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 <부엌의 하녀>, 1660년경. |
언젠가 장로회신대 조직신학 교수인 김 모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소년시절 청교도 신앙과 정신을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하다가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는데 한 교수가 청교도 정신이 영문학을 쇠퇴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설명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금욕과 절제와 검약을 강조하는 청교도주의자들에게 예술과 미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려했던 르네상스나 바로크의 예술과 비교할 때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하게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신교회를 예술의 교묘한 거세자라고 말하는데, 개신교 안에도 세계를 부정하거나 반예술적이지 않은 흐름들도 있지만 17세기 영국의 크롬웰 공화국 시대에 예술에 대하여 대단히 강력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청교도신앙의 세상 문화에 대한 비타협과 검약을 계승한 관계로 예술과 문화에 대해, 그리고 감각과 감각의 향유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성향이 지배적이다.
예술가란 그 본성상 자기 아이디어와 가치관을 감각과 감정을 중시하면서 합리적 담론이 아닌 이미지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순전히 입법주의자로 인식하면서 평생을 세상의 악한 자와 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칼뱅주의자들에게 심미적 즐거움의 가치는 항상 뒷전인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본래의 뿌리에서 일탈한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물의 사용가치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심미적 가치와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현실의 즐거운 삶을 놀랍게도 인정하고 강조한다.
“이런 원칙을 만들기로 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할 때 창조주가 우리를 창조하신 그 본래 목적을 따르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파멸이 아니라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 가령 하나님께서 양식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뿐만 아니라 기쁨과 즐거운 기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복의 목적도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단정함과 품위를 위한 것이다. 풀, 나무, 열매 등도 다양한 용도가 있을 뿐 아니라 외양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준다. ...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유익들을 말하면서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름은 그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성경은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고 그분의 친절함을 반복해서 상기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의 자연적 성질 자체가 우리가 무엇을 위해 또 어는 정도 그것을 즐겨야 하는지 충분히 보여 준다. 주님의 꽃들에게 우리 눈에 반가운 대단한 아름다움으로 옷을 입히셨고 우리 코에 감도는 향기로운 냄새를 부여하셨다면, 우리 눈이 그 아름다움에 반하거나 우리 코가 그 향기에 빠지는 것이 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분이 색들을 그렇게 구별하셔서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멋지게 만드신 것은 아닌가? 그분이 금과 은, 상아와 대리석에 아름다움을 더해주셔서 다른 금속이나 돌보다 더 귀하게 만드신 것이 아닌가? 요컨대, 그분은 많은 것들을 쓸모 있게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매력적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가?....
그렇다면 그 비인간적 철학을 모두 내다버리자. 피조물의 쓸모만 인정하는 철학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합벅적 열매를 빼앗아갈 뿐 아니라, 사람에게서 그 모든 감각을 앗아버려 인간을 나무토막으로 전락시킬 뿐이다”[<기독교강요>, III.10.2-3]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삶은 겨우 생존하는 수준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 그분은 달콤하고 즐거운 삶을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창세기 주석에서)
칼뱅은 내세의 삶(영생)에 비해 현재의 삶은 무시해도 무방할 뿐 아니라 완전히 멸시하며 싫어해야 한다[<강요>, III.9.4]고 말하면서도 현세생활은 아무리 무수한 불행이 가득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으며 ... 현세생활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강요>, III.9.3]고 강조한다.
청교도 미술을 찾을 수 없어 개신교가 지배했던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대신한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단순한 정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참신한 눈으로 보게 하며, 천의 색깔을 고조시키는 창문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감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