린스톤은 미국 동부의 뉴저지 주에 있는 학교였다. 그래서 거기로 가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해야 했다.
그런데 송창근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그 곳에서 만난 한인 교역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진로를 수정했다.
우선 제일 먼저 꺼려지는 것이 ‘영어 실력’이었다. 프린스톤은 일류 대학이라서 영어가 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크게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프린스톤으로 곧장 가지 않고 샌프란시스코 교외지대인 샌 앤셀모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로 가서 우선 1년 동안 공부한다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송창근은 샌 안셀모에서 보낸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의 1년 생활을 두고 “금을 주고도 바꾸기 어려운 생활”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일단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자체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고 정서에 잘 맞는 곳이었다. 그가 늘 사모하고 흠모하는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를 기려서 그 이름을 딴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성 프란시스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 송’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을 정도로 성 프란시스를 좋아하고 흠모했다.
송창근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문 채로 서둘러서 프린스톤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어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양해해 줄 것”을 프린스톤 신학교 당국에 교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프린스톤 신학교 측의 허락을 얻어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우선 1년간 재학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송창근은 자기 앞에 놓여지는 삶에 마음을 활짝 열고 전심전력으로 부딪쳐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낯선 외국 땅에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마음 가득한 외로움과 슬픔을 참는 일과 동의어였다.
기독교인이라면,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갔는가’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알게 하는 코드가 있다. 그것은 곧 ‘그가 어떤 찬송가를 가장 좋아하는가’이다.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로서 그가 살아간 평생의 삶의 빛깔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이 가장 좋아한 찬송가는 429장이었다.
열두 살 어린 나이때부터 객지에 나가서 떠돌면서 살았던 송창근이 느꼈던 외로움과 슬픔이 얼마나 절절한 것이었는가. 또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언어를 익히고 자리를 잡아가면서 송창근이 느꼈던 소외감과 고달픔이 얼마나 절절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런 고통 속에서그가 주 예수를 얼마나 간절하게 붙잡고 살았던가.
이 찬송가는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느끼게 한다. 널리 잘 알려진 그의 밝고 활달하고 툭 트인 성품의 뒤 안에 웅크리고 있는 슬프고 외로운 영혼의 존재를 눈 시리도록 선명하게 알려주는 찬송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