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성명서 공화국이라 불릴 만하다. 교단 차원의 성명서로부터 이름조차 생경한 단체들의 성명서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성명서가 최근까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성명서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정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 서며 자신부터 회개하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성명서의 내용으로서나 그 숫자의 측면에서나 우리나라와 교회의 밝은 앞날을 예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비슷한 내용의 성명서가 계속 발표되는 것은 상황 진단에 대한 견해가 비슷하다는 말이며 실행에 옮길만한 동력이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제 성명서의 내용대로 실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로서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성명서대로 실천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교회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성명서는 사실 실천을 공표하는 문건이다. 거의 모든 성명서들이 위에서 말한 대로 세 가지의 다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전반적인 기조는 회개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회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회개는 비판과 변화를 함축하면서 실천을 담보하는 행위이지 않은가? 정치적 비판으로서의 회개와 사회적 나눔으로서의 회개 그리고 신앙적 각성으로서의 회개는 현 시점에서 국가와 교회를 갱신시킬 원동력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무언가 행동화의 조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신앙인의 관점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회개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에 대한 심층적인 인식과 그 잘못으로부터 돌아서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명서 뒤에 숨어서 구두탄을 날리는 것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감신대생들의 세종대왕상 점거와 한신대생들의 삭발기도회는 회개의 모범을 보인 것에 해당한다. 물론, 그들의 행동에 대해 정치적이건 사회적이건 다른 해석들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회개가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회개를 실천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현재 한국기독교에 있어서 제일 부족한 면들 중의 하나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배운 바를 실천하려고 몸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 본지는 그들로부터 오늘날 이러한 참사를 당한 이 사회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배우고자 그들과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기독교회관 베리타스 신문사에서 이루어졌고 세종대왕상을 점거한 감신대생과 삭발기도를 감행한 한신대생을 본지 이인기 편집국장과 지유석 기자가 만났다. 대담의 정리는 본지 객원기자인 연세대 신학과 학생 이가람, 최웅재, 백결이 맡았다. 문: 네, 맞습니다.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이미 확인했겠지만 여러분들의 행동에 대해서 신문지상이나 인터넷상에 댓글들이 많이 달렸습니다. 악성이 대부분인데, 이것에 대한 생각을 묻고 싶습니다.
감: 댓글들을 좀 유심히 봤어요. 그런데 어느 언론사에 달리는 댓글이냐에 따라 다르더라고요. 악성댓글은, 안 좋게 보는 댓글을 악성댓글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게 말하는 댓글들의 논조는 단순히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월호 문제는 사실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서 다들 아파하는 문제잖아요?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까진 아니더라도 정부가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런 행동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 질문에 대해서 한편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자꾸 집회시위법을 들먹이는데, 집회시위법은 집회결사의 자유가 있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인데,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성숙한 시민이라면 내 목소리를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낼 수 있는 것을 보장받으려는 욕망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 사회는 그 욕망이 참 많이 결여되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희에 대한 안 좋은 댓글의 본질은 그것인 것 같아요. 그 정도까지 해야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저희는 핑계댈 것도 없이 ‘그 정도까지 해야 됐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저희가 아무리 악플이 많이 달렸어도, 성서의 예언자들보다 욕을 많이 먹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예 뭐 예수님보다... 저희는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로 미움 받지는 않았잖아요. 아직 박히지도 않았고.
그런데 이건 좀 약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직도 조직적인 악플단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논리적 맥락이 있어야 하는데, 쓰고 엔터 치고, 쓰고 엔터 치고, 그냥 다량으로 막 생산하려고 한 듯한 모습을 봤거든요. 그걸 보면서 분명히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종건 학우 같은 경우 차차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저희가 또 그걸 이어받아 확대시키고 있으니까 이런 것들을 신경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악플 만큼 지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지지해서 찾아와 주시고, 이름 모를 시민들도 격려해주셨습니다.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기도 하고 게다가 악플은 질적으로 떨어지기도 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저희 같은 신학생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말해야 되고, 먼저 통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사실은 신학교가 예전부터 선지학교라고 불렸지요. 사실은 미리 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계시인데 계시를 받았다면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할 일들인데, 그런 차원에서 미래에 대한 선지자적인 역할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제가 알기로도 학교나 동기들이 여러분들의 행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이유가 그 점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신대에서는 교수님들이 지지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격려하셨지요?
그런데 신학생들의 결단이 정치적인 행위로 오해될 여지들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정부에 대해서 강한 경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여러분들의 실천적인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한국교회를 바꾸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겠는지에 집중해서 논의해보기로 합시다. 여러분들의 행동을 정권퇴진에 대한 요구로만 해석하면 신앙적 결단이라는 의미가 희석될 우려가 있거든요.
감: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가 운동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운동은 적이 뚜렷하잖아요? 지금도 박근혜 정부를 적으로 규정해버리면 박근혜가 상징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투쟁이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교회야말로 반자본 운동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근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산 삶이 그렇잖아요?
