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복종
이사야 42장 1-4절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마가복음 15장 1-5절
새벽에 곧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회의를 열었는데 그것은 전체 의회였다.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하고 말씀하셨다.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발하였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물어 말하였다.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사도행전 4장 27-31절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여,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히12:2)라고 말했습니다. 총독관청을 둘러싼체 군중심리와 광기적 살의에 들떠서, 이미 이성과 영혼이 마비된 채 죄인을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리라고 외쳐대는 유대군중들에게, 가시관을 씌우고과 자색옷을 입힌 예수를 그 군중들 앞으로 끌어내 보이면서 "보라, 이 사람을!"하고 큰 소리로 빌라도 총독은 일갈하였던 것입니다. 그 속에는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없는 사람을 사형죄로 몰아가는 비겁함을 꿰뚫어 보는 비웃음이 담겨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대제사장과 헤롯의 사주에 놀아나서 시골 갈리리에서 올라왔다는 랍비 한 사람을 어리석게도 죽이라고 날 뛰는 식민지 민중에 대한 멸시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더나아가서, 그 속에는 로마법에 의거하여 유대국을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행정관으로서, 십자가처형이라는 극형언도를 내릴만한 법적 근거가 없는 줄 알면서도, 군중폭동이 두렵고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모함이 두려워 법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극형을 언도해야하는 자신에 대한 자학감정도 함께 뒤썩여 내뱉는 자조적인 일갈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처럼 좋은 뜻으로 말하거나, 빌라도처럼 냉소적인 의도로 말하 거나, 여하튼 인류는 그 사람, 십자가를 짊어진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 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금주 한주간 만이라도 마음의 눈을 예수에게로만 집중 해야 합니다. 그 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설령 다시 TV의 주가등락 소 식과 환율수치와 대통령의 특별담화와, 유명한 인기탈렌트와 세계의 영향력있는 정치인, 예술인, 과학자, 경제인에게 다시 쏠린다고 하더라도, 금주 일주일은 예 수 그 분에게 주목하고 그 분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 람들은, 아니 UFO를 타고 온 외계인일지라도,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종 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은 이 사람을 정말 진지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전통적인 교리적 포장지에 싸 여있는 그리스도말고, 역사적 사실 그대로 그날 금요일날 예루살렘 근처 형집행 장 속칭 해골골짜기, 골고다에서 일어났던 십자가처형과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한 가지는, 성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날의 예수 모습을,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 노래" 가사가 묘사하는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의 이미지로 서만 바라보는 습관입니다. 너무나 피동적 모습으로, 너무나 무력한 모습으로, 모 든 것을 포기해버린 운명론자처럼 이해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저 하나 님의 영원한 예정 안에서, 예언된대로, 하나님이 쓰신 구원 각본 그대로 연출할 수 밖에 없는 운명적 연극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억울하게 비극적으로 죽어가 야하는 예수로서 그 분을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 사람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복종하시는 모습이 그렇게 나타나 보일 수 있을 것입 니다. 이사야 예언자 표현대로라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 치 털 깍는자 앞에서 잠잠한 암양"(사53:7) 처럼 끌려가기만 하는 유순한 양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금요일은 하나님의 날이 아닙니다. 정의의 날, 빛의 날이 아닙니다. 성금요일은 어둠이 지배하던 날이요, 불의, 위선, 배신, 그리고 온갖 더러운 인간의 마성이 횡횡한 날입니다. 누가복음 기자의 입을 통해 표현한다면, "어둠의 권세가 판을 치는 때 입니다"(눅22:53) 그렇지만 그런 정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주술적 마법에 걸려들어 맑은 이성과 지성과 의지가 마비된 채 비몽사몽 상태에서 끌려다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와는 정 반대 로, 주님은 뚜렷한 의식과 분명한 의지로써 고난주간 내내, 그리고 성금요일날 숨 거둘 때까지 거짓에 대한 참의 싸움, 불신앙에 맞선 믿음의 싸움, 비겁함과 타협에 맞서는 선한 영적 싸움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복종만이 아니라 그 무엇인 가에 대하여 저항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 고난주간을 지내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오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육체가 겪는 고통과 수모로서만 이해하는 감각적, 감상적 성금요 일 해석입니다. 정적인 심성을 더많이 지닌 한민족 예수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받 으신 십자가 고통 때문에 울고, 그 참으신 수모 때문에 아파합니다. 고운 맘이기 는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육체적 심리적 고난받으심으로만 생각한다면, 인류역사 안에는 그에 못지않는 처참한 형집행 방법으로 죽임당하면서도 의기를 꺾이지 않았던 의인들과 영웅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고대 노예해방운동의 영 웅 스팔타카스, 순교자 저스틴과 사자앞에서 초연했던 영웅적 순교자의 죽음들, 사지가 찢겨도 의연했던 사륙신과 의인 열사들이 모두 그런 예에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정신적으로 추상화시켜도 아니 되지만, 그렇다고해서 육체적 심리적 일차원적 고통으로 평면화해서도 아니될 것 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내내, 그리고 성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 내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 비진리, 권모술수, 죽음으로 공갈협박 하고 회 유하는 사탄권세, 종교적 위선과 인간의 배신, 인간들에게 절망하라고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 그 모든 어둠의 세력에 대하여 끝까지 저항하고 싸워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복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요, 이 세상 불의와 사탄적인 힘에 대하여는 저항하신 것입니다. 저항하실 뿐아니라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절대로 단순한 피동적 예정수난의 각본에 순종하는 주체성없는 체념이 아닙니다. 