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한 시론] 교리적 다름을 인정하는 종교적 관용성(Ⅰ)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회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방한하는 교황을 배척하는 태도는 성도의 바른 태도 아니다(1)  
-목차-   
I. 중세의 가톨릭과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1) 중세의 타락한 교황들: 적그리스도의 모습   
   2)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和議)  
   3) 칼빈의 종교 연합정신  
   4) 30년 전쟁 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   
   5) 16세기 트리엔트 종교회의: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자체개혁   
   6) 제1차, 2차 바티칸공의회: 19세기와 20세기 로마 가톨릭의 자기개혁   
   7)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프란시스코 교황: 깊은 영성과 높은 품격  
I. 중세의 가톨릭과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머리말 
▲복음주의 신학자 김영한 박사 ⓒ베리타스 DB
오는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로마 가톨릭(이하, 가톨릭) 프란시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그는 세계가톨릭교회의 목자로서 한국에 있는 약 450만 명 가톨릭인들의 신앙을 격려하러 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나 방한한 데 이은 25년만의 교황의 한국방문이다. 이러한 교황 방문에 대하여 지난번 WCC제 10차 부산대회를 반대하듯이 한국개신교의 일부 극단한 보수주의자들이 교황 방한을 배척한다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이들은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다,” “가톨릭은 이단이다,” “가톨릭은 교황을 우상화하고 있다,” 심하게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며 방한을 극렬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적으로 맞지 않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차이점은 적지 않다. 교황 무오설, 마리아 승천설, 고해성사, 연옥설,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조상제사 허용, 천주십계라고 해서 제 2계명을 없애고 제10계명을 둘로 쪼갠 것 등은 개신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종교”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근본주의적 발언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와 같이 가톨릭이 예배 시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김영재, 『기독교 신앙고백』[서울: 영음사, 2011], 36),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고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톨릭을 기독교로 받아 들여야 한다. 이웃 종교에 대한 배척 태도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과 성화를 좇으라는 성경의 말씀에 거슬리는 독선적 태도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기독교에는 큰 범주로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가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종교화된 4세기경부터 타종교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기독교가 국교화됨으로써 타종교는 허용되지 않았다. 배척 전통이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에 모두 계승되어 내려왔다. 다만, 정교회의 경우는 이슬람교에 의해 지배받던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에 의해 관용의 정신을 배워서 지금은 배척하지 않는다. 근본주의 이슬람이 아닌 온건한 이슬람교는 우상숭배 행위만 아니면, 기독교, 유대교를 존중해준다. 가톨릭의 경우는 타종교에 대한 배척사상이 매우 강했는데 1963년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 타종교를 인정하였다. 불교 등 타종교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 개신교의 경우는 19세기 말 미국을 중심으로 대두한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타종교에 대한 배척사상이 매우 강하다. 특히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는 자유주의를 배격하면서 타종교와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타종교를 배격한다. 한국 일부 보수교회는 미국의 근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하여서 타종교를 배척하고 있다.    
한국 보수교회에서는 교리절대주의 내지 장로교 지상주의가 팽배하여, 칼빈 사상 내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맞지 않으면 이단 내지 유사종교로 배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루터나 칼빈은 초창기에는 당시의 타락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보았다. 그리고 가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서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루터교회를 설립했고, 한 세대 후인 칼빈도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를 세웠다. 이때부터 이들은 공교회인 가톨릭 자체를 이단으로 보지 않고 가톨릭과의 연합과 일치를 시도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서구 교회사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나온 개신교 루터파 교회와 칼빈파 교회가 어떻게 대립갈등을 통해서 결국 공존하기에 이르렀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중세의 타락한 교황들: 적그리스도의 모습    
로마 가톨릭 교황들(니콜라스 5세, 바오로 2세, 식스투스 4세, 인노센트 8세, 알렉산더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등)도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에는 성경대로 믿으려는 자들을 박해하고, 면죄부를 팔고, 종교권력으로 반대자들을 마녀재판으로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는 등 각종 비리를 저질렀던 때가 있었다(최덕성, 『종교개혁전야』[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3], 447-53).  당시에 교황들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적그리스도”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황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로마 교황 프란시스코는 “가난, 겸손, 섬김”을 추구하고 권위주의에서 탈피한 서민적 사목자 상(像)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자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에서는 목사직이 세습되는 나쁜 관행이 있으며 개신교 총회장 선거에서는 금품이 오가는 일이 있어 세상의 비난을 받으나 로마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은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비밀투표로 선출하기 때문에 가장 공정하게 선출된다. 이 점은 로마가톨릭이 지니는 강점이기도 하다.