그런데 요즘 목사님들은 청부론을 말하고 있더군요. 신학을 편한 신학으로 해석해서 ‘부자도 청렴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원시적이며 기복적인 신앙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본질적으로 ‘내가 자본을 소유한다’는 욕망을 성도들에게 자유롭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풀어주는 것과 동시에 그 욕망에 대해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니깐 사람들이 거기로 몰리는 것이지요. 작은 교회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안 몰리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교회 속에 뿌리내린 자본주의적 속성에 대해 투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청빈을 말해야 합니다. 돈 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미안해해야 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 생각하거든요. 지금은 교회가 그것을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사회의 마지막 가이드라인이 종교잖아요? 그 가이드라인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박근혜 퇴진은 무거운 주제가 아니라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박근혜 퇴진 다음에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맘몬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뜯어낼 것이냐가 함께 논의되지 않는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가 그 논의에 동참하고 협력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문: 사실 지금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지요. 교회 내의 구조도 자본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잖아요? 목사와 장로가 그 중심이지요. 이 때문에 사실은 교회가 사회와 구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교회에서 똑같이 벌어지잖아요? 이 점은 우리가 더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되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한: 교회에서와 사회에서 같은 일은 벌어지는 이유는 그만큼 교회와 사회가 긴밀하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교회는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 영향이 부정적인 경우도 있지만 긍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와 사회의 긴밀성이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개발해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장공 김재준 선생님은 교회의 사회화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회에서 반자본 투쟁을 하고 통일운동을 함으로써 많은 모순들을 극복해낼 때 교회도 움직이고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가정을 기준으로 이단이나 사이비를 판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집단을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규정할 때 그들이 가정을 파탄시킨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세계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결국 이단으로 규정되거든요. 이러한 것들을 봤을 때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서 교회도 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이 반공, 친자본주의적 성향을 띤 것도 우리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일 우리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면 그런 말씀은 도저히 전할 수도 없게 되죠. 물론 성경에도 그렇게 안 쓰여 있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대로 사회와 등을 돌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사회를 변화시켜야 우리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 그러면 예수를 정치지도자의 형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요?
한: 아니요. 정치지도자라는 말 속에는 정치와 교회가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문: 그러니까 사회를 일단 변화시켜야 교회도 변화한다는 말인 것이죠?
한: 하늘 뜻대로 땅을 변화시킨다는 말 같아요. 예수님은 결코 이것들이 분리되지 않았던 사람이고 성육신이라는 교리 자체도 성과 속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고 보면, 교회의 안과 밖은 구분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하늘 뜻과 우리 땅의 이야기는 하나다라고 밖에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문: 네 알겠습니다. 실제로 교회 자체가 사회의 축소판이 되어있는 상황에서는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 자체가 교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한: 네 서로 하나가 ...
문: 그러면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밀알이 먼저 썩어서 죽어야 많은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을 그 과정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예를 들면 사회를 먼저 변화시켜야 교회를 변화시킨다고 했을 때 교회가 밀알이 되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한 알의 밀알로서 충분히 역할을 하는데 교회가 먼저 밀알이 되어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요?
감: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포기할 것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장 교회를 낯설게 하는 문제들이 있잖아요?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구조, 예를 들면, 교회 안에 골프 동아리 같은 것들이 생기고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목사님들이 자꾸 말하는 상황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성공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사회인데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성공하기 점점 어려운 사회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교회에 불러들이는 것이거든요.
제가 『신자유주의와 종교』라는 책에서 봤는데 교회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데 교회 재정은 점점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교회 구성원들이 교체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예를 들면 80-90년대 교회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급진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최소한 긍휼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교회가 노숙자나 장애인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 기부도 하고 일정 부분 자기 헌금을 떼어서 밥도 지어주고 ... 등의 일들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역할을 포기하고, 즉, 교회 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 안에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 교회 안에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점점 불러 모으면서 교회를 고급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바로 이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좋은 자리에 교회 세우는 것을 먼저 포기해야죠. 좋은 자리는 비싸니깐. 비싼 자리에 교회 세우는 것 포기해야 하고, 대리석 까는 것 포기해야 하고, 십자가도 좋은 것 쓰는 것 포기하고, 목사님도 좋은 옷 입는 것 포기하고... 포기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엄청 많은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가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경우는 박근혜가 자기 혼자 퇴진하는 확률과 같다고 봅니다. 교회는 절대로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 속에 있는 평신도나 지금 자라나고 있는 신학생들인 것 같아요. 지금 목사님들로는 절대 안 바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 한국교회의 상태를 거의 절망적인 것으로 보는군요?
감: 글쎄요 제가 감리교단에 있어서 그런지, 교단은 이미 끝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봤을 때는 거의 타락할 만큼 타락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을 이제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은 교단 구성원들을 빼고, 위에 계신 목사님들 빼고, 대형교회들 빼고, 작은 교회를 바라는 신학생들, 작은 교회를 바라는 교수님들, 그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계속 만들어내면서 대형교회들과 싸우고 계신 교수님들, 그리고 지금 진짜 본질적인 복음에 목말라 있는 평신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뒤집어질 것이라 믿어요.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유석 기자(지): 저도 한 마디 할게요. 지금 교회도 이제 포기할 것도 많다고 그랬는데, 여러분들의 행동 자체가 세월호라는 직접적인 사건, 그 다음에 또 여러분들이 외쳐왔던 박근혜 퇴진, 그리고 그 이후의 일도 전제를 하고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런 것까지도 예기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 것인가요?
