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영성순례기] 팜플로나로 들어가는 까미노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31)
▲팜플로나의 관문인 트리니다드 데 아레Trinidad de Arre에 들어가기 전 만나는 터널 속으로 순례자가 걸어가고 있다. 
▲트리니다드 데 아레 알베르게가 울사마 강을 건너는 다리 끝과 인접해 있다. 알베르게 벽에 까미노를 안내하는 노란화살표가 보인다. 
아내의 하소연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힘들어요.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심지어, “죽겠어요.” 한다. 나와서는 안 될 말까지 나온 것이다. 해줄 수 있는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사발디카Zabaldika를 빠져 나오면서 135번 국도와 교차하고 도로 오른쪽 경사길을 따라 십 여리 쯤 가야 내리막길이 나온다. 팜플로나 도시 풍경이 저 너머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들어온다.
라라소아냐에서 떠나 10킬로미터쯤 이르렀을 때, 우리는 트리니다드 데 아레Trinidad de Arre 마을을 만났다. 온 몸의 수분을 쭉쭉 빨아가는 야속한 햇빛 속에, 내리누르는 배낭의 무게를 버티면서 걸어야 하는 두 다리의 근력 한계치에 봉착한 것이다. 하루 여정이 긴 날은 많이 힘들고, 여정이 짧은 날은 정말 힘들다. 배낭에 매달려 있는 물통에 물이 줄어들듯이 체력의 고갈상황이 눈에 보인다. 물론 육신의 고단함이 커질수록 목적지엔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이긴 하지만, ‘힘들다’는 아내의 호소에 아무런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 때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모호한 핑계로 아내와 거리두기를 유지한다. 그렇게 반복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한다.
아레Arre는 팜플로나의 관문과 같은 곳이다. 아르가 강의 지류인 울사마 강rio Ulzama을 건너는 다리 끝이, 아치 형태의 건물 회랑과 연결되어 있어서 회랑을 빠져 나가면 다리를 다 통과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다리 위에 있는 그 건물이 11세기부터 수도원이 운영해 오고 있는 트리니다드 데 아레 알베르게이다. 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순례자들을 위해 그곳에 알베르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흘러가는 강물에 시간의 무상함이 얹혀 진다.
▲까미노는 팜플로나 교외 도시인 비야바Villava를 지나간다. 
▲팜플로나 교외 부를라다Burlada 시내 약국 앞에 걸려 있는 네온 녹십자 
집과 건물,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중세의 고풍스런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는 골목길에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부딪힌다. 노인들은 한가로이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담소하며, 지나가는 우리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노란 화살표는 건물 벽에, 기둥에, 길바닥에, 쓰레기통에, 빗물관에, 도로 표지판에, 신호등에, 독자적 화살표 표지석에 끊임없이 이어진다. 모양도 다양하다. 손 붓으로 페인트칠한 것, 플라스틱에 잘 인쇄하여 붙인 것, 철 표지판으로 견고히 세운 것, 보도블럭에 조가비 문양을 새긴 것, 순례자 형상을 한 새김판 등이 손바닥만한 것에서부터 어른 키보다 더 큰 조형물까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양은 노란 화살표가 기본이다. 지금까지 시골길을 걷는 동안 화살표를 따라가는 길이 그다지 혼동되지 않았었다. 언뜻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몇 번 있었을 뿐, 길은 대부분 단순하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길은 거미줄처럼 복잡하다. 복잡한 길을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는 것에 세밀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소란함과 분주함 속에 고요함과 단순함의 길이 보인다.
▲부를라다 거리에 있는 육고기 판매점 진열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는 도시의 노인들
이미 팜플로나에 들어온 것이지만, 우리가 묵을 ‘헤수스 이 마리아 알베르게’까지 4킬로미터 이상을 더 가야 한다. 상점들이 즐비하다. 아주 고급스런 모양을 낸 쿠키와 케익, 방금 구워낸 것처럼 보이는 통통한 살 오른 빵이 진열대에서 뽐내고 있다. 각종 향신료를 담아 놓은 병, 연두색 완두콩을 가공한 통조림, 바로 요리하면 될 정도로 깨끗하게 다듬어진 생닭과 부위별로 큼지막하게 썰어져 있는 살이 붉은 고깃덩어리, 그 위에 덜렁 올라가 있는 돼지머리가 낯설지 않은 푸줏간도 보인다.
팜플로나와 인접해지면서 비야바Villava와 부를라다Burlada를 지날 때는 이제 완전히 대도시에 들어 선 느낌이다. 도시의 약국 입구에 있는 네온 녹십자가 또렷이 발광한다. 초록색 네온 십자가 가운데 빨간 글씨가 현재시각 12시 1분을 안내한다.
▲부를라다도로 끝, 수풀 위로 산타 마리아 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라라소아냐를 떠난 지 4시간만이다. 빛깔이 고운 화초들과 관목으로 조성된 도로와 원형 로타리, 고층 건물과 세련된 카페, 십자가와 중세식 교회, 활기찬 자동차들의 행렬, 시민들의 여유로운 발걸음, 형형색색의 전자식 간판이 현란하다. 분명 늘 보아왔던 것들인데 무척이나 새롭다. 3일 정도를 조용히 지낸 탓에 우리의 몸이 고요와 침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것일까? 프랑스 툴루즈에서 지낸 이후, 대도시는 팜플로나Pamplona가 처음이다.
조금 전까지 영혼없는 사람들처럼, 감각없이 걷던 우리 일행도 활기를 띤다. 한걸음 나갈 때 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시 풍경이 근육에 몰핀이라도 주사한 것처럼 순간의 고통과 피로를 깜박 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진통제의 효과라는 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게다. 얼마 못가서 우리는 다시 급속히 지쳐버렸다. 더 이상 걷기 힘들어 멈추어 선 채, 길 가에 있는 도시 안내도를 괜히 들여다보며 지하철 노선도 살펴보듯 현재위치와 목적지를 한참 찾아본다. 부를라다와 팜플로나를 연결하는 한적한 아스팔트 도로(도시 안내도상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를 따라, 이어진 돌담 그늘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돌담길 끝에 수풀이 보이고, 드디어 그 위로 연한 살구색 산타 마리아 교회Catedral de Santa Maria가 반갑고 신비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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