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고찰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논설주간)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공석에 있는 총리를 지명한 것이 구설수에 올라 있다. 총리 지명자의 문제는 얼마 전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한 강연이라고 한다. 그 강연에서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문제가 된 부분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나, 해방 후 남북이 분단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대목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한 강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총리 후보의 평소 하는 말이나 강연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의도나 맥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 말 혹은 이 명제에 대한 철학적 혹은 신학적인 평가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정치인이냐 총리 후보냐, 한국 사람이냐 아니면 일본 사람이냐 미국사람이냐 하는 상황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와 하나님 혹은 신학적 존재”라고 하는 철학적 혹은 신학적 문제를 놓고 먼저 논하고 다음으로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문제 등을 놓고 평가를 할 생각이다.
먼저 이러한 발언은 철학에서는 “악의 문제”라고 하고, 신학에서는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 데 풀어서 말하면, “만일 신이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이며 그 존재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철학과 신학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 인간들은 이 질문을 해 왔다. 이 “왜 우리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나서부터 살아 있는 동안 병고와 천재지변과 사고에 시달리고 죽음을 경험해야 해야 하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인간적인 질문이고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신정론자의 대답, 혹은 호신론적(護神論的) 대답은 “악의 존재는 신의 섭리,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철저한 유신론적 답변이다.
이에 반하여, 무신론자의 답변은 그런 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옹호하고 신과 세상의 악의 존재를 모두 인정하면서 말하기를: “결국 신은 선하지도 완벽하지도 않고 유능하지도 않은, 악할 수도 있고, 불완전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 신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상은 완전할 수도 선할 수도 없고, 따라서 인간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그런 불완전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리 완전하지 않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우리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 혹은 신학자들이 있다.
완전한 창조주 신, 아니면 불완전한 신?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믿거나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고통, 그리고 이 세상에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악의 문제가 절실하게 생긴다. 인간 고통의 문제, “왜, 우리 갓난아이가 태어나서부터 간암에 걸려 죽어가야 합니까?” 목사를 붙들고 울부짖을 때, 목사는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리고 무슨 말이라도 위로의 말을 해야 하니까, 얼떨결에 “하나님의 뜻입니다.” “목사님, 왜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목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모두 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기도하시면서 헤아려 보십시오 ...” 아기 엄마와 아빠는 목사의 가슴을 두 손으로 치면서 울부짖는다. “하나님, 예수님, 우리 아기 살려 내 주십시오.”
그렇다고 목사가 울부짖는 아기 엄마에게 “우리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도 불완전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어려서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도 있고, 나처럼 60이 넘도록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겁니다. 불완전한 하나님은 불완전한 대신 정이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아파하십니다. 위로를 받으십시오.” 아기를 잃은 엄마나 아빠가 고등교육을 받고 철학도 좀 알고 신학에 조예가 있다 하더라도, 목사의 이런 “신학”을 들으며 과연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싶다. 신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런 “신학”을 붙들고, 창조주 하나님, 인간 만사를 다스리시고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좀 불완전하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냥 믿기로 하고 위로를 받기로 하고 실존적 질문을 포기하기도 한다. 우선 그게 편하니까? 또 알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인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니까 ... 좀 불완전하신지는 몰라도.
선한 신, 악한 세상
그러나 창조주가 불완전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보수적 신앙 혹은 신학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고통을 받아도, 아무리 신이 만든 이 세상이 천재지변으로 파괴되고 동식물이 몰살하게 되어도, 창조신의 선하심과 완전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창조주의 선하심과 완전성은 창조된 이 세상과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와 대결하게 된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답변은 인간의 죄로부터 인간의 고통이 오고 불행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 특히 최초의 여자 하와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창조주가 땅의 흙을 빚어서 만든 최초의 남자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든 최초의 여인 하와가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세운 “선악과,” “절대 따먹으면 안 된다. 이거 따 먹으면 죽어.” 했는데도 불구하고, 동산 안에 걸어 다니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자기도 따먹고, 옆에 있던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인류 최초의 부부는 에덴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남자는 땀 흘려 노동을 해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걸어 다니던 뱀은 온몸으로 기어 다녀야 하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
이렇게 타락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추방당하기 이전에, 창조주 신은 해와 달과 산과 들에 사는 동물들과 식물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만드시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보여 주시며 따먹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따 먹어도 되고 안 따먹어도 되는 자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많은 질문이 있고 대답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선택의 자유,”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이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하든지 안하든지 하는 선택의 의지와 자유를 가지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자유에 비등한 “신의 형상”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인간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자유의지의 윤리적 결론이다. 최초의 여인 하와의 선택은 자유로웠을지라도, 결국 책임을 지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악한 세상,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결국 “자유의지”의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인간에게, 하와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면, 인간세계에 죄도 없었을 테고, 인간 고통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왜 우리에게 그 쓸데없는 자유를 주셔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 이렇게 대 들고 울부짖을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러면, 신이 일일이 제어하는, 자유도 없고 선택할 능력도 없는, 로봇과 같은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인간이 인간된다는 것은 로봇이 아니고, 창조주 내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고 제어하는 기계 같은 인간이 아니라, 나의 형상을 닮은 자유로운, 스스로 선택하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깊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인간의 잘못된 선택에서 오는 것, 창조주 하나님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과 자유의 오용과 남용, 혹은 책임 회피에서 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인간이 자유도 없고 선택의 능력도 없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도 없다면, 선과 악의 문제도 없고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의 골치 아픈 문제 역시 없어진다. “아, 제가 아내를 쳐 죽인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고, 내 운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 아니고,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그 사람 얼굴을 친 것뿐입니다. 모두 가 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아닐까요?”라는 살인자의 말이 법정에서 통한다면, 법률도 윤리도덕도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을까? 하나님도 인간의 논리와 윤리와 도덕을 거스르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다.” 이 말은 칸트가 한 말이다. 그리고 독일의 신학자이며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의 감옥에서 쓴 편지에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그런 변덕스런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썼다.