감: 세월호가 제일 긴급했지만 세월호가 제일 긴급했던 만큼 세월호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보인다고 생각해요. 세월호를 해결하는 것이 당장 보상금 잘 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세월호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심리는 내 아이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단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청산해내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앞으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관련된 문제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도 비슷한 문제를 똑같이 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한신대가 머리를 깎고 감신대가 세종대왕에 오르는 등의 행동들이 세월호라는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박근혜 퇴진 다음도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교회도 지금 다음도 있어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 혹시 그럼 향후 계획이나 이후의 과정에 대한 로드맵 같은 것들이 있습니까?
한: 저희는 에너지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평가합니다. 감신대의 도시빈민선교회, 사람됨의신학연구회, 그리고 저희 한신대의 민중신학회가 전국의 신학생들에게 제안서를 보냈거든요. 이제 “사랑하고 분노하고 행동함으로써 모이자”라구요. 이렇게 말을 한 뒤에 많은 신학생들이 초교파적으로 함께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에 이 이후의 과정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앙으로서 싸워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을 뿐 현재 그 일을 할 만한 에너지가 결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이 에너지를 경찰들은 매우 경계하는 듯 했습니다. 저희가 삭발한 다음에 경찰들이 가방을 탈취하고 사람들을 연행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었거든요? 그 때 딱 느꼈던 것이 ‘아, 이들이 무서워하는구나’였습니다. 감신대에서 5월 8일 날 시위를 하고 그 이후에 또 신학생들이 삭발 기도회를 하니 그들이 매우 신학생들을 꺼려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청계광장 가보면 빡빡이 몇 명이 앉아 있어요. 그 친구들이 가끔 물이라도 사러 편의점을 들어가면 자기들끼리 보고를 해요, ‘빡빡이들 이동한다’라구요. 청계광장에서 그 빡빡이들과 얼마 전에 세종대왕상 올랐던 그 친구들이 같이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위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그 자체로도 이미 많은 부분을 이뤄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문: 여러분들은 의미 있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지금 모여서 미래의 교회의 모습까지도 염두에 둔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미래에 어떻게 목회를 하고 사람들과 신도들과 어떻게 신앙을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모색까지 하셨는데, 사실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 로마당국이 두려워 한 것은 그 분이 자신의 가치전도적인 생각들을 실제로 실행했다는 점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러분들의 결행은 그 분의 행동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합니다. 예수께서 ‘나는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말하고서는 그 말대로 행동을 하신 것은 당시의 민중들에게 거의 폭발적인 파급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당국은 그걸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깐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요는 행함이 동반되는 믿음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 끝으로, 베리타스 독자들이나 여러분들의 대담을 읽게 될 신학생들, 혹은 행동을 꺼리는 학생들에게 한 마디씩만 해주세요.
감: 신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밉보일지 모르겠지만, 학점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만큼 거리로 나오기 좋은 시기는 없잖아요?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큼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저울질해볼 수 있는 시기가 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시대, 다른 시기에는 대개 내 신앙이 도태되고 쳐지기 쉬운데 지금만큼은 날을 세워서 제대로 나의 날이 섰나를 판단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해요. 이때 좀 한번쯤 내 신앙, 내 신학을 세상에 던져보고 저희 이정배 교수님이든가? 조화순 교수님이든가? 한 분께서 하신 말씀대로 ‘발로 신학을 해보면’ 참 재미겠다, 정말 같이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일반적으로 누구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잖아요? 근데 주인공이 되는 것은 내가 역사나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로서 참여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역사의 맨 앞에 서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대학생들이 앞장서야지’라는 말을 별로 좋아 하지 않습니다. 구분을 짓는 거잖아요? 기성세대들은 위에 있어야 하고 대학생은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거든요. 저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다 앞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구성원이 모두 다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돼서 나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꼭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또 저희가 함께 ‘사랑하라, 분노하라, 행동하라’고 외쳤는데, ‘사랑하라’와 ‘행동하라’는 잘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분노하라’에 굉장히 꺼림칙해 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은 분노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도 실제로 성전에서 채찍 휘두르셨거든요? 굉장히 터프하신 분이기도 하셨지요. 그런데 분노라는 것이 약자가 고통 받을 때, 그리고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감정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거룩한 분노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 거룩한 분노마저도 막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화가 나잖아요? 세월호 가족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는데 ‘아니야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그랬어’ 하면서 화를 누르는 것은 복음에 역행하는 것이라 봅니다. 복음은 오히려 거룩하게 분노하고 의롭게 분노하라고 요구를 하고 있고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또 구약은 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을 볼 때 저는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요즘 시대의 복음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문: 그러니까 이제 복음의 실천의 차원에서?
한: 네, 이제 자기 검열을 깼으면 좋겠어요. 그 자기검열은 물론 억압기제 중의 자기검열이었죠. 지금은 거룩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