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논설주간) ⓒ베리타스 DB |
고대 로마 법전에 당한 것만큼 당하게 하라는 보복에 관한 “탈리온 법”(lex talionis)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유태교와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당한 것만큼 당하게 하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친다(출애굽기 21:22-25; 레위기 24:19-21; 신명기 19:15-21). 영어의 retaliation(보복)이란 말은 바로 “탈리온 법”의 라틴어 표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김구 한신대 교수 칼럼, <에큐메니안> 2014년 8월3일자). 김구 한신대 교수는 이 칼럼에서 지난 한달 동안 이스라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천 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있는 참혹한 상황을 탄식하면서 이 “탈리온 법”의 폭력성을 문제 삼았다. 독일 나치스에 당한 유태인들이 자기네들이 당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팔레스타인의 부녀자들과 무력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 약자 하마스에게 가혹하고 잔혹한 전쟁행위, 무차별 살인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신학적 비판의 글이다.
8월은 세계 근대사에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겠다. 우리에게는 8.15 해방과 광복의 달이지만, 일본에게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원폭투하로 항복하고 패전한 달이다. 1940년 겨울 하와이 진주만 피격으로 피해를 입고 선전포고를 한 미국은 1945년 8월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실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아니 그 이상의 보복행위이며 폭력행위였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당했던 것만큼 보복할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의 광복과 해방은 38선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이 분단되는 현실로 이어졌다. 우리에게 “해방”은 “분단”이었다. 일본의 쇠사슬에서 풀려났다고 만세를 불렀지만, 우리 허리는 분단의 쇠사슬에 다시 묶이면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과 북이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고 죽였다. 그리고 60년 넘게 서로 원수가 되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갚아야 하고, 남쪽의 한미 군사훈련은 북쪽의 미사일 발사와 핵폭탄 개발로 군사적 폭력을 증폭하고 서로의 적대감과 증오심을 극대화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폭력을 정당화해 왔다. 남북 대치상태와 휴전상태에서 전쟁 없는 사이비 평화 시대에서 우리의 언어, 사상,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서 남과 북이 거의 똑 같이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증오하고 욕하고 악마화하는 것을 정당화하여 왔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직장에서, 정부에서, 경찰에서, 군대에서 폭력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당하면서 살아 왔으니, 나를 못살게 군 놈들에게 보복을 못하면, 나보다 약한 놈에게라도 보복을 해야겠다”는 의식과 무의식에서 폭력은 난무하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폭력 문제는 군대 안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우리 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학교에 다녔으니, 군대에 가도 폭력은 아무것도 아니고, 적을 죽여야 한다고 훈련 받는 상황에서 폭력은 용기이며, 당하는 것을 참는 것 역시 용기와 인내로 미화된다. 그렇게 군대생활에서 폭력으로 세뇌되어 온 한국의 젊은이들의 직장생활은 군대생활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직장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가정에서 재생산되고, 그리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다시 반복한다. 폭력의 악순환이 온 사회와 정신생활과 사회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폭정 시대에, 로마제국의 군사적 폭력에 맞섰다. 그리고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 열심당원의 폭력에 맞섰다. 예수는 유태법전의 “탈리온 법”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쳤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마태복음 5:38, 공동번역). 다른 번역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라”라고 되어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마태복음 5:39,40, 공동번역).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복음 5:41,42, 공동번역).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로마 군대이지만, 예수는 이러한 강요에 대해서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더 해주라며 당시 유태인을 향해 충고하고 있다.
나도 6.25 전쟁 한가운데서 사병생활을 했다. 매도 많이 맞았고, 가혹행위도 많이 당했다. 거의 모두 부당한 폭력행위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것이 군대 안에서 당연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높고 깊은 뜻”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폭력행위에 대한 나의 보복은,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참된 용기는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자제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내가 상급병이 되고 하사관이 되었을 때도 나는 단 한 번도 부하 사병에게 손을 대지 않고 5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쳤다. 나는 목사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으면서 자라났다. 목사 아버지의 부당한 처벌에 대항해서 나는 결코 우리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했다.
시어머니에게 당한 며느리가 “나는 내 며느리에게는 절대 내가 당한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할 수 없을까? 그리고 착한 시어머니의 전통을 만들어 나갈 수는 없을까? 술 취한 아버지에게 당하는 폭력이 난무하는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나는 저런 아버지가 결코 되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폭력의 악순환을 근절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을까? 규율과 책임감, 용기와 의리, 나눔과 돌봄의 문화가 우리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 깊이 자리 잡을 때, 군대문화 역시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위해서 목숨도 바치는 문화로 성숙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