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시장은 20세기 폭스, 워너 브러더스, 콜롬비아 등 미국 헐리웃 메이저 영화사들이 군침을 흘리는 시장이다. 무엇보다 미국 문화에 거부감이 없는데다, 한 번 입소문을 타면 삽시간에 구름 관객이 몰려들어 수익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베이가 연출한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 ⓒ 영화 <트랜스포머4: 사라진 시대> 스틸컷 |
마이클 베이가 연출한 <트랜스포머> 1편은 한국에서만 740만 명을 동원했는데, 이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흥행실적이었다. 이에 연출자인 마이클 베이는 지난 2009년 속편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아시아 마케팅 투어 때 주연배우인 샤이아 라보프, 메간 폭스와 함께 예정에도 없던 한국행을 결정했다. 한국 팬에 감사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방문 이유였다. 이 외에도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미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개봉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더구나 최근 들어 CGV, 메가박스 등 대형 극장 체인들이 블록버스터에 대부분의 상영관을 할당하는 실정이라 헐리웃 영화사의 물량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지난 6월 25일(수) 개봉한 <트랜스포머4 - 사라진 시대>는 영화 동호인들 사이에서 함량 미달이라는 평가가 우세함에도 5일(토) 기준 378만 관객을 동원하며 매출액 점유율 42.3%를 기록했다. 이런 흥행실적은 이 영화가 점한 스크린 수가 다른 영화에 비해 배 이상 많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트랜스포머> 4편의 총 스크린 수가 1,096개인데 비해 3일(목) 개봉한 정우성 주연의 우리 영화 <신의 한 수>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음에도 스크린 수는 789개에 불과하다.
<혹성탈출2> 변칙개봉, SNS 달궈
이런 와중에 20세기 폭스사의 <혹성탈출2 - 반격의 서막>이 지난 주말 한 바탕 논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올 여름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로 국내엔 16일(수) 개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십세기폭스코리아측이 이 영화의 개봉을 10일(목)로 앞당겼다는 사실이 언론과 소셜 네트워크(SNS)를 통해 불거졌다. 이러자 소규모 영화 배급사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혹성탈출2> 변칙개봉 논란을 지핀 주인공도 한 중소 영화배급사 대표였다.
이창언 메인타이틀픽쳐스 대표는 4일(금) 자신의 페이스북에 “7월16일 예정이었던 이십세기폭스코리아의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 기습적으로 7월10일로 변칙개봉 확정하였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저뿐만 아니라, 7월 10일로 개봉을 확정한 다수의 영화사들에서는 이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넘어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고 적었다.
▲<혹성탈출2: 반격의 서막>이 최근 개봉일을 두고 논란을 일으켜 화제가 되었다. ⓒ영화 <혹성탈출2: 반격의 서막> 스틸컷 |
이 대표는 10일(목) 아놀드 슈워제네거, 샘 워딩턴 주연의 <사보타지> 개봉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 그런데 갑자기 <혹성탈출> 속편 개봉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개봉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이 대표는 “(<사보타지>) 국내 개봉에 막대한 비용을 들이며 총력을 다했다”며 “적지 않은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붓고 개봉일정을 잡은 상황에서 이는 분명히 영화시장의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심각한 상황이며 더불어 관객들에게 폭넓은 영화 선택의 기회를 앗아가는 일이기도 하다”고 분노를 표시했다. 이어 “거대 자본의 논리로 중소 영화사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이러한 변칙 개봉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며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 변칙 개봉을 즉시 중단하고 원래 개봉 예정인 7월16일에 개봉할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린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신에서도 이번 논란을 주목해 『헐리웃 리포터』는 “<혹성탈출> 속편 개봉일을 16일에서 10일로 변경한 20세기 폭스 코리아의 결정이 현지 영화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이십세기폭스코리아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개봉 일정 변경이 미국 개봉일정에 맞췄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간 헐리웃 영화사들이 구태여 미국 개봉일정과 맞추지 않아도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맷 데이먼(엘리시움), 크리스 에반스(어벤저스2) 등 유명 배우 내한이나 <어벤져스2> 촬영, 전 세계 단독개봉 등 갖가지 마케팅으로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제작사측의 입장은 군색해 보였다.
헐리웃 주요 영화사들이 한국 시장 본격 공략에 나선 시점은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영화사가 헐리웃 대작을 수입해 거둔 수익금으로 우리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는 구조였기에 영화인들은 극력 반발했다. 헐리웃 영화사가 직접 배급한 영화 상영관에 모여 시위를 벌이는 한편 심지어 상영관에 뱀을 풀어놓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영화계는 영화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승부를 걸었고, 이 같은 전략은 성과를 거뒀다. 2000년 이후 관객 1천만을 넘긴 열 편의 영화 가운데 <아바타>를 제외한 9편의 영화가 한국 영화였다. 또 탄탄한 시나리오와 작품성을 갖춘 영화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러나 이번 <혹성탈출> 속편 변칙개봉 논란에서 보듯, 막대한 자본과 물량 마케팅을 앞세운 헐리웃 영화사의 공세는 여전히 감당하기 벅차다. 중소 영화사들은 일단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언제 다시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나마 조용히 묻힐 뻔 했던 일이 SNS를 통해 불거져 공론화된 것이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