총리 지명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
자 이제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가 한 말, 어떤 대형교회에서 장로님이라는 존칭을 받고, 정치학 박사학위를 명문 대학에서 받았다는 기독교인이 말한, “하나님의 뜻”과 한국 사람들의 민족적 고통의 문제로 돌아 가보자.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논리를 따르면, 한국 민족의 역사적인 고통, 일제식민지 아래서 일본 정부의 억압과 착취에 의해서 받은 고통 역시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세속적 표현으로 하면, 어쩔 수 없는 민족적 운명이고, 기독교 신학적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일본제국주의의 편에 서서, 일본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조선에서 전쟁을 하고, 조선 땅을 침범해서, 국가 주권을 빼앗고, 저항하는 자주 독립운동가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죽이기도 하고 한 이 모든 침략과 억압과 살인 행위가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본의 편이었고, 한국 민족을 버리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일본을 선택해서 한국 민족을 괴롭게 하셨을까? 일본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어서? 일본민족이 훌륭한 민족이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이 조선 사람들을 선하고 정의로운 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선한 목적이 있어서? 왜 불의하고 잔인무도한 침략과 억압의 행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이런 발언과 발상은 반민족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우리의 질문은: “왜요, 하나님, 그런 선택밖에 없으셨어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약탈하고 주권을 뺏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일본의 조선 침략과 아시아 침략,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막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악마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불완전하시고 때로는 마귀의 말도 들어 주시는 약하고 악한 하나님이신가요?”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결국, 일본의 조선 침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땅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으신 것 역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탐욕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들의 자유의지의 남용이며 권력의 오용과 남용입니다.”라고 절규하게 된다.
그러나 질문은 아직 남아있다. 우리 총리 지명자의 말, “일본의 조선 침략이나 남북 분단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이나,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말이나, 증명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증명하거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신앙의 문제는 가타부타 논의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해치거나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한 민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거나 나아가서 국가 이익에 해로운 신앙일 때는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확실한 것은,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향해서 야만적인 행위를 했다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과 관계없이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한 나라의 총리가 될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혼돈하거나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억지 연결 지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제일 먼저 생기는 문제는 치명적이다. “당신이 일본의 조선 침략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오?”하는 인식론적인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 성경에는 함부로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인간 마음대로 아무데나 함부로 쓰지 말라. 이런 행위는 신성모독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이라고 엄하게 금하고 있다. 그래서 총리의 발언은 기독교 신앙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고, 신학적으로는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하나님을 탓하기 전에 인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특히 일본의 조선 침략과 같은 명백한 불의한 행위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거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이 정치인이 되고 그것도 총리가 되면 문제가 더 커진다. “아, 세월호 참사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정신 차리라고 채찍질하는 것이고 경고하는 것이고 한국을 ‘개조’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한다면 문제는 한 개인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이 비극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 된다. 아주 무서운 소리이고 무책임하고 체념적인 패배주의적인 말이 된다. 정부가 이 참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안하겠다는 소리로 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면, 북한의 핵 문제 역시, 우리 남한 사람들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아무 것도 안하고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며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아무 소리 말고 두 팔을 들고 가만히 앉아 있고, 남에게도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말이 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친일적 발언이고, 일본의 극우파들이 좋아하라고 날뛰는 발언이라면,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에서 북한 김일성이 남침한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 발언은 친북적인 발언이며 남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발언이 된다. 이것은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이적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 개인이 교실이나 교회에서 자기의 그릇된 신앙을 대중 앞에서 떠벌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잘났다고 옳다고 하는 사람이 한 나라를 지키고 다스리는 총리가 되어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그런 신앙인이 총리가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 질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교회에서 겸허하게 다른 목사들과 마주 앉아서 신학적인 교훈을 받고 신학 상담을 받으면서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반성하고 올바른 신앙을 찾아 나서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필요하다. 본인이 총리 청문회에서 국내외적인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진 사퇴하고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많은 이들을 위해서 좋고 옳은 일이라고 진언하고 싶다. 대통령은 인사를 바로 잡고 총리 지명을 당장이라도 철회하는 것이 대통령 자신이 힘주어 말하는 “정상”이고 “상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