교황청 특명을 받은 독일의 사제 테첼(Johann Tetzel)은 면죄부(indulgentia) 판매에 관한 설교에서 “동전이 돈궤 속에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 오른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가톨릭 사제(司祭)요 신학교수인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명제를 맹렬히 공격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비텐베르크대학의 게시판으로 사용되는 교회당 출입문에 95개조의 논제를 제시했다. 교황은 연옥의 형벌로부터 어느 누구도 해방시킬 수 없다(제20논제). 돈이 돈궤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의 가르침이다(제26논제-제27논제). 면죄부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한다고 믿는 자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제32논제). 사람들은 면죄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될 수 없다(제33논제). 참된 통회(痛悔)는 죄의 용서와 죄의 면제 둘 다 받는다. 그것은 면죄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제36논제). 교황은 부요하면서 자신의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가?(제86논제). 교황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루터는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악명 높은 이단자”로 선언되었다. 1520년  6월 15일 루터는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받기에 이른다. 
루터는 1520년 출판된 「독일의 기독교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교황직 자체가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추기경, 교황,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여 독일 황제와 귀족들이 투쟁해야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글은 로마에 짓눌린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터는 개혁의 시작에 있어서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적극적 행동주의를 경고하였다. 선행이 자신의 힘과 이성에 의존해서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이것과 관계하지 않으신다(WA[Weimarer Ausgabe] 6).    
루터는 교황주의의 세 가지 벽을 지적한다. 첫째 벽은 교황의 권세가 세속권세보다 우월하다는 논제다. 둘째 벽은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논제다. 셋째 벽은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소집할 권한을 가진다는 논제다. 이에 대항하여 루터는 세 가지 방어벽을 구축한다.   
첫째 방어벽은 모든 신자는 사제직을 갖는다는 논제다: “모든 기독교인은 진실로 영적 지위를 소유하고 있으며, 직분의 차이 이외에 그들 가운데 어떤 차이도 없다”(WA 6, 407, 13). 둘째 방어벽은 교황의 해석은 오류를 범한다는 논제다. 교황만의 성경 해석권은 “공상우화(空想寓話)”에 지나지 않는다(AE[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44, 134). 셋째 방어벽은 역사적으로 교황은 그러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논제다. 역대의 사도 공의회는 사도들에 의해,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다(AE 44, 136-37). 루터는 “선(善)을 증진시키는 것 외에 교회의 권위는 없다”(WA 6, 414, 6)라고 피력한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교황의 부패에 불만을 가진 독일 영주들, 특히 작센의 프리드리히 현인을 비롯하여 많은 농민 지지자들을 결집하여 루터파 교회를 이루며, 츠빙글리와 칼빈도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개혁파 교회를 형성하였고 그 세력은 갈수록 커져 가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도 이러한 개신교 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정치적으로 이들의 종교적 화해를 중재하기에 이른다.
2)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和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 1500-1558)는 제국 통치자의 입장에서 구교(로마가톨릭)와 신교(루터파)로 나누어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기 위하여 아우구스부르그 제국회의를 소집하였다. 
1530년에 루터는 아우구스부르그 의회에서 황제 카를 5세 앞에 출두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으로 알려지게 될, 그의 신앙에 대한 진술을 하였다.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첫째, 루터의 강조점이 되었던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강조, 자유의 소중성, 초대 기독교 정신의 계승이다. 둘째, 내용상으로 보아 결코 어떤 새로운 교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여러 세기를 걸쳐 교회가 가르쳐 온 기독교 신앙의 중심,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가르침과 성서의 기본적 교의(敎義)를 재강조한 것이다. 셋째, 모든 항목의 시작은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es wird gelehret)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우구스부르그 의회는 이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평결을 내렸다.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은 독일의 저명한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였던 멜랑히튼(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받아 적었는데, 그는 비텐베르크의 대학에서 루터의 동료였다.  
아우구스부르그 의회 이후에 다수의 루터파 독일군주들과 도시들은 가톨릭 합스부르그 가문에 대항하는 종교적, 군사적 동맹인 쉬말갈덴 동맹(Schmalkaldic League, 1531)을 결성하였다. 독일이 루터파와 가톨릭으로 점점 더 뚜렷하게 분열됨에 따라 긴장이 고조되었다. 1546년부터 1555년까지 독일은 종교적 내전으로 분열되었다.   
