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이스라엘 청소년 3명이 납치되어 피살된 주검으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극우세력은 팔레스타인 소년을 납치해 불에 태워 살해함으로써 보복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8일부터 가자지구를 공습해서 200여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를 냈고 지금도 공격을 진행 중이다. 숨진 이들의 상당수는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들이었다. 이에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인 하마스는 로켓으로 응사하며 발사범위를 이스라엘 북부로 확대하였고 팔레스타인 민중은 제3차 인티파다(항거, 봉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공격이라 칭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무력대치의 상황은 서로 민간인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도 쉽사리 해소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진정, 이들의 분쟁에 해법은 없는 것인가?
이러한 상황을 역사, 종교, 인종, 정치, 경제, 문화 등 어떤 영역에서 고찰하더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상대를 멸절시켜야만 분쟁을 끝낼 수 있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듯하다. 그런데 이들의 분쟁 양상을 살펴보면, 역사의 불가해한 유전(流轉)을 실감할 수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면 골리앗이 된 다윗을 연상하게 된다. 반면, 과거 블레셋의 골리앗을 상대해서 돌을 던졌던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의 탱크 앞에서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모습에 어려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사실상 힘의 논리로만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초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강자와 약자로서 역사의 유전을 겪어온 것이다. 그들은 힘의 논리에 따라 그 유전의 순환고리에 얽매여 있다.
이 분쟁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의 분석들이 제기되었고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양 당사자 모두 내부의 정치역학 관계를 상대방을 통해 돌파하려고 하기 때문에 분쟁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역학을 따지자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권력관계가 가장 직접적이며 물리적인 현안일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분쟁의 해결책은 궁극적으로 강자의 양보를 얻어내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비인간적인 권력이 군림할 때 궁지에 몰린 약자는 강자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강자에게 아마 죽을 각오로 대항하거나 강자의 허점을 노리거나 혹은 강자에게 굴욕적으로 순응하게 되고 그 와중에 벌어질 약자의 희생을 토대로 협상의 여지를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할 필요도, 약자의 허점을 노릴 필요도 없이 그저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강자의 비인간성이 부각되고 약자의 희생을 용인해야 하는 슬픈 현실이 두드러지게 된다. 정치적 역학이나 인권의 시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고찰할 때 대개의 비난이 이스라엘에게로 쏟아지는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왜 이스라엘은 과거 그들이 나그네 되었을 때의 역사에서 분노만을 배우고 있는가?,’ ‘왜 그들은 기억하기도 싫을 아우슈비츠의 만행으로부터 사람을 산 채로 불 태워 죽이는 만행만을 배운 것일까?’라는 비난에는 애꿎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여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저지른 비인간적인 만행에 대해서는 왜 눈을 감느냐?,’ ‘그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에 끼칠 악영향을 미리 제거하고자 하는 신앙적 열정은 왜 무시하느냐?,’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문화적 여건상 분리정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항의들은 분쟁의 현장에 기반할 때 충분히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강자의 항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러면 이 반복되는 분쟁 가운데 발생하는 양측 민간인들의 희생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정치역학이나 인권의 시각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면, 보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성립과 존재 이유를 성경에 기반하여 해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한 입장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므로, 그 의식의 적용을 성경에 기반해서 평가할 때 오히려 현 사태를 푸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다는 자부심을 내세우다가 예수께 질타를 당했을 정도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의 핵심적 요소이다. 이것을 지적하는 이유는 그들의 정체성의 구성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요소가 핵심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다(“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18:18)는 사실도 더불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뜻을 먼저 각성해야만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들이 듣고 싶은 부분만 듣고 있거나 듣고 싶은 대로만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일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말씀대로 각성한다면, 그들은 이방인들과 형제로 지낼 때 감수해야 하는 고통을 어떻게 인내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다윗의 도성을 쌓고서 그 안에서 다윗이 누렸던 향락을 독점적으로 누릴 날만을 기대하며 자신을 불편하게 할 우리야를 간교와 폭압으로 제거하려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이므로 그 복을 다른 민족에게로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마침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의 조상인 이삭이 보여준 모범이 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삭은 블레셋 주민들과 비교될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그런데 블레셋 주민들의 텃세에 밀려 자신이 판 우물을 번번이 내주게 된다. 무려 5번이나 새 우물을 파게 된다. 하지만 이삭은 그때마다 물이 터지는 축복을 받았다. 그는 사실상 척박한 죽음의 땅을 이길 복을 받은 것이다. 만일 이삭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생각하지 못했다면, 블레셋 주민들의 텃세아래 수탈당하는 상황을 그대로 용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블레셋 주민들의 강화 요청을 받게 된다. 이삭이 겪었을 고통의 시간이 짧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주민들의 강화 요청은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고 말하게 만들 것이며 그 고통이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더 느끼는 시간이었다고 말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삭이 빼앗긴 우물들이 블레셋 주민들의 젖줄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지른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창26:20)는 주장은 그 이면에서 그들이 그 우물의 물로 생명을 이어왔음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 이삭의 입장에서는 블레셋 주민들이 그 우물을 탈취한 것이지만, 그 주민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통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조상인 이삭의 모범을 숙고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진실로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윗의 영광을 이 땅에 재현하기만을 고대하며 아직도 “왕이여, 일어나소서!”를 외치는 것은 ‘원가지’(롬11:24)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곁가지를 고사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명분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며 분쟁을 지속시키는 것은 곁가지를 말라죽이는 일에 해당한다. 곁가지가 말라죽어가는데 원가지가 굳건히 서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진실로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원가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샘물을 얻었다면 그것을 독점할 방안을 강구하기보다 그 물이 척박한 땅으로 흘러가도록 인내로써 길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 축복을 약속하고 그가 블레셋의 강화요청을 받게 된 것이 그가 마침내 우물을 충분히 크게 파서 더 이상 블레셋 주민들과 다투지 않게 된 이후(창26:22)라는 사실의 행간을 이스라엘이 읽어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