거기엔 불꽃튀기는 믿음의 처절한 우주적 싸움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절규 속에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았던 참 사람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원망이 감지되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당국자들과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빌라도 앞에서 일체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모습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 권세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의 담담함과 초연 함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침묵을 통한 말없는 저항정신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죄인 예수의 침묵을 이상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매우 역설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인데, 십자 처형 형집행과정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세미한 영적 예감은, '저들의 죄를 용서 해 주십시요'라고 간구하는 아들의 그 울부짖음에 대하여, 응답없으신 하나님의 그 절대침묵 속에서 피조물을 향하신 긍훌히 여기는 맘, 차마못하시는 맘, '不忍之情'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들의 그 간구 기도 속에 아버지의 임재가 이미 함 께하신다는 말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맛보시는 저항적 동행자 참 사람 예수의 고 난과 죽음속에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대속 적 사랑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참 사람예수, 아들예수를 참으로 사 랑하신 하나님은 아들의 그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함께 수난당하 셨습니다. 아들 예수가 고난 당하고 죽어갈 때,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계셨는가라 고 묻는다면 바로 그 사람, 그 아들 안에서 함께 고난당하셨다고 밖에는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십자가 신앙의 가장 신비한 대목이며, 그 것은 합리적 이론이 아니라, 실존적 신앙체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 온전 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종이셨으며, 하나님이 붙들 어 주셨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맘으로 기뻐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수님께 하나님의 영을 가득히 부어주셔 서, 지혜와 능력과 공의를 온세상에 베풀도록 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상한 갈 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잔불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 , 곧 지극히 작은 생명있는 것들의 희비애락에 예민하셨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고 불의를 이기셨 습니다. 주님은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시고, 사람의 맘 이 하나님을 닮았다는것을 믿으셨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리라는 것을 믿으 셨습니다. 그는 한없이 현실적이셨으면서도 한없이 이상적인 큰 꿈을 지닌 분이 셨읍니다. 큰 꿈을 현실론 속에 타협하거나 쉽게 양도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 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사랑과 빛의 왕국에서 아들과 딸들로 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고 영생의 삶을 지닌 존귀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IMF사태 때문에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자살하거나, 그래서는 아니되는 온 천하를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생명가치임을 확인시키시고 자 예수님은 그 존귀한 생명을 대속의 희생물로 내주시어 우리의 생명을 휴지처 럼 버려지는 존재의 가벼움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금요일은 겉으로 보면 죽음과 불의가 이긴 사건이지만, 속으로 보면 진리와 사랑이 이긴 날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긴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믿음이 회의와 불신을 이긴 날이요 승리의 날입니다. 사도행전 기자가 말한대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사람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주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려고 심판한 형집행 사건이 었지만, 세계사는 증명하기를 거꾸로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사악 함과 인간의 모든 죄악과 죽음권세를 무장해제시키시고, 그 독침을 뽑으시고, 그 것들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함을 천하만민 만년세세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참 사람 예수를 통하여 이 세상이 거짓, 불신앙으로 병든 세상임을 폭로 심판 하시고, 아드님의 속죄보혈이 지닌 사랑의 힘 안에서 생명세계를 새롭게 하신 사 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십자가 안에 있으면 새 사람 되 는 것이요, 누구든지 십자가를 붙들면 심판을 받지않고 영생구원을 받는것입니 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 랑합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만을 자랑하고 사랑합시다. 그 분은 진정한 승리자 이시요, 모든것을 다 이루신 분이어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 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보다 이 세상 부귀 영화와 명예 재산을 더 많이 사랑했 던 어리석음을 참회합시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교만한 맘을 버립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과 시련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용기로서 극복합시다. IMF시련이 극복도, 통일한국의 난제도, 한국기독교의 갱 신도, 경동교회의 새로워지는 쇄신도 십자가정신으로 능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확 고한 신념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죽어있는 나무나 쇠조각의 장식물로부터 해방시 켜 사람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문명을 살리는 활인소로 바꾸어 냅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주님을 신학적 교리쇄사슬에서 풀어내어 붉은 뜨거 운 피가 흘러내리는 주님으로 다시 되찾아 내서 그 분을 사랑합시다. 금관을 쓰 신체로 성당과 교회당에 답답하게 갇혀계시는 주님을 종로와 광화문네거리로, 대 학 켐퍼스 안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증권시장으로 걸어들어가시게 합시다. 그 무엇보다도, 아직 체 상처가 다 아물지 않으신 손발 그대로, 우리가정과 우리 각자의 심정에 한번 심방하시도록 간구하고 맘의 안방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모 셔드리는 한 주간이 됩시다.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지금 머리숙여 기도합시다. 주 님 제가 주님을 배반한 유다와 베드로를 닮았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주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 내 평생 십자가 에 달리신 그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