1555년에 양측은 타협안을 찾았는데, 그것이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和議)조약이다. 이것은 각각의 독일군주들에게 로마가톨릭과 루터파 중에서 자신의 국가의 종교를 선택할 권리(cuius regio, eius religio)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루터파는 독일의 많은 지역, 특히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남부독일의 대부분과 서부의 라인란트는 동부의 실레지아와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으로 남게 되었다. 루터파는 곧 스칸디나비아로 확산되어 스웨덴과 스웨덴이 통치하고 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및 라트비아의 발트해 지역에서는 물론, 덴마크와 덴마크의 통치하에 있던 노르웨이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카를 5세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503-1564)는 1555년 9월 아우구스부르그 제국회의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루터파 개신교도에게 가톨릭교도와 같은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카를 5세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 영주들이 세속권력만이 아니라 종교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황제에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3) 칼빈의 종교 연합정신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개신교의 심각한 분열(루터파, 츠빙글리파, 칼빈파, 재세례파 등)에도 불구하고 부처(Martin Bucer)와  멜랑히톤처럼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정신을 가장 많이 보여줬다. 칼빈의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과 입장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별히 칼빈이 교회의 하나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트리엔트 종교회의(Council of Trient)를 통해서였다. 약 18년 간 계속됐던 트리엔트 종교회의 기간(1545-1563) 동안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자로 활동했다. 칼빈은 이러한 종교회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4권 제1장의 제목에서 벌써 교회의 하나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것은 참된 교회에 관한 설명으로 참된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므로 우리가 그 교회와 더불어 하나됨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칼빈은 그보다 한 세대 앞선 종교개혁자 루터와 같이 근본적으로 교회가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칼빈의 교회관은 교회를 제도나 기구로 보는 개념적 이해에서 출발함으로써, 성도의 교제를 강조한 루터와 다르다. 칼빈은 교회의 하나됨에 있어서 분명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됨의 실현을 위해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칼빈은 마지막까지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정일웅, “로마가톨릭과 연합하려 했던 칼빈,” 정일웅 칼럼, 『크리스천투데이』 [2011.02.24. 16:01]). 칼빈은 1540년 독일 하게나우(Hagenau)와 1540-41년 개최된 보름스(Worms) 종교회의, 레겐스부르그(Regensburg) 종교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이 모든 노력들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과의 하나됨을 위해 힘썼던 노력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들이다(정일웅). 
이 외에도 칼빈은 교회의 분리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대해 처음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첫째는 프랑스의 황제 프란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다. 둘째는 1539년 사돌렛 추기경 앞으로 보낸 그의 유명한 답변서에서 칼빈의 ‘교회 하나됨’의 입장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로마가톨릭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버리고 떠났다고 비난하지만, 나의 양심은 전혀 나를 고발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패잔병들이 패주하고 흩어지며 대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부대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들에게 원대복귀하라고 외치는 탈영병과도 같기 때문이다. 오 주님! 이처럼 당신의 모든 종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당신의 명령을 전혀 들을 수 없고 거의 자신들의 부대장, 자신들의 의무 및 군 입대시의 서약을 잊었나이다. 나는 흩어진 이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낯선 기치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백성으로 머물기 원하는 한, 따라야 할 당신의 고상한 기치를 높이 들었나이다. 그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열 안에 계속 있게 해야 할 자로, 이들을 흩어버린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내가 전혀 단념하지 않고 있을 때 이들은 폭력으로 나를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글픈 소요가 일어났고 싸움이 불붙어 폭발했습니다. 오 주여! 과연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할지 당신이 판단하소서. 나는 일치추구의 열정 때문에 항상 말과 행동으로 항변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의 일치란 당신으로부터 시작해 당신 안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우리들에게 펑화와 일치를 천거하실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이 일치와 평화를 유지케 하는 유일한 결속의 끈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칼빈, 1539년 「추기경 사도레토에게 보내는 서한」)     
칼빈이 제시한 교회관은 오늘날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다스리시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이며, 그 참된 교회 안에서만 하나됨이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칼빈에 따르면 유일한 참된 교회 안에 보편적인 교회와 개별적인 교회가 구분된다. 이 둘은 물론 가시적인 교회이다. 그는 가시적인 교회를 중요시했다.   
둘째, 보편적인 교회는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고 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하나님의 참된 교리에 동의하고 같은 신앙의 줄로 매여 있는 교회를 말한다. 이에 비해 개별적인 교회는 마을과 도시에 사람들의 수에 따라 필요한 대로 나누어진 교회를 뜻한다.   
셋째, 구체적인 지역교회 내에서 교리가 일치해야 하지만 교회들의 상호관계에서는 교리적인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교리의 공통성이라 할 때 개개인의 신앙표현이 모두 동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매사에 확실하고 의심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교회들 간에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신앙의 하나됨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정일웅).  4) 30년 전쟁 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
아우구스부르그 제국 의회에서 도출된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和議)조약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교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로마가톨릭은 개혁파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 협약(cuius regio, eius religio)에 따라 영주가 개신교를 선택할 경우, 자유로운 종교생활이 가능했다. 이것은 가톨릭과 루터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사실 칼빈파 등 다른 신앙노선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에서는 칼빈파가 활발했던 반면에, 독일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었다.    
루터파와 달리 칼빈파 개신교도는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을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루터파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제후가 개신교로 개종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황제는 가톨릭 후원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는 중세 이래 ‘교황의 보호자’로서 가톨릭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신성로마 황제와 소수의 가톨릭 제후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개신교도로 바뀌어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1618-1648년에 있었던 30년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30년 종교전쟁을 치른 후 독일 북부 뮌스터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처음으로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칼빈주의) 교회를 인정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유지되는 종교 간의 평화는 30년 종교전쟁의 참화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얻게 된 것이다. 30년 전쟁이라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양편 신자들이 모두 삶의 터전이 황폐해지는 참혹한 고통과 무의미하고 참담한 현실을 맛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앞서 간 유럽교회의 사례를 거울삼아 타종교에 대한 존중과 공존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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